행앗썰

2018. 7. 29. 02:11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이환] 희래希來, 봄.

2018. 1. 28. 21:14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이환] 화유和柔

커뮤로그 2018. 1. 28. 21:13

180124 화유和柔 (with. 례분)




   그 선명한 쪽빛을 떠 담으면 이러한 색이 날까 하였다. 



   이환은 두 손을 짚고 못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잔잔한 수면은 면경이 되어 여름의 창천과 저를 동시에 비추었다. 실낱같은 남풍이 스미자 그 위로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풍경은 쉽게 이지러진다. 하늘에서 우러난 푸름이 살랑이며 퍼지는 것을 보고 차차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뺨을 타고 얼룩져있던 물그림자가 죄 가셨다. 

   사박사박. 설익은 풀잎을 밟고 뒤로 다가온 이가 홀로 멀뚱히 앉아있던 붉은 머리를, 말아든 종이로 내리쳤다. 아야. 경쾌한 소리와 함께 두 손이 올라가 얼른 웅크리고 만다. 엄살은. 수련을 보고 그리랬더니 뭘 보고 있어. 설마 익사를 희망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얻어맞은 쪽은 침음을 삼키고 제 머리를 감싼 손을 풀더니 목을 뒤로 젖혔다. 곱잖은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이가 전환된 세상에 서 있었다. 햇살을 더 맞이한 동공이 짧게 수축했다. 뭔데, 신관님.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기에, 투덜거리는 음성이 두어 쓸 데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답을 재촉하였다. 둥글게 담긴 쪽빛과 섞여든 호박색 눈을 두어 번 깜박인 뒤에야 게으른 입술이 열렸다. 거기서 으음― 하고 또 말을 골랐던가.


   “내 너를 보고 있다.”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구겨진 종이가 이번에는 소년의 이마를 정통으로 타격했다.


   “…… 아야.”
   “이제는 반응도 늦네.”


   화유는 사납게 등을 돌렸다. 몇 걸음 앞서 걷던 신발 코가 내리는 옷자락 아래로 사라진다. 댓살로 짠 자리에 앉아 색색의 물감이 담긴 그릇을 옆으로 조금 밀어냈다. 대신에 소담하게 담긴 과일이며 요화, 강정, 먹음직한 떡들을 펼쳐둔 것들은 앞에 오도록 당겼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약과 하나를 골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니 고소하고 달다. 

   부유하는 수련에 대한 때 지난 감상을 그만둔 이환 역시 자리로 돌아왔다. 물감이 담긴 물그릇에 닿을 듯 말 듯, 화유가 수련 한 송이를 그려놓은 종이 끝이 젖을 것만 같아 안전한 곳으로 두었다. 그림의 주인은 그것을 보고도 별 말이 없었다. 내 수련은 오늘 중에 꼭 완성할 터이니 걱정 말거라. 그리 말하며 분홍색 요화를 조심히 집어드는 다섯 손가락 중에, 두 개 정도가 겨우 여물었을만큼 어린 소년이었지만 신관은 신관이었다. 본인은 신관이 아닌 생도라고 주장하나 화유가 그 차이를 세심히 고려해 줄 인물은 아니었다. 글쎄다,


   “너 때문에 지금까지 불쌍한 종이가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는 아느냐?”


   자그마치 일곱 장이다. 일곱 장. 빈정거리며 유과를 입에 넣었다. 대번에 소년의 어깨가 축 처진다. 이게 말만 연꽃잎을 그린다 하면 연꽃잎인 줄 알아. 생긴 것이 영 댓잎인데. 


   “그래도 이번 것은 그나마 봐 줄 만 하구나. 그것 하나는 다행이다.”


   색을 잘 입혀 봐. 봐 줄 테니까. 안으로 들수록 붉은 입술의 한 끄트머리가 말을 마치고 얄궂게 올라간다. 하얀 검지로 가리킨 신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기 쉽기는. 밖으로 나와도 별 수 없는 문장을 삼키며 강정을 골랐다. 궁 안에서 가져온 것이라 그런지 뒷맛이 깔끔하였다. 오늘은 그림을 그리러 이 앞에 간다 하였더니 들놀이에는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며 신관이 아침부터 챙겨온 음식들이었다. 들놀이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러 가는 것이라 첨언하여도 영 듣지를 않았다. 작은 한숨을 폭 자아낸 화유는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신관 생도와 눈이 마주쳤다. 무어냐. 할 말이 있어? 정작 나이는 그의 또래일지언정 꽤나 어려보이는 신관은 당과를 열심히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


   그 때 마침, 화유의 콧잔등에 물이 떨어졌다. 아. 여우비다. 어딘가 먼 하늘에서 비구름이 머무는 듯 하였다. 자연히 손을 들어 가늠했다. 하나, 둘. 제법 빗방울이 무거웠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파랗다. 보기 드문 광경에 하늘을 우러른 채로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자 머리에 무엇인가가 급히 얹어진다. 무심결에 받아든 그것은 이환이 화구를 넣어 말고 다니던 가죽 보였다. 야, 하고 멈춰 세우기도 전에 제 그림은 어디 두고 시범을 보이느라 그려놓은 화유의 한 장 뿐인 그림을 달랑 챙겨들어 혼자서 들을 달려 나갔다. 젖을세라 가슴에 붙이던데, 저러다 신관복에 물이 들면 어찌하려는 겐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느라 뒤늦게 일어난 화유가 이환의 가죽 보를 머리에 이고 들을 건넜다. 가는 길에 붓 몇 개가 굴러 떨어져 잊지 않고 주웠다.





   “…… 거 봐라.”


   쏴아아. 분무 같았던 비는 금세 비구름이 떼로 몰려 굵은 소낙비가 되었다. 잎이 우거진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선 화유의 흰 뺨을 타고 빗방울이 물길을 만들어내며 굴렀다. 그나마 보를 쓰고 와 머리와 어깨는 덜 젖은 모양이었다. 반면에 물에 빠진 꼴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한 이환이 축축해진 그림을 두고 시무룩해진다. 곳곳의 색이 번져 흉했다. 


   “그냥 두나 이렇게 들고 오나 같잖으냐. 그럴 거였으면 네 그림이나 챙기지 그랬어.”
   “…… …….”


   간만에 볼 만한 그림이 나오는가 하였거늘. 그는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그림 선생의 그림이 망가진 것이 퍽 속이 상한 듯 했다. 함께 화유의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젖은 종이를 못내 버리지 못하고 쥐고 있는 것이다. 젖은 종이는 문 앞에서 화유에게 기어코 빼앗겼다. 그러고도 우물쭈물 거리는 신관 생도 소년을 향해 화유 말하기를, 시끄럽다. 들어 와. 하고 단호히 싹을 잘랐다. 

   이환은 화유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늘 정갈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이곳에서 가만히 물감을 개고 있자면 주변에서 새 울음이 들리고는 했다. 연적 안에서 찰랑이는 맑은 물도 세세히 느낄 수 있었다. 문살의 모양을 따라 햇빛이 엷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날이 흔했다. 오늘은 갑작스레 이리 날이 흐리게 되어 볼 수 없었지만. 빗물에 푹 가라앉은 옷이 무거워 걸을 때마다 둔중함이 느껴졌다. 제가 자초한 것이라 하나 이 감각이 약간은 불쾌하기도 하였다.

   화유는 겉옷을 벗어 주름 없이 바닥에 잘 펴두고 화로에 불을 올렸다. 너도 겉옷 정도는 벗지 그래. 그 꼴로 돌아가면 최소한 칭찬은 못 받을 걸. 계절이, 수련이 못에 필 여름인지라 화로를 마지막으로 쓴 지는 꽤 되었다. 불이 잘 붙지 않아 몇 번을 더 뒤적였다. 무릎걸음으로 다가 온 신관 생도가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손끝으로 화로 주변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세필 붓으로나 쓸 법한 작은 글씨였다.


   “뭐 해?”


   쉽게 볼 수는 없는 광경에 화유는 물었다. 손끝이 획을 긋는 대로 밝은 빛이 돌았다. 손끝이 조각칼이나 붓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기에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이환은 진언의 마지막 획을 긋고 물러났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가까이에서 씩 웃는다. 화유는 미간을 좁혔다. 이놈의 제자가 무슨 속셈인지 알지 못하겠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투둑. 툭. 투둑. 하고 둔탁한 음이 나며 불꽃이 시시각각으로 색을 바꾸어 형형히 터지고, 제자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금시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아니, 꼭 그게 아니더라도 저 악령처럼 발광하는 화톳불을 보면 누구라도 그리 알테지. 그러니 일단 쥐어박고 보았다. 불은 곧 천장에 닿을 것 같이 커졌다. 아무래도 그것을 시작으로 지금 당장 집 전체를 홀랑 태워먹을 기세였다. 야! 이 멍청아! 어떻게 할 거야! 화유의 노호에 응답하듯 황천에서 올라온 불똥 하나가 홀연히 치솟았다. 그리고 그것을 토악질마냥 뱉어낸 불은 거짓말처럼 잿더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그라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하필이면 불똥이 화유의 겉옷 위로 정확히 낙하했던 것이다.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말리기 위해 바닥에 널어둔 옷에 엄지손톱만 한 구멍이 났다. 


   “…… …….”
   “…… …….”


   이환도, 화유도 말이 없었다. 


   퍽. 이윽고 집 밖으로 누군가의 등, 혹은 어깨가 얻어터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 * *






   이환은 맑은 날, 머리에 문조 모란을 얹고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장터의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호객을 하는 것 외에 여념이 없는 상인들이 소년에게 손짓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정확한 목적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어디인지 잘 알지 못하여 몇 시진을 낭비하고 헤맸다. 행인을 붙잡고 물어도 전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궁 밖으로 좀처럼 나와 볼 일이 없는 신관 생도가 인간이 만들어 낸 장터의 복잡함을 미리 알고 있었을 리 없었다. 그릇을 파는 이가 셋, 옷감을 파는 이가 여섯, 먹거리를 파는 이가 열 둘, 노리개 파는 이가 넷.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 거리가 이 거리 같고, 저 거리가 저 거리 같으니 이환은 곧장 직진을 택했다. 괜히 이리 길을 들었다 저리 길을 들었다 하다가는 똑같은 곳을 맴돌 것 같았다.

   가는 길에 우연찮게 화구방이 있어 연적과 작은 그릇을 몇 개 더 샀다. 누이가 알면 한 소리를 들을 테지만, 이환이 수를 물러주지 않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래서 신을 잔뜩 늘어놓고 손을 맞이하는 상인 앞에 섰을 때는 이미 두 손에 보가 하나씩 들려 있는 상태였다. 이환은 새 가죽 냄새가 나는 신 앞에서 몸을 낮추어 살폈다. 그러고 보니 신을 사 본 적이 없다. 신관 생도들의 복식은 전적으로 궁과 본당에서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복을 가질 수는 있지만, 딱히 입을 일도 없었다. 어떤 것이 어디에 신는 신인지도 잘 몰랐다. 뒷머리를 긁적이다 상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보게. 어느 신이 가장 괜찮은가?”


   만일 이환이 머리가 조금만 더 컸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어리숙하고 모자란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상인은 제 코끝을 찡긋거리며 일단은 어디 봅시다, 하였다.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신이라면 이런 종류이지요. 자색으로 물들인 앞부리가 솟은 신이었다. 그런가. 기껏 질문에 답하여 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시큰둥하였다. 상인은 속으로 이 작은 신관이 돈과 신을 바꾸어 갈 것인지를 바쁘게 쟀다. 결론은 얼마 못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뭔가를 사들고 있기는 하나 신에 대해 큰 욕심도 없어 보이고, 잘 알지도 못해 보였다. 더구나 신관이란 자들은 앞선 여러 이유로 상인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객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시오. 오시오. 자자, 보러 오시오. 상인은 이환을 등지고 다른 이들에게 손짓했다. 어깨에서 내려온 작은 문조가 땅을 종종거리며 피이- 울었다.

