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 경燛.

커뮤로그 2018. 1. 28. 20:46

180109 경燛.



 

 

   시위가 당겨진다. 줄이 팽팽하게 긴장하였다. 붉은 과녁을 응시하는 시선에는 어긋남이 없다. 희게 물든 투박한 손끝이 바람을 읽고 미세히 비틀린다. 희귀한 짐승의 뿔을 다듬고 옻칠을 한 활이 휘었다. 멀리서 북극매가 보란 듯 울었다. 매는 고공에서 정지비행을 하였다. 공기가 흐름을 멈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살이 그 간극을 찢고 쏘아졌다. 정 중앙. 일찍이 몇 번인가 더 패인 자리에 살이 꽂혔다. 그것을 확인한 이환이 각궁을 내렸다. 각궁이라 함은 본시 수렵용 활인지라 장궁의 그 길이와 위용을 갖추기 어려웠으나 얼마 전 유명 수렵꾼인 신도가 특별히 진상한 것이었다.

 

   “…… …….”

 

   활은 신관생도시절 다루던 것이다. 당시 검이 조금 더 생소하기도 하였고, 수련 중에 자꾸 사념이 들어 집중할 대상이 눈앞에 명확한 활이 이환에게 적격이었다. 옆에서 살을 새로 건넸다. 은 앞으로 살이 몇 개 남았는가를 속으로 섬긴 뒤, 당주가 다시 차분히 살을 걸고 시위를 당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환을 비추는 흑안은 늘 흔들림 없이 고요하였다. 마치 쏘아지기 직전의 촉과 같았다. 제가 도달할 단 하나의 지점만 기억하면 되었다. 그 사이, 재차 명중이다.

 

   “경아.”

 

   경은 부름에 시선을 들었다. 이환은 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검은 눈. 검은 머리. 단정함 일색. 그 얼굴에 엷은 의아함이 떠오를 무렵, 웃으며 새로 넘기려 손에 들고 있던 화살을 부드럽게 앗아들었다. 대신 제 몫을 마친 활이 상 위에 놓였다. 경은 이환이 한 묶음의 살과 촉을 분리하는 동안 부드러운 천으로 그 활을 닦았다. 시위를 분리하여 두니 당주는 제법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경아. 오늘은 이만 되었으니,

 

   “새 물감을 사러 가자꾸나.”

 

   경은 이환의 활을 고쳐들며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 * *

 

 

 

   경은 인간이다. 최초의 불을 지킬 결계를 놓고 내부에서 이런저런 지지부진한 말들이 오가던 그 때, 이홍과 이환의 아버지이자 초대당주 이운이 네 충직하고 영리하다 하여 오갈 데 없는 어린아이를 우연히 손수 거둔 것이 시초였다. 허나 처음부터 인연이 다 닿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당의 아랑이 되어 잡일을 돕고 글을 익혔다. 이후 아랑을 그만두고 출신에 의거 하급무관을 지원하여 평범한 스승을 두고는 성년이 될 때까지 성심을 다해 수련하였다. 초대당주가 일곱이레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것도 일이 벌어지고 한참 뒤에나 알았다.

 

   하급무관의 삶은 고되었다. 청출어람이었으나 주목하는 자는 드물었다. 자연히 대륙의 국경을 수비하던 최전선에 몰렸다. 돌연 큰 부상으로 불구가 될 뻔 한 적 여러 번, 빼어난 실력 탓에 구팽을 당한 적 여러 번,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제 정한 길을 꿋꿋하게 나아갔다.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든든하게 느낄 수 있는 전우 몇도 생겼으며 믿을 만한 상관도 두었다. 상관은 녹파의 관찰사였다. 승진 욕심이 많은 자였으나 그 정도 흠은 그리 흉이 되지 못할 정도로 용맹하고 기상이 호방하였다.

 

   당주가 실종되었다지 않아.

   그렇다지.

 