   이환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고민에 빠졌다. 어떤 것이 제일 잘 어울리려나. 또는, 어떤 것을 사 가야 화유에게 혼이 나지 않으려나. 저 보기에 온통 화유가 입으면 어울릴 것들 뿐이다. 사흘 전 화유의 옷 하나를 못 쓰게 만들어 둔 이후로 줄곧 골몰하던 생각이었다. 옆길에 태사문을 새긴 신 한 짝을 들어 올렸다가 도로 놓았다. 본래 망가진 것이 옷이기도 하고, 그래서 옷을 한 벌 사 줄 예정이었지만 지난 이틀 동안 평생 보았던 옷보다 더 많은 옷과 대면한 뒤로 얌전히 포기하였다. 

   신은 좀 덜 하겠지 싶어 방향을 선회한 이환은 이것도 어렵네, 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무엇이 더 낫고 덜한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다 고와보이거늘. 하긴, 화유는 곱다는 말을 싫어하였다. 제가 무얼 모르고 화유에게 표현 그대로 네 눈이 곱다하였을 때 그가 입을 다물고 짓던 표정이 여태 선연했다. 그는 화를 냈다. 사무치게 소리를 지르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이환은 흐음. 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운 분께는 고운 것이 어울리는 법이지요.”


   보다 못한 상인이 넌지시 말했다. 슬슬 돌려보내지 않으면 금일 장사에 영원히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이런 신은 어떻습니까? 신코와 뒤축에 운문이 풍성히 그려진 신을 한 켤레 들어 건넸다. 코앞에 내밀어진 신을 응시하던 이환이 순간 어, 하고 반응을 보였다.


   “화유는 곱지 않다.”


   어색할 만큼 딱딱한 어조였다. 예? 상인이 무심코 되묻자 이환도 덩달아 미간을 구겼다. 


   “여기서 제일 곱고 편한 것으로 주게.”


   결국 소년의 손에는 새 신을 싼 보자기 하나가 더 들렸다.




* * *






   화유는 제 집 안마당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신관 생도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대낮부터 뭐야. 어디서 불이 나기라도 했든. 그러나 소년은 난데없이 다짜고짜 제 그림 선생의 손을 잡아 끌어다 대청에 앉혔다. 오죽하면 이런 적이 처음이기에 정말 무슨 일이 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붉은 머리가 폭삭 내려갔다. 화유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환이 잘 매듭지은 보자기를 풀어 헤치고 신 한 켤레를 꺼내들었다. 감색 물이 든 비단신이었다. 화유의 손 옆에서 날개손질을 마친 문조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이환은 화유의 왼쪽 발이 신은 신을 조심히 벗겨내고 제가 가져온 신을 신겼다. 발목에 잠시 닿는 체온이 불을 쬐는 것처럼 따뜻하였다. 하여 그냥 제멋대로 굴도록 두었다. 고개를 조금 숙인 화유의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신은 화유의 발보다 살짝 컸다.

   뭐, 예상 못할 일도 아니었으나―


   “이런. 네가 더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을 수 있겠구나.”
   “… 인간은 여기서 더는 안 큽니다, 바보 신관아.”


   얼른 가서 바꿔 와. 나 참. 하도 급히 달려들기에 뭔가 하였다. 화유는 남은 비단신 하나로 이환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잰걸음으로 마당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흰 얼굴이 옅게 미소한다.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빈 집 앞에서 가지런히 놓인 한 켤레의 비단신을 바라보며, 화유가, 정말 떠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길잖은 시간인 한 달이 걸렸다. 

   이환은 더없이 상냥하게 웃고 있는 화유에게 그림 한 장을 받았다. 


   ―직접 그린 것입니다.


   무척 나긋한 음성이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받으세요. 멀리 떠나는 길에 마지막 선물입니다.


   아니,
   그것은 화유가 맞던가?


   ―…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이냐?

   ―아주 먼 곳으로 갑니다.


   아니었나?




* * *






   무엇을 그린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받은 그림은 한 번 펼쳐보지 않았다.

   화유는, 죽었다. 그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 * *






   이환은 땅에 떨어진 붉은 동백을 손에 넣었다. 나무가 털어낸 꽃은 갈빛이 잠식하여 볼품이 없었다. 생기가 넘치던 꽃잎이 늘어지고 자꾸만, 자꾸만 틈이 벌어지고 만다. 노란 술은 죽어서 가루가 되어 날렸으며 푸른 잎은 멀리서부터 시들었다. 마지막 남은 그 붉음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죽은 꽃잎은 이 정도의 바람에도 덧없이 흩어져 버린다. 손이 추락하매 동백도 추락을 면치 못하였다. 하강은 무엇보다 조용히 이루어졌다. 내리깐 시선이 동백에게 못 박힌다. 그것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나 죽은 꽃은 그저 죽은 꽃에 불과했다. 

   화유란 이름에는 화할 화和에 부드러울 유柔 자를 빌려 쓴다고 하였다. 어쩌다 꽃 화華를 쓰는 것이 아니냐 물었더니 세상에 그런 괴이한 이름이 어디 있느냐며 핀잔을 들었다. 그것을 문득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애당초 제가 화유에 대해 저 혼자 가늠하여 무엇을 맞힌 적이 거의 없었다. 화유는 언제나 제가 상상하던 궤도 너머에 있었고, 그래서 잘 닿지 않았다. 손이 잘 닿지 않으니 눈을 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붓으로 그려넣은 듯한 쪽빛이 가장 먼저 보였다. 간혹 짓는 표정에 눈 아래의 점이 한 번 더 잡아끌었다. 화유는 빤한 시선에 가끔씩 너 무어 할 말이 있느냐 물었고, 저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매번 그냥 네가 거기 있지 않았느냐,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그곳에 있었기에, 내 너를 보고 있다. 

   어둠은 쉽게 찾아왔다. 어쩌면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화유가 굳은 얼굴로 하루 종일 대답이 없었을 때도 있었고, 붓을 잡으려다 선 하나를 긋지 못하고 놓을 때가 있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엇인가 그에게 해주었더라도 제 오만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환 또한 백지를 들고 와서 백지를 들고 물러가는 일이 얼마 간 잦았다. 그 후, 화유는 떠났다. 언질은 없었다. 온기가 식은 방이 남아있었다. 

   이환은 대청에 앉아 무작정 기다렸다. 어디 멀리 나간 것이 틀림없는 게로구나.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툰 손으로 어수선한 방을 정돈해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째 되는 날에 비단신을 안으로 들였다. 닷새, 이레, 열흘. 붓이 잡히지 않았다. 물어 볼 사람이 없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보름. 스무하루. 부러 이틀을 찾아가지 않았으나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스무닷새. 그믐. 그믐날에는 비가 내렸다. 화유가 찾아왔다. 화유가 아닌, 화유가.

   그는 마지막에 문조 모란을 그려 이환에게 건네주었다. 그림을 펴보지는 않았지만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제가 화유에게 불평했던 적이 있었다. 모란은 근본이 새여서, 마구 움직여 그리기 힘들다고. 화유는 불평이 많다며 시범을 보일 터이니 기다리라 하였다. 그 날 미처 다 완성하지 못한 것을 분명 건네주었을 것이다. 화유가 이환에게 보여주겠다 약속을 하고 보여주지 않은 것은 그 뿐이었으니. 모란이 수명을 다하여 본당 뒷산 땅에 묻어주던 때에 화유가 건넨 그림 함께 묻어주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흙에 조각조각 잘린 추억도 함께 묻혔다. 혹여 넘칠까 염려하였는데, 그 정도 크기의 땅이면 충분했다. 허무하기도 하였다. 전부 그러모은 것이 이렇게 볼품없이 작았던가. 이리도.

   이환은 밤의 화원을 거닐었다. 본당에서도, 서녘의 별궁에서도 떨어진 곳이라 한산하다 못해 적막하였다. 겨울에만 피는 꽃나무들이 양 옆으로 서서 굽은 길을 만들어냈다. 땅과 못이 얼지 않도록 곳곳에 온등이 매달려 있었다. 온등을 따라 걸었다. 화원의 중심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과연. 도착한 화원의 심장부에는 노란 납매가 피어 있었다. 이환은 꽃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섯 개 모두 굳게 여문 손끝이 여린 꽃잎에 닿았다. 무엇인가 닿았다는 감각만 설피 존재했다. 손을 금방 떼어 냈다. 그 꽃망울 틔운 여린 것이 상할까 싶어서.


   “오늘은 꽃구경인가요?”


   이환이 몸을 돌렸다. 열 보 떨어진 곳에 례분이 서 있었다.


   “매번 그런 표정이네요.”


   희디 흰 검지가 아시라의 신관을 가리키고 나붓하게 웃는다. 말이 없던 이환은 기시감을 느끼고 얼굴이 굳었다. 저 봐. 또 저런 표정이지요. 당신은 제가 싫은가요, 신관님? 아니면― 례분이 문장의 끝을 길게 늘였다. 한 발, 다가왔으나 이환은 움직일 수 없었다. 꼭 제가 밟고 선 땅이 발목을 단단히 잡아챈 것 같았다. 두 발, 세 발. 화유가 아닌 례분이 가까워 올수록 이질적인 것이 목을 죄인다. 숨이 턱 막혔다.


   “저 때문에 무엇이 견디기 어려운가요?”
   “…… 아니다.”

   “허면요?”


   드디어 듣는 상대의 목소리에 례분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긴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며 물었다. 눈길이 잠깐 머리끈에 닿았다. 검은 비단끈. 석류석과 호박, 녹주옥 조각이 알알이 박힌 것. 제가 마음대로 쥐여 준 것이다. 하여간 무르기가 그지없다. 저런 것 그냥 버리고 아랑이든 궁인이든 아랫사람을 시켜 새로 하나 사왔으면 되었음을. 그깟 머리끈이 무어란 말인가. 저리 모든 것에 일일이 얽매이니 도망치는 와중에도 제 스스로 목을 졸라매는 꼴이다. 례분은 그런 것이 싫었다. 저 보아라. 참으로 미련하지 않느냐. 입가에 만연히 걸어두었던 웃음을 찰나에 거두었다. 


   “이환.”


   신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저도 모르게 반 보를 물러났을 때, 제가 휘말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검집 위에 손이 간다. 그 다부진 손등에 타인의 창백한 손이 얹혔다. 단지 얹혔을 따름이나 시간이 오롯하게 정지하였다. 고요한 쪽빛 한 쌍이 가까웠다. 차게 식은 손으로 이환의 뒷목을 달래듯 쓸어내렸다. 시선이 속절없이 떨어지고, 긴 속눈썹이 쓸쓸한 그늘을 드리운다. 례분의 이마가 이환의 어깨에 툭, 닿았다. 제게서 떼어내기 위해 례분의 팔뚝을 붙잡았을 이환의 손이 돌연 멈추었다. 


   “거 봐라.”

   ―거 봐라.


   이환의 두 눈이 혼란으로 흔들렸다.


   “그냥 두나 이렇게 오나 같잖으냐.”

   ―그냥 두나 이렇게 들고 오나 같잖으냐. 그럴 거였으면 네 그림이나 챙기지 그랬어.


   손가락이 금을 연주하듯 간질이는 뒷덜미를 타고 온 한기가 짙어진다. 얼음장 같았다. 


   “…… 여전히 알기 쉽구나.”


   례분의 얼굴이 슬쩍 들린다. 웃음기가 어려 있던 우미한 입술이 벌어지고, 목선에 이를 세웠다. 삶을 취하고자 하는 이는 망설임 없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뒤늦게 이환이 큭, 하고 신음한다. 입 안으로 피가 엉겨왔다. 한 번에 구미를 당기는 맛은 아니었다. 해갈에 매달리는 입술과 혀에 달고 은은한 향이 스몄다. 감겨있던 눈이 열리고 쪽빛이 얼마간 머물렀다. 례분은 이환이 저를 밀쳐낼 때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피로 물든 입술을 먼저 조심스레 떼어냈다. 허나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례분의 팔뚝을 꽉 틀어쥐는데 그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대신에,


   “야!!”


   례분은 등 전체에 예상치 못한 커다란 통증을 느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환의 손이 반사적으로 휘청이는 례분을 붙잡았다. 례분은 그것을 밀어냈다.


   “너. 다음번엔 목을 잘라 줄 거야.”


   여한은 검끝으로 례분을 가리켰다. 아마 멀리서부터 보고 달려온 듯 했다. 당주의 안위를 생각해 의도적으로 검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검이 들리지 않은 다른 손에는 백무를 상징하는 흰 불꽃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도련니이이임. 그 뒤를 따라 달려온 발라 하나가 외쳤다. 닥쳐. 여한이 여지없이 싸늘하게 답했다. 발라는 입을 비죽이며 그대로 멈춘다. 례분은 분노 가득한 여한을 향해 마지막까지 방긋 웃어주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너.”


   여한은 아직까지 얼빠진 얼굴을 한 이환의 얼굴을 힘껏 후려갈겼다. 


   “네 몸은 너 하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거 자꾸 잊어버리지.”
   “…… …….”


   부어오른 쪽에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상대가 비틀거린다.


   “계속 멍청한 짓 하면 다른 놈이 죽이기 전에 내 손에 뒈질 줄 알아라.”
   “…… …….”


   알았어? 저를 쳐다보는 이의 목에서 흐르는 핏물이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지극히 차분한 어조로 쏘아붙인 여한은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화원을 빠져나갔다. 현운이 그 뒤를 따랐다. 도련님. 도련님. 손을. 작은 주먹이 역시나 벌겋다. 현운은 사족을 더 붙이지 않고 천으로 여한의 손을 싸맸다. 여한은 다만 가자, 하고 현운을 채근하였다. 동백에 둘러싸인 납매나무 아래 멀거니 서 있는 이환에게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었다.


   “…… …….”


   이환은 뜨끈한 열이 몰려오는 목에 손을 대었다. 손바닥에 적잖은 피가 묻어나왔다. 

   침묵이 물러앉았다.





   뺨을 타고 기어오르는 환각을 쳐내려 눈이 질끈 감겼다.

   향 없는 동백이 그 발치에 제 꽃을 하나 더 떨구었다.

Posted by IllillIll
,

[이환] 암월暗月

커뮤로그 2018. 1. 28. 21:11

180120 암월暗月 (with. 사사)





   씁쓰름한 향내가 섞인 공기가 무겁다. 회정당의 천장은 높았다. 일족의 회의는 젊은 당주가 상을 내리침과 동시에 중단되었다. 당주를 호위하는 자인 경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책더미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건조하게 정면을 응시하였다. 당주의 등은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두운 붉은 색 머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오르내리는 어깨를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뿌득, 윤이 도는 상이 긁혔다.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환이 이리 직접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그 역시 처음 보았다. 밝은 눈동자에 깊숙이 박힌 동공이 두드러진다. 난감한 얼굴을 돌린 일족의 원로 중 하나가 다른 자와 눈길을 교환했다. 곧 제일 나이가 많은 원로, 문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뒤를 앞다투어 맞장구친다.


   “… 별 일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주. 당주께서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저희도 모르지 않으나―” 
   “이 주위에서 아직까지 발라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들어온 적이 없지 않습니까.”
   “대전쟁 후에 발라를 본 자는 아무도―”


   이환은 냉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 발라가 전부 죽었습니까. 이런. 제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중요한 일이 벌어졌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멀쩡한 신관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어린 생도가 실종된 것입니다. 헌데 어찌 이렇게 다들 태평하십니까? 모르시지 않는다더니, 혹 생각이 아주 없으신 것은 아닙니까?”


   누군가 침음을 삼켰다.


   “말씀을 삼가세요.”
   “어허. 어찌 그런 말씀을 …….”
   “저희도 찾아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당의 신관들을 급히 풀어 반나절 내내 수색을 감독하였단 말입니다.”


   이후로 말이 없던 문흥은 이제 막 등장한 문장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저런 눈치라고는 없는 자 같으니. 아니나다를까 즉시 당주의 노호가 떨어졌다.


   “생도 하나가 숲에서 낙오된 지 무려 사흘이 넘으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오늘까지 제겐 물론이고 다른 어르신들에게도 여태 명확한 보고가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금 더 숨기실 수 있었다면 영영 묻으실 작정이셨습니까!!”

   “…… …….”
   “…… …….”


   결국 문흥이 사태를 중재하고자 나섰다.


   “… 문책은 생도를 찾고 나서 하여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 당주.”


   당주의 차가운 분노가 문흥에게 향했다. 여태 마주한 적 없는 묵직한 위압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찰나에 머리를 스치는 흰, 불꽃의 환영. 그 재능만큼은 당주로서 적격이로구나. 허나. 달리 감탄할 새가 없었으므로 문흥의 마른 입술이 미세히 떨렸다. 그러나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늦었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말씀이 얼마나 위선적으로 들리는 지 알고 계시지요?”


   문흥이 고개를 숙였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았다. 당주는 고개를 돌리며 코끝으로 웃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환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자리를 떴다. 붉은 옷자락이 사납게 펄럭였다. 당황한 몇몇 원로들이 당주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으나 문흥은 점잖은 말로 그들을 도로 앉혔다. 앉으시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왜 모르는가. 당주가 완전히 멀어지자 원로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불필요한 불평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녁달이 먼 하늘에서 희게만 보였다.



* * *





   이환은 그 없어졌다는 신관 생도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었다. 여아의 이름은 윤도라 하였는데, 부모가 대전쟁에서 죽어 언니나 오라비, 동생도 없이 혼자가 되었다. 진언을 새기는 데 재능이 있어 촉망을 받는 인재였다. 하루는 수업에 가지 않고 숨어 울고 있는 것을 우연찮게 찾아내어 몇 마디를 들어주었다. 많이 그립고 외로운 듯 했다. 얼마간 이것저것 손에 주전부리를 내주기도 하고, 실없는 수다를 피우기도 하였다. 착한 아이였다.

   내실에 들어가 곧장 검을 챙겨들었다. 경이 나직하게 물었다. 제가 어느 쪽을 살피길 원하십니까. 경은, 그리 긴 단서가 없이도 이리 이환의 생각을 짚어내고는 했다. 이환은 쓰게 웃으며 가까운 마을들을 하나씩 돌아보라 하였다. 알겠습니다. 고마워, 경아. 둘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갔다. 저는 반대편 숲을 직접 뒤져볼 참이었다. 경이 목례를 하고 먼저 물러났다. 머지않아 이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보름이라 밤이 밝은 것은 다행이었다.

   경을 대신하여 소쩍새 한 마리가 뒤를 따랐다. 먼 과거의 문조를 떠올리고 모란이라 이름 붙인 어린 소쩍새는 그래도 누이가 기르던 소요를 언젠가는 돌보아볼까 하여 얼마 전 새로 들인 새였다. 친근히 여기는 것은 아직껏 어색했으므로 범연하게 굴만도 하건만, 모란은 이환에게 꽤 살갑게 굴었다. 곱지 못한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살금 깨물다 날아올라 밤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숲 전역에 깔린 흙이 보드랍고 푹신하였다. 발 딛을 때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환은 숲을 가로질렀다. 신관생도들이 야외에서 실습을 했다는 곳부터 추적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멀지 않아. 찌륵찌륵, 밤벌레가 울었다. 반딧불이가 가는 길에 두셋씩 종종 깜박인다. 마치 어딘가로 안내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느덧 술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숲은 진녹색으로 거칠게 붓질한 듯이 칠해져 있었다.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반딧불을 따라 도착한 물가를 둘러싼 나무들은 저마다 뿌리를 수면 아래로 드리운 모습이었다. 이윽고 주위를 거닐다 나무껍질이 인위적으로 벗겨진 흔적을 보았다. 생도 중 하나가 만들었을 엉성한 결계가 파괴되어 흙이 푹 패인 자국도 발견할 수 있었다. 몸을 낮추고 땅을 더듬던 이환이 몸을 일으켰다. 모란이 돌아오면 무엇인가 소식을 전해줄 것이다. 별 일 없어야 할텐데. 걱정이 가득했다. 


   “…… ……?”


   순간, 이환은 어떤 소리를 감지하고 몸을 돌렸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향하였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유달리 선명하게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어둡고, 메마른, 빠르게 소실된, 혹은 아주 깊은. 죽음의 기운이다. 신족의 보법은 인간과 달라서 그 폭과 움직임이 기묘하였다. 백색의 잔영이 밀도 높게 밀려들어오는 수해樹海를 거슬러 올랐다. 조금만, 더. 빨리. 말초가 바스라지는 감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미없는 생각이었다. 고개를 가로저어 흩었다.

   아이라면 구할 것이고, 

   발라라면 죽인다.

   이환은 발뒤꿈치로 땅을 한 번 짓이긴 뒤 시위에 살을 걸었다. 인영이 둘이다. 예리한 본능과 판단이 동시에 빨랐다. 응축된 신성이 담긴 살이 대기를 찢고 텅 빈 공터를 갈랐다. 누군가를 정확히 맞히기 위해 쏜 것은 아니었으나 상대의 진영과 대치를 흐트러놓기에는 충분했다. 다른 인영에 비해 작은 인영이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이환은 그 머리가 땅에 부딪히기 전에 부드러이 안아들었다. 갈색의 단발. 어린 아이였다. 실종된 신관생도. 당주는 가장 최소한의 안도감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엷게 미소하였다. 그리고 턱께에 겨누어지는 칼끝. 시린 달빛이 사늘한 칼날 위에 얹혀있었다. 이환이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달을 등지고 있었다. 


   “…… …….”


   그는 발라였다. 끝없이 침참하는 한쌍의 눈동자가 저를 명백히 향하였으나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얼굴에 깊고 큰 흉을 진 발라는 밤하늘의 달을 닮았다. 그러나 달이 저리 검으면 으레 암월暗月이라 한다. 선득한 고요는 발라의 양 어깨에 앉아 달그림자로 드리웠다. 다만 둘 중에 한 편이 이어지지 못하고 공허하였다. 검을 쥐고 있는 마디진 손 위로, 고급스러운 비단을 소재로 한 남색의 옷소매가 권태롭게 늘어졌다. 소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자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쿨럭. 그 때 이환의 품에 안긴 아이가 별안간 기침을 토하였다. 보아 부상이 심하였다. 이 부상은, 저 발라가 만든 것인가. 도자기 가면을 씌운 듯 했던 당주의 얼굴이 참 쉽게도 흐트러진다. 섬세한 분노와 탄식으로.

   허나 이환은 고민하였다. 이 자를 칠 것인지, 아니면 아이를 데리고 곧장 돌아갈 것인지. 아이를 품에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른도 아니고 이만한 부상을 입은 아이를 데리고 섣불리 이동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아이의 숨이 가쁘다. 암월과 같은 발라와 이환 사이에 등줄기를 거미처럼 기어오르는 긴장감이 흘렀다. 기울어진 균형이 위태롭다. 

   당주는 몸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일으켰다. 날카로운 검끝은 미동조차 없었다. 숨을 죽인 채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스락. 발끝이 움직이며 낙엽이 부스러졌다. 여전히 적막한 숲에서, 오래된 발라와 아시라의 당주는 서로의 간극을 한동안 유지하였다. 왜곡되었을 것이 분명한 기시감마저 느껴질 무렵에 이환이 아이를 고쳐안고 반 보 물러났다. 반 보, 다시 반 보. 일 보. 이 보. 무명의 발라는 정한 눈으로 저를 꿰뚫고 있을 뿐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환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뭐지?

   발라의 검날에 비치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이 마치 핏자국 같았다. 그것에 잠깐 시선이 고정된다. 발밑으로 뻗은 암월의 그림자가 갈래갈래 찢어져 발목을 잡아챔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야래향이 물씬 흐드러진다. 이환은 얼굴을 굳히며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발라는, 느릿하게,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명치 부근을 이질적인 감각이 스쳤다. 입술을 감아물었다. 전투 직전의 긴장과는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다른, 그런― 



   왜?




   의도가 없다면야. 찬물을 얻어맞은 것마냥 사고를 바로잡았다. 이환은 더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이렇게 된 이상 부상당한 아이가 먼저였다. 결정 직후의 이동은 신속하였다. 품 속의 아이가 당주님, 하고 제 옷깃을 움켰다. 조금만 참아라, 하고 달래며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깊은 숲속에서 느껴지던 모든 인기척이 일순에 분멸되었다.



* * *





   “… 하여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윤도는 상처투성이인 손을 꼬물거리며 이환의 눈치를 보았다. 이환은 여아를 크게 나무랄 생각이 없었으므로 허공에 작게 한숨을 쉬고 어쨌든 다행이다, 하였다. 햇살이 눈부셨다. 젖은 흙과 썩은 나무껍질 냄새가 나던 그때와는 다르게, 풋풋한 단내가 코끝을 간질였다. 에취. 이환은 코를 훌쩍이고 신관 생도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짐짓 엄한 얼굴을 한다. 여아가 눈을 굴렸다.


   “다음부터는 피하는 것이 먼저이니라.”

   “예에…….”
   “아직은, 말이다.”


   커다란 손이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도는 알겠습니다, 하고 시무룩하게 답하였다. 자신의 눈앞에 발라가 보이자 무작정 달려든 것이 패착이었다. 우습게도, 순수하게 어미와 아비의 복수를 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단순히, 아득한 공포와 혐오가 뒤섞여 검을 빼들었다. 일합은 손쉽게 막혔다. 다음 합도 다를 바 없었다. 발라는 강하였다. 발라 내에서도 알아주는 강자였음을 어린 생도가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그 발라는, 어린 생도의 일방적인 공격을 흘리고 방어하는 데서 대처를 마쳤던 것이다. 

   이환은 생도의 상처를 눈여겨 보았다. 검격. 흔적. 위로, 다시 긋고, 막고. 역시나 얕다. 어째서. 발라라는 존재들이 이제와서 자비를 베풀고 비살상을 추구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윤도가 제 눈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것도 잊고 골몰하였다. 상대가 워낙 어린아이라 그런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제일 그럴듯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연이어 떠오르는, 그자의 움직이지 않는 검끝과 비틀린 미소가 있었다. 이환은 청차가 일렁이는 잔을 뚫어져라 보며 미간을 슬쩍 좁혔다. 

   하아. 왠지 머리가 아프구나. 당주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 저어, 그 발라의 이름을 들었사옵니다.”
   “이름을?”


   묻는다 하여 이름까지 가르쳐주었단말인가. 묘한 일이로다.



   “사사라 하였습니다.”


   사사.

   둥그렇게 뜬 호박색 눈이 서서히 껌벅였다.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고, 사사라. 하고 나직한 음색으로 되새겼다. 공중에 떴던 그 이름이 햇살에 덧없이 흩어졌다. 음. 짧지 않은 음성을 굴리는동안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제가 기억하는 그 어두운 달과, 평선 없는 밤하늘, 수를 세기에 벅찬 별의 결정들과는 확연히 다른, 따뜻한 양지가 대청 아래에 가득했다.


   “그래. 내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 만나게 되면 꼭 혼내주마.”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이환은, 왠지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퍽 잘못된 생각이었다.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환] 희래希來, 봄.  (0) 2018.01.28
[이환] 화유和柔  (0) 2018.01.28
[이환] 여한과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의 행방불명  (0) 2018.01.28
[이환] 경燛.  (0) 2018.01.28
[이환] 홍, 진유.  (0) 2018.01.28
Posted by IllillIll
,

180115 여한과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의 행방불명 (with. 여한)



 

 

.

 

 

   훈색의 머리카락이 짚을 덮은 지붕 위로 빠끔히 솟았다. 말린 꽃잎 빛깔 같기도 한 그것은 몸을 낮추자 어깨를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여한은 콧잔등을 한 번 짧게 찡그렸다. 작은 발이 지붕을 밟는다. 그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 고양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마우웅.

 

   지붕 위의 고양이는 굉장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제 밑을 지나는 우매한 인간들을 보며 비웃었다. 아니, 보통 고양이가 그러한 느낌이던가. 여한은 이제야 괜한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고양이는 몸을 활처럼 휘며 기지개를 켰다. 그것은 왠지 납작해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장면이었다. 여한은 확실히 고양이보단 새를 더 많이 봐 왔다. 아시라의 일족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것도 어린 일족이라면.

 

   “…… …….”

 

   여한은 고양이에게 숨을 죽이고 다가갔다.

 

   하지만 이 고양이는 확실히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때마침 자신에게 다가오던 불길한 마수의 존재여부를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오늘따라 재수가 좋은 고양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여한을 발견한 고양이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맞은 편 지붕으로 훌쩍 뛰었다. 씨이. 여한은 미간을 좁히며 저도 고양이를 따라 지붕을 건넜다. 분명 건너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이 어린 반인 반신의 능력은 그곳까지 닿지 못했다.

 

   여한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몸이 빠져들고 말았다. 벽을 급히 짚었음에도 미끄러진 몸이 딱 알맞게 들어갔다. 정말이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안성맞춤이었다. 당황한 여한이 다리를 휘저었다. 발끝이 간신히 땅에 닿는다. 움직일 수가 없다. 상당히 우습기 그지없는 상황에 부딪힌 게 틀림없었다. 팔꿈치가 떨어질 때 긁혔는지 홧홧하였다. 어떡하지. 이 굉장히 곤란한 지경에 대한 해답은 아무도 대신 해줄 이가 없었다. 눈 밑과 코가 한꺼번에 찡해지는 감각이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다행히 다음 순간, 자애로우신 천신께서 계획하신 바대로 즉시 타인과의 기적적인 만남이 성사되었다.

 

   “!”

 

   다만 그 자 역시 기괴한 자세로 벽과 벽의 사이에 수납된 상태였다.

 

   “여한이로구나! 나를 구하러 왔어!”

 

   아시라의 일족을 이끄는 당주는 반색했다. 여한은,

 

   “아니야, 이 바보야! 나도 끼었단 말이야! 보면 몰라?”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한, 그를 있는 힘껏 무시하기로 했다.

 

 

 

 

* * *

 

 

 

 

.

 

 

   사건의 발단은 이틀 전이었다.

 

   여느 때처럼 이환은 경과 함께 본당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마주치는 신관생도들과 아랑들의 손에는 먹을 것이 한손 가득 들렸다. 여한은 그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므로 지나치려 했다. 하필 이환의 호위인 경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지 않았다면. 사실 경에게는 하등 잘못이 없었다. 그저 어엿한 신관인 여한을 보고 목례를 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런 경을 발견한 이환이 부루퉁한 여한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네 오늘은 나와 함께 하겠느냐, 하고 물었다. 여한은 볼멘소리를 했다. 싫어. 단호하게 거절당한 당주의 어깨가 대번에 팔자로 축 처지기에 여한은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섰다.

 

   그래서 어딜 가나 했더니, 아랑들의 숙소로 향하는 듯 하였다. 아랑들은 당주를 발견하고 까르르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셔요. 경님도 오셨군요. 그리고제일 앞에 서 있던 아랑이 여한을 보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환이 밝은 얼굴로 여한을 소개해주었다. 여한이라 하는 신관이다. 그간 면만 익숙하였던 신관의 이름을 알게 된 기쁨에 아랑들이 박수를 쳐댔다. 여전히 입을 비죽대던 여한의 뺨이 조금은 발갛게 물들었다.

 

   “당주님, 당주님.”

 

   아랑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한창 들어주던 중에, 가장 어린 아랑이었던 남매가 이환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혹 부당한 일을 겪은 것이 아닌가 싶어 무슨 일이냐 묻는 이환의 얼굴이 자못 진지했다.

 

   “저희들이 돌보던 고양이가 사라졌습니다.”

 

   뭐야, 겨우 그런 거야.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여한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심드렁하게 하품을 하였다. 반면에 이환의 반응은 달랐다. 저런. 그거 큰일이로구나. 여한이 느끼기에 이 당주란 자는 쓸데없이 참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랑들의 일이나 생도들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일족의 어르신들의 복지에도 그만큼 신경을 쓰면 좋으련만 그쪽으로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시도 때도 없이 울화통을 돋우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가다간 아시라 일족의 노인복지 현황이 매우 형편없는 상태라는 게 민간인들에게까지 알려질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또한 일족의 특성으로 자리 잡을지도. 모범을 보여야 할 당주가 그 선두에 서 있으니 알 만 했다. 아마 일족 역사의 왜곡에 크게 기여하진 않을까. 빨리 이 지루한 일과를 끝내고 방에 돌아가고 싶었다.

 

   “내 찾아주마.”

 

   뭘 그렇게 자신 있게 약속하는 건데. 하마터면 그렇게 외치며 등을 내려칠 뻔 했다. 아차. 내 알 바 아니지.

 

   “머물던 곳을 떠난 고양이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걱정말거라. 저기 수색과 추리에 능한 탐정님이 계시거든.”

 

   라며 당주는 여한을 가리켰다.

 

   “! 고양이 탐정님!”

   “그래. 별호가 묘탐정이신 여한 신관님이시다.”

 

   정작 당사자는 금시초문이었다. 여한이 도끼눈을 뜨며 이환을 물밑에서 은밀히 공격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대화는 이어졌다. 고양이의 생김새와 그 특징과 이름을 물었다. 털이 잿빛인 고양이입니다.

 

   “이름은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氷龍帝君覇天地無皇波派琶擺라 하는데,”

 

   여한은 아주 잠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놀랍게도 청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정식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보통은 그리 부릅니다. 어린 아랑의 작명법에는 특유의 취향이 반영된 듯 했다. 정식 이름이란 것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랑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파파파파는 전부 다른 자를 씁니다. 여한은 온화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거 알게 뭐냐고. 더럽게 괴악하고 길다. 본당에서는 대체 뭘 가르치는 거야.

 

   “고양이가 없어진 것은 사흘 전입니다.”

   “어제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를 보았다 말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럼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가 잘 지내나 보지. 문장은 퉁명스레 끼어들었다. 이환은 고양이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 읊는 여한을 보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은, 며칠 전부터 수상한 자가 고양이를 잡아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더 걱정입니다. 아랑이 여한에게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따뜻했다. 부탁이에요, 신관님.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가 단지 자유와 평화를 찾아 떠난 것이라면 저희도 그를 붙잡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 아랑에게 둘러싸인 여한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으아아앙. 한 아랑이 울음을 터뜨린 것을 기점으로 몇몇 아랑이 따라 훌쩍이기 시작했다.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를 찾아주세요, 묘탐정님…….”

 

   여한은 결국,

 

   “! 찾아주면 되잖아!!”

 

   하고 덜컥 약속을 하고 말았다.

 

   결국, 그렇게 고양이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를 찾아 떠난 고달픈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

 

 

   올해로 기나긴 삶을 향유한 지도 5년을 넘긴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엊저녁부터 웬 인간 두 마리가 뒤를 밟고 있었다. 참으로 괘씸한지고. 이 무엄한 인간들에게 본좌가 직접 가르침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그는 미천한 인간의 말을 하지 못했다. 간극의 무저갱에서 먼저 헤어 나오는 데 성공한 인간이 무례하게도, 감히 인간 주제에 고양이를 가리켜 무어라 고함을 지르며 삿대질을 했다. 그나마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를 붙잡고 있는 영광을 누리는 중인 이 인간은 비교적 유순하였다. 인간의 얼굴은 잘 가늠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쪽이 더 나이가 많아보였다.

 

   “이제 빙롱인지 빙패인지 하는 거 잡았으니까 돌아가는 거지!”

   “그래. 아랑들이 기뻐하겠구나.”

 

   이환은 고양이를 들어보았다. 찌그러진 머리통이 꽤 귀엽게 생겼다. 활짝 웃는 얼굴은 고양이의 둥근 발에 즉시 응징 당하였다. 아야. 코끝에 빨간 생채기가 생겼다. 고소하다는 듯 여한이 히죽 입꼬리를 올린다.

 

   “여한이 네가 아니었으면 찾을 길이 없었을 게다.”

 

   그래. 다 내 덕이라구. 이환이 어깨를 으쓱이는 여한의 머리를 친근하게 헤집어놓았다. 그 보답으로 정강이가 걷어차였다. 사실 저 멍청이가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를 찾아 도성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동안 여한은 여유를 즐기며 당과를 집어먹고 있었다. 그 옆을 우연찮게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가 하나 더 들어갔던가가 지나쳤고,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아주 우악스럽고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졌으며그 바람에 작은 소동이 있었으나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었다.

 

문제는 너무 멀리와 버렸다는 것이다.

 

   “어쩌지.”

 

   이환은 여한을 돌아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곳에서 남쪽을 향해 본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 회정당에서 회의가 있을 텐데.”

   “어차피 한 번도 시간에 맞춰간 적 없잖아?”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저거라도 타고 가던가.”

 

   여한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수레를 가리켰다. 반쯤은 놀리기 위해서였다. 수레는 버려진 것이 틀림없었다. 저 비루먹은 나귀와 함께. 게다가 수레바퀴에 묻은 핏자국이 심상찮게 불길해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끔찍한 사연이 두루마리 하나쯤은 거뜬히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한 일족을 이끄는 당주에게 그런 사소한 요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푸히힉. 이환이 다가가자 나귀가 잇몸을 만개해 천하에 드러냈다. 여한은 나귀가 사람을 비웃을 수 있다는 것은 생전 처음 알았다. 아니. 저건 웃는 거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와중에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가 나귀의 콧구멍을 불시에 정확히 가격하였다. 나귀는 아마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이제 나귀는 침을 흘리고 있었다.

 

   “저기 있잖아, 아무래도 걷는 게 더 빠르

   “남행으로 가는 수레이니 남행거차가 좋겠구나.”

   “당주는 사람 말을 좀 듣지 그래.”

 

   어느 새 이름도 붙였다.

 

   “저 앞까지만 타면 되지 않겠느냐.”

 

   이환은 긴 내리막길의 끝을 가리켰다. 몇 백 보는 족히 걸어가야 할 거리였다. 여한은 무심결에 갈등에 빠졌다. 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 * *

 

 

 

 

.

 

 

   비거飛車.

 

   공중에서 사람이 타고 날아다닐 수 있는 수레를 일컫는다.

 

   여한은 사뿐히 수레에 걸터앉은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 지독한 자괴감의 굴레가 씌워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늘 운세는 대흉이었다. 그리고 그 흉사에는 당주란 작자가 상당수 기여하고 있었다. 감히 말하건대 여한의 인생에서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자였다. 여한은 이환이 남행거차라고 명명한 수레의 옆 부분을 붙잡고 벽력같이 일갈했다. 내가 죽으면, 그가 붙잡고 있던 수레의 옆 부분이 깔끔하게 분리되었으므로 말은 차마 맺어지지 못하고 잘렸다.

 

 

   흔들리는 수레너머로 식은땀이 흐르고,

   제 눈물도 흐르고,

 

   곧 잃어버릴 예정인 인생도 흘렀다.

 

 

   이환의 가자! 라는 신호에 내리막길을 득달같이 폭주하던 남행거차는 침 흘리는 나귀와 함께 허공에 떠올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었다. 여한은 삶의 임계점을 넘어 마침내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하였음을 깨닫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상냥하게 웃는 여운의 얼굴이 스쳤다. 이게 바로 주마등이라는 것인가. 이따위 곳에서 당주와 사이좋게 비명횡사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당과가 부족한 삶이었다.

 

 

 

 

* * *

 

 

 

 

.

 

 

   천신과 아시라께서 보우하사 천신만고 끝에 본당으로 돌아온 당주와 여한의 몰골은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늘진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마중을 나온 아랑들이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를 받아 안아들었다. 그 불쌍한 고양이는 기절한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묘탐정님! 야아, 얘들아.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가 돌아왔어! 피곤해서 잠들었나봐. 이환과 여한은 재잘대는 아랑들을 스쳐 지나갔다. 늘어지는 발걸음이었다.

 

 

   “…… …….”

   “…… …….”

 

   침묵이 흘렀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감각에 여한은 흐느적대며 걸음을 옮겼다.

 

   “괜찮으냐?”

 

   이환이 물었다.

 

 

   “…… …….”

 

   여한은 대답이 없었다.

 

   그 뒤로 차올랐던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나쁜 놈.

   이환은 나쁜 놈.

 

 

   여한에게, 가장 끔찍했던 기억을 꼽으라고 한다면 반드시 포함되던 날이었다.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환] 화유和柔  (0) 2018.01.28
[이환] 암월暗月  (0) 2018.01.28
[이환] 경燛.  (0) 2018.01.28
[이환] 홍, 진유.  (0) 2018.01.28
[이환] 조우遭遇.  (0) 2018.01.28
Posted by IllillIll
,

[이환] 경燛.

커뮤로그 2018. 1. 28. 20:46

180109 경燛.



 

 

   시위가 당겨진다. 줄이 팽팽하게 긴장하였다. 붉은 과녁을 응시하는 시선에는 어긋남이 없다. 희게 물든 투박한 손끝이 바람을 읽고 미세히 비틀린다. 희귀한 짐승의 뿔을 다듬고 옻칠을 한 활이 휘었다. 멀리서 북극매가 보란 듯 울었다. 매는 고공에서 정지비행을 하였다. 공기가 흐름을 멈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살이 그 간극을 찢고 쏘아졌다. 정 중앙. 일찍이 몇 번인가 더 패인 자리에 살이 꽂혔다. 그것을 확인한 이환이 각궁을 내렸다. 각궁이라 함은 본시 수렵용 활인지라 장궁의 그 길이와 위용을 갖추기 어려웠으나 얼마 전 유명 수렵꾼인 신도가 특별히 진상한 것이었다.

 

   “…… …….”

 

   활은 신관생도시절 다루던 것이다. 당시 검이 조금 더 생소하기도 하였고, 수련 중에 자꾸 사념이 들어 집중할 대상이 눈앞에 명확한 활이 이환에게 적격이었다. 옆에서 살을 새로 건넸다. 은 앞으로 살이 몇 개 남았는가를 속으로 섬긴 뒤, 당주가 다시 차분히 살을 걸고 시위를 당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환을 비추는 흑안은 늘 흔들림 없이 고요하였다. 마치 쏘아지기 직전의 촉과 같았다. 제가 도달할 단 하나의 지점만 기억하면 되었다. 그 사이, 재차 명중이다.

 

   “경아.”

 

   경은 부름에 시선을 들었다. 이환은 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검은 눈. 검은 머리. 단정함 일색. 그 얼굴에 엷은 의아함이 떠오를 무렵, 웃으며 새로 넘기려 손에 들고 있던 화살을 부드럽게 앗아들었다. 대신 제 몫을 마친 활이 상 위에 놓였다. 경은 이환이 한 묶음의 살과 촉을 분리하는 동안 부드러운 천으로 그 활을 닦았다. 시위를 분리하여 두니 당주는 제법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경아. 오늘은 이만 되었으니,

 

   “새 물감을 사러 가자꾸나.”

 

   경은 이환의 활을 고쳐들며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 * *

 

 

 

   경은 인간이다. 최초의 불을 지킬 결계를 놓고 내부에서 이런저런 지지부진한 말들이 오가던 그 때, 이홍과 이환의 아버지이자 초대당주 이운이 네 충직하고 영리하다 하여 오갈 데 없는 어린아이를 우연히 손수 거둔 것이 시초였다. 허나 처음부터 인연이 다 닿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당의 아랑이 되어 잡일을 돕고 글을 익혔다. 이후 아랑을 그만두고 출신에 의거 하급무관을 지원하여 평범한 스승을 두고는 성년이 될 때까지 성심을 다해 수련하였다. 초대당주가 일곱이레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것도 일이 벌어지고 한참 뒤에나 알았다.

 

   하급무관의 삶은 고되었다. 청출어람이었으나 주목하는 자는 드물었다. 자연히 대륙의 국경을 수비하던 최전선에 몰렸다. 돌연 큰 부상으로 불구가 될 뻔 한 적 여러 번, 빼어난 실력 탓에 구팽을 당한 적 여러 번,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제 정한 길을 꿋꿋하게 나아갔다.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든든하게 느낄 수 있는 전우 몇도 생겼으며 믿을 만한 상관도 두었다. 상관은 녹파의 관찰사였다. 승진 욕심이 많은 자였으나 그 정도 흠은 그리 흉이 되지 못할 정도로 용맹하고 기상이 호방하였다.

 

   당주가 실종되었다지 않아.

   그렇다지.

 

   경은 그러한 소문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어느 날, 상관이 그를 은밀히 불러 이르되 사람 하나를 찾도록 했다. 상관의 옆에는 숙람색 도포를 걸친 낯선 노인이 있었다. 그 밑으로 신관이 많이 신는 백혜가 보여 아시라의 일족 중 높은 이겠거니 짐작하였다. 얼굴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노인은 상관이 경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뒤로 물러 나오는데 어렴풋이 여라, 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경은 여명이 밝기도 전인 새벽부터 말 한필을 골라 다른 무관 몇과 조용히 관사를 빠져나왔다. 도착지는 멀지 않은 곳이었다. 녹파의 숲어귀에서 한 여자와 마주칠 수 있었다. 실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석류의 빛을 띤 긴 머리칼이 실바람을 타고 가늘었다. 살결은 몹시 희어서 흐른 유약처럼 보였다. 흑자색의 눈동자는 볕 아래에서 자색이나 다름없었다. 경은 한눈에 이 여자가 여라, 라고 하는 자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여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손가짐을 하며 뒷걸음질을 했다. 빼어난 미색이긴 하나 동시에 기묘한 인상이었다. 때문에 다른 무관들이 먼저 발검을 할 때까지 경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얼마 가지 못할 추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경과 일행들은 말을 타고 있었고 여자는 꽃신을 신었음에도 좀처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선득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눈앞으로 붉은 단풍이 이지러진다. 도와주세요. 숨이 턱까지 차올라 내뱉은 가냘픈 음색이었다. 살려주세요. 상관은 여자의 생사를 지정해주지 않았다. 다만 제대로 된 몸뚱이든 차게 식은 시신이든, 데려오라 하였다. 손속이 다정하지만은 않은 자들이었으니 이리 도망치다 잡힌다면 몰라도 팔 한 짝은 잘라낼 터였다. 경은 말없이 말을 재촉하였다. 상명이 있었다면, 이제 하복만이 있을 뿐이다.

 

 

 

   이운, 도와주세요!

 

   그 이름을 듣고 경의 동공이 크게 수축하였다. 덩달아 놀란 말이 급히 멈추는 바람에 그만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주먹만 한 돌들 위로 떨어져 온몸이 욱신거렸다. 멈칫할 여유는 없었기에 벌떡 일어나 검을 들고 뒤를 쫓았다. 그새 한참이나 멀어진 여인과 추격조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피할 길 없이 무리를 해야 했다. 해답을 논리적으로 따질 겨를이 없었다. 본능이, 저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며 머리통에 대고 벼락처럼 고함을 질렀다.

 

 

 

* * *

 

 

 

 

   이운이라는 이름, 그리고 신분을 감춘 일족의 노장, 당주의 부재, 추격.

 

   물론 그 때, 조각난 것들을 전부 명확하게 이어낸 상태는 아니었다. 경은 이 일련의 사건들에서 조연에 불과했다. 아무도 진상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단서들은 하나같이 불친절하였다. 게다가 인간의 시간으로는 아주 먼 과거의 은혜였다. 베푼 자도 잊을 만 했다. 그러나 무작정 달렸다. 경은 무엇인가 선택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닿았다.

 

   경은 파랗게 질린 여자의 앞에서, 생을 마감한 피들로 점철된 손을 감히 내밀었다. 여자는 산모였다. 태중에 쌍생을 품은 상태였다. 여라가 경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온기였다. 뜨겁게 흐르는,

 

   경은 여라를 지키다 죽음을 맞이했다.

 

 

   혹은 그러할 예정이었다.

 

   죽음은 단 한 번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경은 자신을 둘러싸고 사방위에 그려진 복잡한 문양과 진언들을 제일 먼저 인식하였다. 가장 큰 상처였던 배를 반사적으로 짚었다. 까끌한 흉이 만져졌다. 딱지가 앉아 굳어 있었다. 숨을 급히 헐떡이다 뒷어깨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찌르는 듯한 통증에 신음을 내질렀다. 이게 무엇이지. 무슨 일이지. 스스로 몇 번을 되물어도 알 수 없었다. 제가 운좋게 살아난 것인가. 마침 문을 열고 당주 이운이 들었다. 경은 무리하여 무릎을 꿇었다. 당주가 그것을 제지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네 몸은 어떠하냐.

 

   경은 다 쉰 목소리로 겨우 괜찮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당주께서 이리 저를 살려주신 것입니까. 이운은 그 말에 답이 없었다. 경은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그 말에도 답이 없었다. 이운은 경의 새카만 머리를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내 너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느니라. 경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정한 눈동자가 어여쁘게 검다. 당주의 표정은 흡사 측은한 것을 대하는 듯 했다. 저를 두 번 살려주셨습니다. 이운은 그렇구나, 하고 읊을 뿐이었다.

 

   네 할 일이 있다. 들어주겠느냐.

 

   경은 이번에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 * *

 

 

 

   경아. 이환은 경의 앞에 자주 불쑥 나타나고는 했다. 그러니까, 이환이 경을 부르기 위해 더 이상 소매를 잡아당길 필요가 없어졌을 시기부터.

 

   여라는 이운과 머지않아 물러났고, 이홍은 호위란 존재를 딱히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자연히 이환의 곁에 남았다. 조용한 새벽처럼. 그 뒤로,

 

   허리에 못 미치던 붉은 머리가 가슴께에 머물고, 어깨에 머물고, 까치발을 하면 턱에 닿았다가, 시선이 비슷한 높이에 머물 제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이리 가까웠다. 경아. 경아. 문득 그 이름 자꾸만 부르게 되는 것이다. 경이라는 이름이 달았던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이에게, 경이 결국 하문하십시오, 하면 이환은 늘 웃음이 먼저 나왔다.

 

   경은 변치 않음을 의미했다.

 

   이환에게는,

   지난 칠백이십 해 동안 그러했다.

 

 

   경아.

   .

 

   네게 어떠한 색이 가장 어울리는지 아느냐?

 

   경은 언젠가 이환이 던졌던 물음의 그 답을 여전히 모른다.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환] 암월暗月  (0) 2018.01.28
[이환] 여한과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의 행방불명  (0) 2018.01.28
[이환] 홍, 진유.  (0) 2018.01.28
[이환] 조우遭遇.  (0) 2018.01.28
[이환] 당주, 일상.  (0) 2018.01.28
Posted by IllillIll
,

[이환] 홍, 진유.

커뮤로그 2018. 1. 28. 20:43

170104 홍, 진유.




   이홍理灴의 아비는 이운理熉이다. 이운은 아시라가 인간과 동침해 낳은 마지막 아들이었다. 그는, 아시라의 네 자식들 중에서 그 신성이 가장 굳건하였으므로 초대 당주가 되었다. 한동안 모든 것이 천신과 아시라의 가호 아래 평안하였다. 하지만 어느 날, 이운은 저주된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발라의 땅에서 추방된 여자와 천년가약을 맺었다. 여자의 이름은 여라麗蓏. 당주의 행방이 묘연하였던 일곱이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밑에서 이홍이 태어난 것이다. 당주의 갑작스러운 일탈됨은 정말 당연하게도, 노장들의 커다란 반발을 샀다. 하필이면 그런 상대라니. 당주께서는 부디 일족을 살피시오. 이홍의 어미는 노장들이 당주를 찾을 때마다 난색을 보이며 아직 젖먹이에 불과했던 이홍을 품에 끌어안았다. 품에서는 천리향의 냄새가 났다. 그것이 어미에 대한 희미한 기억의 전부였다. 그 맑은 흑자색 눈과 함께.

 

   이홍이 열네 살 되던 해에, 아비는 어미와 떠났다. 당주된 자로 더 이상 일족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홍은 남겨졌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는 뻔한 말 덕분이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고 든든히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부모의 상실은, 사실 그렇게까지 이홍에게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저 휴일에 들를 곳이 하나 적어진 것뿐이었다. 어차피 태어난 이래로 이홍을 보는 눈길은 단 한 번도 곱지 않았으며 무지가 만들어낸 공포에서 유래한 뒷말은 여전했다. 이홍은 그것들에게 참으로 한결같이, 여지를, 스며들 곳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이홍의 녹색 눈은 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백무. 타고난 신성은 그를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머지않아 누군가 불의 선택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홍의 아비, 초대 당주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당주가 머무는 내실을 벗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일개 신관생도였던 이홍은 당주의 얼굴을 한 달 뒤에나 있을 큰 제례에서 뵐 수 있겠구나, 짐작했다. 때문에 새 당주가 생도들이 머무는 학관을 방문한다는 말을 듣자 그 얼음장 같던 얼굴이 조금은 동요하였다. 학관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본 것은 단정히 묶은 다색茶色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보다 연한 빛깔의, 이채가 감도는 눈. 새 당주는 진유眞燸라 했다. 몇 안 되는 백무인 탓일까. 타인의 특징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홍에게도 얼핏 그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성정이 퍽 선하고 만인에게 다정한 여자였다.

 

   네가 홍이로구나.

 

   성씨가 드문 아시라의 일족이었으나 이홍은 종종 오해를 받았다. 이홍이라 합니다. 나직하게 답하자 진유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내 알고 있다. 내가 홍이라 부르는 것이 불편한 게로구나. 이홍은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천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올해로 팔백오십 해를 살아온 당주는 인간이라면 스물 중후반으로 보였을 법한 젊은 외견이었다. 이홍은 그에 비해 한참 어렸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언니, 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을까. 답지 않게 괜한 생각이었다.

 

   네가 환이고.

 

   이홍은 진유가 다가선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제 옆인지, 뒤인지 대중없이 선 이는 어미를 닮아 저와 같은 어둡고 붉은 머리카락을 하였지만 그 눈이 달리 밝은 호박색이다. 당주께 예를 제대로 갖추거라. 이홍은 무어라 답이 없는 동생을 향해 차갑게 일렀다. 이홍과 한날한시에 태어난 동생이었다. 남아였고, 이름은 이환理煥이라. 어느 자리에서든 먼저 나서기를 꺼리는 자였다. 신장도 한 뼘은 더 작아 이홍과 이환이 쌍생이라는 것을 말하기에 앞서 눈치 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동생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 겨우 이환이라 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진유는 일족과 무간히 지내고자 했다. 항시 예와 위엄을 중시하였던 초대 당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 주, 또는 걸러 한 주의 끝자락이면 어김없이 아랑들 몇을 대동하고 생도들을 찾았다. 그리고는 생도들의 손에 유과며 강정을 하나씩 쥐어주는 것이다. 모자랄까 싶어 아랑들의 손을 넘어 직접 들기도 했다. 개인의 식습을 엄히 다스리는 편도 아니고, 그러한 것들을 마음먹고자 하면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신관생도들이었으나 당주가 주는 것은 아무래도 특별한 취급이었다. 이홍은 입이 단 음식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이 제 몫으로 받은 것을 먹지 않고 있으면 이리 주어라, 하여 대신 먹었다. 어미와 아비를 제하고, 누군가 이홍에게 선뜻 무엇을 건넨 것은 진유가 처음이었다.

 

   일편, 선대 당주는 다른 이에게 비할 바 없이 유능하였으므로 진유는 태도부터 신성자질까지 모든 면에서 자연히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자기수련을 하느라 바쁜 신관생도에게까지 그 말이 하나 둘 들려올 정도이니 실제 윗선에서는 어떠하였을지 이홍은 가늠키 어려웠다. 진유가 다시 학관을 방문하자 이홍은,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라 하였다. 앞뒤 없이 꺼낸 말이란 것을 뒤늦게야 깨닫고 뺨을 붉혔다. 세세히 알지 못하는 처지에 필시 무례하게 들렸으리라. 진유는 그런 이홍을 탓하거나 무안을 주지 않고,

 

   고맙구나. 내 힘이 되었다.

 

   라 답했다.

 

 

 

* * *

 

 

 

 

   당주님, 당주님. 이것 보십시오. 새로운 진입니다.

   과연. 네 특별한 재능이 있구나, 환아.

 

   이홍은 제 쌍생이 저의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이홍이 웃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고운 꽃을 보아도, 절륜한 무구를 보아도 고고한 낯은 변하지 않았다. 미소는커녕 다른 감정이 깃들기를 고대하는 또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것이 이홍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여지를 주지 않는 것. 심지어 하나 뿐인 동생에게마저 그러했다.

 

   어떤 날인가, 그런 이홍에게 진유는 금불초였다. 안개가 드리운 회색질의 벌판에 핀 노란 꽃. 아무 것도 없는 언 땅에 유일하게 색채를 머금은 것이었다. 언제 싹을 틔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잘 하였다 칭찬하였을 적인지, 네 마음이 강하구나 인정받았을 적인지, 수련을 하느라 흐트러진 수식을 고쳐주었을 적인지, 은도에 손수 진언을 새겨 돌려주었을 적인지, 홍아, 오늘 네 눈을 닮은 순이 뒤뜰에 텄더구나, 했을 적인지. 금불초의 색은 비록 번지지 않았으나 그곳에 모였다. 그리하여 지지 않는 한 송이가 되었다.

 

   제 누이가 잔잔하게나마 웃음을 띤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지켜보는 이환은, 그랬다. 저는 물론, 아무도 주지 못했던 것을 이홍에게 나누어 준 진유가 고마웠다. 나누어 줄 수 있었던 진유가 대단해 보였다. 저는 그런 이가 되지 못하였으나 그것으로 족했다. 이환이 당주 진유를 잘 따를 수밖에 없는, 가장 간단한 이유였다. 허나 영리한 이홍은 알지 못하였다. 단지 진유가 피붙이 없는 저와 동생을 잘 달래어 주었으며 여태 누구도 그리한 자가 없었으니 동생이 마음을 쉬이 열어 그러할 것이라 여겼다.

 

   누이에 비하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홍은 매 굳이 숙이는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홍의 시점으로, 이환은 충분히 제 몫을 능히 해낼 수 있었으나 늘상 무력하였다. 그 또한 백무였다. 저와 같은 천조신 아시라의 직계였다. 그 자체로 충분히 다른 이에 비해 떨어짐 없이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법 했다. 심지어 나름대로 재능이 출중하다. 대체 주눅들 것이 무어란 말인가. 저와 동등해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래 전 부러 저러는 것인가 싶어 따끔하게 충고를 해보았으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에 기운이 빠져 그만두었다. 결국, 성정이 그런 것이다. 타고난 기질이 선하지만 약함에 그쳐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자 함이다. 맞서거나, 갖거나, 따지거나, 감히 책임을 질 여력은 없으니 무엇이든 먼저 내주고, 감수하고, 참 미련하게도 본인의 부족함만을 탓하다 스스로 그것을 견디지 못해 회피하고 만다. 게다가 기껏 바란다는 게 어디에 쓸 곳도 없는 제 누이의 웃는 낯이다.

 

   네 당주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는 것이 먼저니라.

 

   한 번도 동생을 환아, 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동생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바라보는 이홍은 미약했던 미소를 거두고 평소의 싸늘한 얼굴을 하였다. 진유의 따스한 손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야 이홍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홍아. 너는 네 아우를 항상 염려하는 것 같구나. 그것도 아주 엄해.

 

   이홍은 웃음기 어린 진유의 말에 선뜻 입술을 떼기 어려웠다. 글쎄, 성품이 그럴지언정 삶은 동생의 몫이다. 동생의 성정이 그렇다는 것을 안 이상 개입은 어디까지나 논외이다.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조언은 조언에 그친다. 이환은 혹 다를지 모르나, 속에 무엇을 품었든 저는 저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단독자로서 나아가면 될 일. 때문에 이홍은 그렇습니까, 하고 말았다.

 

   먹고 싶은 것은 없느냐. 다음에 꼭 챙겨오겠다.

 

   굳이 소망이라 한다면 이홍은 진유의 다음 대를 이어 당주가 되고 싶었다.

 

 

 

* * *

 

 

 

   일족의 당주란 자리는 신이 간택하는 것이었다.

   일족을 이끌기에 가장 적당한 자. 혹은 그 숙명을 짊어져야만 하는 자.

 

   당주가 손수 돌보아야 하는 본당의 화로에는 아시라가 일족에게 하사한 최초의 불꽃이 타오른다. 모든 신성의 근원이 되는 그 불이 잦아들면 아시라의 무한한 가호 또한 유한하게 변모할 것이라 전해져왔다. 이는 생도들이 익히는 신학서의 첫 장에 명시되어 있는 바이니 모르는 일족은 없었다.

 

   최초의 불꽃이 형형한 화로에 손을 넣으면 보통은 아무런 열기를 느낄 수 없었으나 일족의 당주는 그 불에 직접 손을 댈 수 없는 유일한 자였다. 오직 그 불만은 쉬이 다루지 못하였다. 아시라의 뜻은 알 수 없었다. 신을 섬기는 일에 항상 겸손하며 오만하지 말 것을 이르는 것이라 하는 가르침도 있었고, 네 가장 무거운 것을 안고 있다는 것을 신께서 알고 위로하는 것이라 하는 가르침도 있었다.

 

   임관식이 거행되던 날, 백자에 본당의 화로에서 온 불씨를 담아주는 진유의 손에는 그을음이 묻은 흰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매를 받는 버렁 외에, 다른 것이 그 손을 감싼 것은 처음 보았다. 불씨가 위태롭게 일렁이는 백자를 받아들며 이홍은 잔잔한 목소리로 생도 이홍은 천명을 받듭니다, 라 읊었다. 생도 이홍이 신관 이홍이 되었음을 당주 진유가 천조신 아시라를 대신하여 증언하노라. 진유는 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백자는 차게 식어있었다. 이리 뜨겁게만 보이는 불꽃이거늘. 이홍은 불씨를 받아들고 그날로 짐을 꾸려 천백으로 올라갔다.

 

   한동안은 천백의 한 골에서 홀로 신당을 돌보며 지냈다. 소요素燿라 이름붙인 귀한 옥해청玉海靑도 그때 길들였다. 이홍의 신당 주변에는 마물은 제쳐두고 인적이 매우 드물어 산을 넘는 이들이 무사를 기원하고자 찾는 것이 고작으로, 소요가 가끔 물고 오는 본당의 소식이나 진유의 서신이 접할 수 있는 소식의 전부가 되었다.

 

   이홍은 동생이 보낸 서신을 눈으로 읽으며 미간을 좁혔다. 필체는 수려하였으나 그 점이나 획이 대부분 틀려있으니 이 아이 아직도 그 자들을 핑계로 서책을 읽기 싫어하는 것이 틀림없구나. 소위 일족의어른이라고 하는 자들을, 동생은 몹시 꺼려했다. 저와 제 누이를 곱잖게 대했다는 이유일까. 완전한 악심은 품지 못해 그들을 상대로 택한 것이 문을 멀리하는 것이라니. . 이홍은 혀를 찼다. 아시라께서 이환을 본당에 두지 아니했더라면 혹여 멈추었을지도. 어쨌든 이 또한, 필경 도망치려는 것이로다.

 

   반면에 진유의 서신은 흠잡을 데 없이 정갈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을 확인한 이홍의 눈은 크게 뜨였다.

 

   도성을 침략한 마물들의 엄청난 수와 참혹한 현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홍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 소요야. 식경 전 도착한 것 내 알고 있으나 떠날 시간이다. 신당을 돌보는 아랑이 따로 두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발라. 발라라니. 그 타락한 존재들이. 응답하듯 흰 매가 날개를 퍼덕였다. 네 먼저 산을 넘어 이환에게 돌아가거라. 당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전쟁이었다.

   이홍이 사백십구 세 되던 해 벌어진 일이다.

 

 

 

* * *

 

 

 

 

   가시면 안 됩니다.

   홍아.

 

   너무 위험합니다, 당주.

   그래. 당주이니 마땅히 가야 하는 것이다.

   ―…… …….

 

   그곳엔 네 동생도 있지 않니.

 

 

 

* * *

 

 

 

   진유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타락한 발라가 전선을 뚫고 동궁 앞까지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거대한 화로를 당장 옮길 수는 없으니 급히 결계를 더하기 위해 무심코 잡은 화로가 뜨겁지 않았다. 때마침 암담할 것이 뻔한 소식을 전하려 달려와 숨이 채 가라앉지 않은 이홍이 할 말을 전부 잃은 채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한참 만에 나온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진유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궁으로 가자. 일족을 도와야 하니. 이홍은 정지한 사고를 억지로 움직여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전세가 혼란하게 뒤바뀌어 발라들 중 몇 무리가 후문으로 진입을 시도하매 피가 역류하며 끓는 소리를 내는 발라의 가슴에 마지막으로 창을 관통시킨 진유가 본당으로 서둘러 되돌아와 이홍과 함께 찾아낸 것은 이환이었다.

 

   불이 옮겨져 식은 화로가 있는 본당의 실을 한참이나 지나친 창고에서였다. 이환과, 주변에 널린 몇몇 일족의 시체와, 최초의 불. 작지만 찬란하게 타오르는 홍염이었다. 그리고 그 불은, 원래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허름한 병에 담겨 있었다. 반쯤 넋을 놓은 이환의 손은, 본능적으로 잿더미를 헤쳐내고 불의 근원을 찾아 맨손으로 옮기느라 피부가 다 짓무르도록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것을 본 진유는 자신의 죽음과, 자신이 누군가의 숙명을 목도했음을 기어이 확신했으며,

 

   전부, 지킬 수가,

 

   이홍은 동생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릴 만큼 차분하다고, 생각했다.

 

   없어서.

 

   그 이지러진 눈가에는 눈물과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검신까지 전부 흑색인 외날검을 쥔 손에서 끈적하게 진물이 배어났다. 붉은 살점이 묻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다른 손으로 최초의, 영원히 타오르는 불이 담긴 병을 진유에게 내밀었다. 이홍은 그것을 가로막아 대신 낚아챘다. 뜨겁지 않았다. 이홍에게는 그 잔인한 열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두 눈동자가 심히 떨리고 있었다. 이환은 제 누이의 동요를 주저앉아 멍하게 응시하였다.

 

   환아. 진유의 다정한 음색이 이환을 불렀다. 그것을 신호로 억눌렀던 맑은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전부 지키고 싶었어요. 몇은 제게 그것을 들고 어서 어디로든 피하라 하였고, 몇은 제게 도와 달라 하였습니다. 헌데, 무엇이 우선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항의라도 하듯 이환은 생전 처음으로 악을 썼다. 당장 눈앞에서 내게 손을 뻗으며 하나하나 살해당하는 이들보다 이 따위 불덩이의 안위가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는 게 너무. 한바탕 고함을 지르고 나서 지쳐 고개를 떨구었다. 쏟아지는 무력함. 맑은 핏물이 옆머리를 타고 흘렀다. 침묵이 홀로 늘어졌다.

 

   다 괜찮다. 애썼느니라. 진유는 흩어질 것처럼 느지막이 답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침내 이홍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입을 열었다. 당주 진유는 당주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으며, 물러날만한 부덕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심지어 지금은 타락한 마물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당장 본당 앞으로만 나아가도 발라를 힘겹게 대적하는 아시라의 일족들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다. 현명한 아시라께서 그것을 모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 시점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당주의 승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시라께서 내게 새 일을 부여하신 게로구나.

   ―…… …….

 

   아주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느니라.

 

   그 기회란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홍의 질문에 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이홍은, 감히 자신이 추측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단 한 번도 대면한 현실을 부정한 적이 없어 더욱 간절했다. 기절한 이환의 손을 살피던 진유가 허리에서 물을 꺼내 상처를 깨끗하게 씻기고 열을 식히는 약을 발라주었다. 당주. 진유가 돌아보는 것에 이홍은 안심했다. 진유는 가볍게 손짓하여 이홍을 제 옆에 앉혔다. 흙과 피가 너절한 바닥이었으나 둘 모두 망설이지 않았다.

 

   홍아.

   .

 

   팔월의 취래화에 가보았니.

   풍경놀이에는 취미가 없어 가본 적 없습니다.

 

   그렇구나.

 

   진유는 이환의 손을 마저 추슬러주고 거두었다.

 

   다음에 꼭 가보렴.

 

   팔월의 취래화에는 금불초가 피었다.

 

 

 

* * *

 

 

 

   진유는 모든 것을 끌어안고 죽었다. 그것에는 일족을 향한 헌신과, 일족이 돌려 준 평판과, 비교와, 신께서 주신 가호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몇몇 덜 행복하고 더 행복한 기억이 있으리라 이홍은 멋대로 생각했다. 나무로 된 작은 함을 닫고 보를 쌌다. 매듭을 짓는 것이 마치 정성들여 누군가의 머리를 빗기는 손짓처럼 보였다. 이홍은 옆으로 흘러내리는 제 머리카락을 귓바퀴를 따라 넘겼다. 환아. 네 거동을 할 수 있다면 이것을 도와다오. 햇살이 드는 창가 아래에 앉아있던 이홍의 아우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가왔다. 천으로 만든 매듭 위에 연한 철사를 감았다. 철사의 끝에는 노란 꽃이 달려있었다. 장식으로 쓰기에 어딘가 실하지 못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었으나 이홍은 상관치 않았다. 그는 동생의 두 손을 둘둘 감은 흰 천에 눈길을 주었다. 얼룩이 덜한 것을 보아 이제 진물은 멎은 듯 했다.

 

   “환아.”

 

   이홍은 매듭을 당겨주는 이를 환아, 하고 불렀다.

 

   “. 누님.”

 

   쌍생이었으니 존대를 그만둘 만도 하건만, 한결같았다.

 

   “네 그림은 적당히 그리는 것을 잊지 마라.”

 

   이홍의 말은 끝나지 않은 전시라는 사실을 잊은 것만 같았다.

 

   “끼니는 거르지 말되,”

   “…… …….”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아우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덧붙였다.

 

   “당주의 가르침을 항상 새기면서,”

 

   이홍에게 당주는 진유였다.

 

   “몸과 마음가짐을 항시 정갈하게 하고,”

 

   철사가 두어 번 더 돌았다.

 

   “책은 하루에 한 권은 꼭,”

   “싫습니다.”

 

   이홍은 장식을 마무리 지었다. 불안해 보이는 이환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녹안은 늪처럼 깊었다. 이환은 제 누이의 시선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이홍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보의 주름을 어여쁘게 정돈하였다. 책은 하루에 한 권은 꼭, 읽도록 하여라. 동생이 잘라냈던 말을 건조하게 이어 붙였다. 이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네 일족의 어르신들을 정말로 척지려는 것이 아니려거든 그리 하는 것이 좋을 게야. 흔들림 없이 건네는 문장이었다.

 

   “네 당주께 은혜 입은 것을 스스로 해하지 말거라.”

 

   아우에게도 진유는 특별하였다. 이홍은 함을 이환에게 건넸다.

 

   “소요에 대하여 적은 것이다. 환이 네가 돌보지 아니할 것을 알고 있으니 적당히 좋은 사람에게 주어라.”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 …….”

   “내 알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이환의 옆을 지나쳐 검을 챙겼다. 온통 흑색인 이환의 검과는 달리 검신과 검집이 모두 새하얀 검이었다. 이홍은 등 뒤에서 이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히 알고 있었으나 구태여 돌아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어느덧 이환은 이홍보다 한 뼘이 더 커져 있었다. 검집에서 검을 빼 날이 상한 곳은 없는지 살폈다. 검날을 따라 선득한 예기가 파르스름하게 돌았다.

 

   “신의 가르침은 항상 마음에 새기거라.”

 

   “가지 마십시오.”

   “너는 나의 아우이며 쌍생이지만 그게 이유는 되지 못한다.”

 

   모르지 않을 터. 아니면 이제 와 떼를 쓰는 것이냐. 그리 말하는 이홍은 이환이 기억하는 대부분의 이홍이었다.

 

   “못 찾아오실 겁니다.”

 

   진유의 시신을 가리켜 말했다. 이환은 울듯한 얼굴이다.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홍은 숨을 고른다.

 

   “내가 찾아뵙는 게지.”

 

 

 

* * *

 

 

 

   과거. 혹은 잔재.

 

   , 가을 아스라이 사라진다. 누이는 돌아오지 못했다. 최소한의 계승의식조차 치르지 못한 이환의 안위와 부상을 걱정하여 실제로는 텅 빈 화로를 지키는 양 발라를 끌어들인 진유가 신성력 전부와 목숨을 대가로 도성 전체에 파마의 결계진을 쳤고, 그 시신을 되찾으러 홀로 전장에 깊이 진입한 이홍은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발라를 모두 몰아낸 후에, 이환은 자신의 누이가 진유의 곁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환은 사백이십 세에 당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운과 진유에 비해 한참이나 어린 나이었다. 좋지 못한 파란이 일었다. 그러나 삼백년이 더 흐른 이 시기까지도 골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이환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멀리서 매 울음이 들렸다. 소요, 누이가 이름을 붙여 아끼던 흰 북극매가 근처 가지에 내렸다. 그 발톱이 매섭다. 어제는 찬바람이 유난했다. 눈이 오려나. 천백에서 온 소요가 기뻐할 것이다.

 

   주위에 소나무가 들어선 평평한 바위에 앉아 궁을 물끄러미 보았다. 동궁이 훤히 보이는 자리이니 본당도 마찬가지였다. 수학시간이 막 끝이 났는지 학관과 기숙사관에서 신관생도들이 두셋 씩 짝을 지어 쏟아져 나왔다. 당주는, 제가 기억하는 누이의 시선을 좇아 있었다. 또한 진유의 시선이 섞여있었다. 이환의 시선은, 가장 밑에 머물렀다.

 

   생도 중 하나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이환의 호박색 눈이 호를 그리며 접혔다. 안녕.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손을 반갑게 흔들었다. 본당 뒤 바위에 앉은 당주를 발견하고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던 생도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제 또래 무리를 따라 뜀박질을 한다. 그 때,

 

 

   환아.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환아.

 

   또 다른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부채처럼 쌓여만 가는 환각에, 홀로 남은 이환이 눈을 질끈 감아 시야를 몰아냈다. 긴 한숨이 유일하게 저를 고요와 적막으로 인도할 길임을, 알았다. 날아오른 소요가 먼 하늘에서 원을 그렸다. 백색의 검집을 저도 모르게 움켰다. 각진 손마디가 붉어진다. 이내,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렇게 현실을 실감한다.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환] 여한과 빙룡제군패천지무황파파파파의 행방불명  (0) 2018.01.28
[이환] 경燛.  (0) 2018.01.28
[이환] 조우遭遇.  (0) 2018.01.28
[이환] 당주, 일상.  (0) 2018.01.28
[이쉬하이드] 나비  (0) 2018.01.28
Posted by IllillIll
,

171231 조우遭遇. (with. 무현)


 

 

   동궁 근처 맑은 연못에는 무량에서 기른 잉어가 퍽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잉어는 다 자라봐야 몸통이 어른의 손바닥 크기만 하였는데, 꼬리는 그보다 족히 두 배는 길게 자랐다. 헤엄을 칠 때마다 치마폭처럼 살랑거리는 그 꼬리가 몹시 아름다워 연못 위로 세워진 누각을 거쳐 간 객들이 한 번씩은 감탄하는 모양이다. 대부분은 적색과 금색이었으며, 간혹 백색이나 흑색, 얼룩이 곱게 진 녀석도 보였다. 그곳을 옆으로 지나야 본당이었다.

 

   무현은 튼튼하게 잘 짜인 교각을 지나던 중 잠시 멈추어 그 아래를 보았다. 아무리 궁이라지만 흙이 제법 올라올 만도 하건만, 깊은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었다. 덕분에 물을 노니는 것들이 물의 흐름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멀리서 수면이 찰박였다. 가끔은 저리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한적했다.

 

   마침 쉬러 나온 어린 아랑들도 근처에 모인 잉어를 구경하며 무어라 속삭였다. 그것을 건너에서 본 무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저들끼리 내기라도 한 것인지 무엇인가 한아름 떠맡은 한 아랑의 고개가 곤란한 듯 숙여지고, 나머지 두 아랑이 누가 부를세라 까르르 웃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종종걸음을해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은 아랑은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무현은 아랑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랑은 그의 큰 키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무현이 신관복을 입고 있음을 눈치 챘는지 얼른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작은 품에는 모래알 같은 것이 가득 담긴 도기가 들려있었다. 그게 무엇인가요? 아랑은 무현에게 그것을 내밀어보였다. 무현이 워낙 큰 탓에 아랑의 팔이 수평이 아닌 위로 들렸다. 잉어에게 줄 먹이입니다. 그는 아랑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기꺼이 낮추었다. 팔이 내리고,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다정한 신관님이었다.

 

   “그렇군요. 어여쁜 잉어들이 기다리겠어요. .”

 

   아이는 대개 잉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좋아한다. 무현은 제가 혹 방해를 한 것인가 싶어 웃으며 재촉했다. 그것이, 아랑의 눈이 굴렀다. 저는 물을 가까이하는 것이 무섭습니다. 다른 아랑들이 그것을 알고 짓궂게 군 것입니다. 이번에는 무현의 눈이 크게 뜨인다. 저런. 그런 줄도 모르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떼었다.

 

   “천백에서 금방 내려와 마침 궁에 사는 잉어들을 꽤 오랜만에 보는데, 괜찮다면 대신해도 될까요?”

 

   예에. 아랑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현의 손에 작은 손이 닿는다. 따뜻한 온기가 서린 도기가 옮겨갔다. 낮추었던 몸을 펴고 물가로 다가갔다. 물가가 무섭다던 아랑은, 과연 교각의 난간을 손끝이 희게 될 정도로 꼭 붙잡고 무현을 보았다. 이러면 빠지지 않겠지요, 신관님. 아랑에게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인 무현이 잉어의 먹이를 조금 쥐고 연못 위로 뿌렸다. 비가 내리는 것보다 무겁게 진동하는 수면이 근처를 맴돌던 잉어들을 불러들였다. 파다닥. 수면이 튀었다. 그래도 궁에서 사는지라 제법 풍족하게 사는 것들이어서인지, 금세 배가 부른 잉어들은 미련을 갖지 않고 저마다 무리를 지어 흩어졌다.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아랑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물은 무서울지언정 잉어가 만들어내는 색색의 잔물결이 어여삐 보이는 것일까.

 

   “내가 잉어의 먹이를 주었다는 것을 다른 아랑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신관도 나름대로 체통을 지켜야 하거든요. 어흠. 짐짓 진중한 척을 하느라 헛기침까지 해보이는 무현의 장난스러운 넉살에 아랑이 고개를 푹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반드시 비밀로 해드릴게요. 걱정마세요. 그 뒤로 몇 번인가 더 그의 손짓에 의해 수면에 파가 일었다. 손짓 한 번에 금빛 물결이, 손짓 한 번에 붉은 물결이위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여명이 반짝거리며 부서졌다. 눈이 부실만큼.

 

   “감사합니다.”

   “덕분에요. 돌아와서 잉어에게 첫 인사를 할 수 있었어요.”

 

   빈 도기를 건네받은 아랑이 생긋 웃으며 무현에게 인사를 했다. 아랑은 소중한 것을 안아든 것처럼 도기를 끌어안고 저와 같은 아랑들이 들어간 문으로 재게 걸었다. 감사합니다. 부족했는지 또 인사를 한다. 무현은 손을 흔들었고, 아랑은 마침내 문 안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은 그가 머리를 긁적인다. 손에 잉어 먹이의 구수한 냄새가 밴 듯 했다. 아랑이 아무나 붙잡고 말을 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의 곁에 선다면 누구나 알 법 했다.

 

   “이거, 도착하자마자 당주님께 인사를 올리려 했는데 늦어졌구나.”

 

   하지만 그는 그런 일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모든 생명이 그러했으나 특히 어린 것을 따스하게 지켜보고, 돌보아주는 것이 좋았다. 그러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평안해졌다. 굳이 그것을 스스로 나쁘다 할 의향은 없었으니 대신 옷매무새나 조금 다듬고 말았다. 그는 본당 안으로 들기 전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내쉬었다. 조금 전의 아랑을 따라 들면 되는 것이었다. 본당의 구조와 당주가 머무는 곳을 대강 떠올렸다. 다시 뵙게 되면 먼저 무어라 인사를 올려야 할까. 오랜만이어서인지, 별 것도 아닌 것에 긴장이 되려고 하여 부러 더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떨어지는 보폭이 어색하다. 그런데,

 

   “허면 아직 늦지 않은 듯 한데.”

 

   뒤를 도니 당주가 있었다.

 

 

 

 

* * *

 

 

 

 

 

   “다리가 완전히 부러진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무현은 삐빗, 애처롭게 우는 새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네 상처를 자세히 살피느라 손속이 좋지 못했다. 새는 흡사 그렇다는 것을 안다는 양 그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는 저를 이곳까지 불러 온 이를 돌아보았다. 무현의 것보다 어두운 빛을 띠는 붉은 머리카락이 그늘에 잠식되어 더욱 짙었다. 다만 느릿하게 그를 향하는 시선은 마찬가지로 밝았다. 어느 곳에 앉아, 음지에서 양지를 보고 있는가, 양지에서 음지를 보고 있는가는 확연히 달랐으나그러니 어딘가에서 조금 쉬면 나아질 겁니다. 당주는 무현이 새의 상태를 고할 적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한참동안 서산에 뿌리를 내린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건 다행이네.”

 

   어디 보자. 무현은 새를 조금 더 살피다 천을 다리에 감아주었다.

 

   “너는 늘 누군가를 돌보는 것에 익숙한 것 같구나.”

   “, 그저 그런 것을 지나치지 못할 뿐입니다.”

   “허어.”

 

   이환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상냥하고 다정한 게지.”

 

   그리고는 무현을 보며 웃었다.

 

   “것보다 나는 소질이 없어서 말이야. 돌아가신 누님께서 새를 돌보는 것 또한 아시라의 일족이 마땅히 베풀어야 할 덕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잘 되지 않는다.”

   “그렇습니까.”

 

   의미를 알지 못할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흩어내고 싶었으나 무어라 운을 떼야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굴리다 괜히 새의 깃털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새는 또 한 번 삐빗, 하고 울더니 퍼드득 작은 날갯짓을 하여 이환의 손에 앉았다. 당주가 돌보는 새이던가. 하지만 무현이 알기로, 당주 이환은 새를 기르거나 돌보는 일에는 잘 관여하지 않는다. 현대의 아시라의 일족이라면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과연, 새가 손에 앉으면 무어라 반응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환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것 외에 별다른 감흥이 없어보였다. 결국 새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리다 다시 무현에게로 돌아가 그의 어깨 위로 내렸다. 이어지는 높은 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웠다. 삐빗, .

 

   “다친 새는 어디서 발견하신 것입니까?”

   “이보다 큰 새가 이 새를 구박하는 것을 보고 아랑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더구나.”

 

   나를 잡고 사정하기에 데려왔지. 마침 적임자인 네가 근처에 있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밝았다. 어차피 내게 인사를 할 생각이 아니었느냐. 좋은 게 겸사겸사지. 무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하는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무현은 얼떨결에 그렇지요,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

 

   그는 당주가 제게 던지는 무엇인가를 받아냈다. 그것을 싼 종이를 걷어보니 옥수수로 만든 엿이었다. . 맛깔스러운 황적색이었다. 그나저나 엿이라니. 잠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불경하다 여겨 고개를 붕붕 저었다. 무현의 표정을 본 이환이 크게 웃었다. 이것 보게. 영 순진한 자이지 않은가. 적어도 당주로서 제가 아는 무현은 그랬다. 언제나.

 

   “너를 놀리는 것은 아니고, 답례를 할 것이 당장은 이 뿐이니까.”

   “, 제가 한 것은 딱히

   “내가 한 것이라 생각 말고 네 어깨 위에 앉은 그 녀석이 한 것이라 여기거라.”

 

   삐빗. 새가 저를 긍정이라도 하듯 지저귄다. 새가 문질러대는 목이 따뜻했다.

 

   “영리하네. 회복이 되면 알아서 하늘로 돌아가겠지.”

 

   이환이 그늘이 깊숙하게 밀려들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현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금빛 햇살이 무현의 옆얼굴을 덮는 것을 보았다. 곧 찾아올 어둠이 깃들 줄을 모를 만큼, 지기 전의 가장 밝은 여명이었다. 당주의 입매가 올라갔다. 당주는, 무현의 어깨로 손을 뻗어 새의 머리를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만져주었다.

 

   “, 당주님.”

   “.”

 

   “오랜만에 뵙습니다.”

 

   상대가 곧장 새를 드미는 통에 미처 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래. 오기까지 고생이 많았어. 나중에 차라도 같이 들자꾸나.”

 

   이환은 떠나기 전, 뒤를 돌았다.

 

   “고마워.”

 

   무현은 목례를 했다.

   새가 삣, 하고 마저 울었다.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환] 경燛.  (0) 2018.01.28
[이환] 홍, 진유.  (0) 2018.01.28
[이환] 당주, 일상.  (0) 2018.01.28
[이쉬하이드] 나비  (0) 2018.01.28
[이쉬하이드] 소동  (0) 2018.01.28
Posted by IllillIl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