   경은 그러한 소문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어느 날, 상관이 그를 은밀히 불러 이르되 사람 하나를 찾도록 했다. 상관의 옆에는 숙람색 도포를 걸친 낯선 노인이 있었다. 그 밑으로 신관이 많이 신는 백혜가 보여 아시라의 일족 중 높은 이겠거니 짐작하였다. 얼굴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노인은 상관이 경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뒤로 물러 나오는데 어렴풋이 여라, 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경은 여명이 밝기도 전인 새벽부터 말 한필을 골라 다른 무관 몇과 조용히 관사를 빠져나왔다. 도착지는 멀지 않은 곳이었다. 녹파의 숲어귀에서 한 여자와 마주칠 수 있었다. 실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석류의 빛을 띤 긴 머리칼이 실바람을 타고 가늘었다. 살결은 몹시 희어서 흐른 유약처럼 보였다. 흑자색의 눈동자는 볕 아래에서 자색이나 다름없었다. 경은 한눈에 이 여자가 여라, 라고 하는 자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여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손가짐을 하며 뒷걸음질을 했다. 빼어난 미색이긴 하나 동시에 기묘한 인상이었다. 때문에 다른 무관들이 먼저 발검을 할 때까지 경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얼마 가지 못할 추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경과 일행들은 말을 타고 있었고 여자는 꽃신을 신었음에도 좀처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선득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눈앞으로 붉은 단풍이 이지러진다. 도와주세요. 숨이 턱까지 차올라 내뱉은 가냘픈 음색이었다. 살려주세요. 상관은 여자의 생사를 지정해주지 않았다. 다만 제대로 된 몸뚱이든 차게 식은 시신이든, 데려오라 하였다. 손속이 다정하지만은 않은 자들이었으니 이리 도망치다 잡힌다면 몰라도 팔 한 짝은 잘라낼 터였다. 경은 말없이 말을 재촉하였다. 상명이 있었다면, 이제 하복만이 있을 뿐이다.

 

 

 

   이운, 도와주세요!

 

   그 이름을 듣고 경의 동공이 크게 수축하였다. 덩달아 놀란 말이 급히 멈추는 바람에 그만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주먹만 한 돌들 위로 떨어져 온몸이 욱신거렸다. 멈칫할 여유는 없었기에 벌떡 일어나 검을 들고 뒤를 쫓았다. 그새 한참이나 멀어진 여인과 추격조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피할 길 없이 무리를 해야 했다. 해답을 논리적으로 따질 겨를이 없었다. 본능이, 저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며 머리통에 대고 벼락처럼 고함을 질렀다.

 

 

 

* * *

 

 

 

 

   이운이라는 이름, 그리고 신분을 감춘 일족의 노장, 당주의 부재, 추격.

 

   물론 그 때, 조각난 것들을 전부 명확하게 이어낸 상태는 아니었다. 경은 이 일련의 사건들에서 조연에 불과했다. 아무도 진상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단서들은 하나같이 불친절하였다. 게다가 인간의 시간으로는 아주 먼 과거의 은혜였다. 베푼 자도 잊을 만 했다. 그러나 무작정 달렸다. 경은 무엇인가 선택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닿았다.

 

   경은 파랗게 질린 여자의 앞에서, 생을 마감한 피들로 점철된 손을 감히 내밀었다. 여자는 산모였다. 태중에 쌍생을 품은 상태였다. 여라가 경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온기였다. 뜨겁게 흐르는,

 

   경은 여라를 지키다 죽음을 맞이했다.

 

 

   혹은 그러할 예정이었다.

 

   죽음은 단 한 번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경은 자신을 둘러싸고 사방위에 그려진 복잡한 문양과 진언들을 제일 먼저 인식하였다. 가장 큰 상처였던 배를 반사적으로 짚었다. 까끌한 흉이 만져졌다. 딱지가 앉아 굳어 있었다. 숨을 급히 헐떡이다 뒷어깨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찌르는 듯한 통증에 신음을 내질렀다. 이게 무엇이지. 무슨 일이지. 스스로 몇 번을 되물어도 알 수 없었다. 제가 운좋게 살아난 것인가. 마침 문을 열고 당주 이운이 들었다. 경은 무리하여 무릎을 꿇었다. 당주가 그것을 제지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네 몸은 어떠하냐.

 

   경은 다 쉰 목소리로 겨우 괜찮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당주께서 이리 저를 살려주신 것입니까. 이운은 그 말에 답이 없었다. 경은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그 말에도 답이 없었다. 이운은 경의 새카만 머리를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내 너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느니라. 경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정한 눈동자가 어여쁘게 검다. 당주의 표정은 흡사 측은한 것을 대하는 듯 했다. 저를 두 번 살려주셨습니다. 이운은 그렇구나, 하고 읊을 뿐이었다.

 

   네 할 일이 있다. 들어주겠느냐.

 

   경은 이번에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 * *

 

 

 

   경아. 이환은 경의 앞에 자주 불쑥 나타나고는 했다. 그러니까, 이환이 경을 부르기 위해 더 이상 소매를 잡아당길 필요가 없어졌을 시기부터.

 

   여라는 이운과 머지않아 물러났고, 이홍은 호위란 존재를 딱히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자연히 이환의 곁에 남았다. 조용한 새벽처럼. 그 뒤로,

 

   허리에 못 미치던 붉은 머리가 가슴께에 머물고, 어깨에 머물고, 까치발을 하면 턱에 닿았다가, 시선이 비슷한 높이에 머물 제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이리 가까웠다. 경아. 경아. 문득 그 이름 자꾸만 부르게 되는 것이다. 경이라는 이름이 달았던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이에게, 경이 결국 하문하십시오, 하면 이환은 늘 웃음이 먼저 나왔다.

 

   경은 변치 않음을 의미했다.

 

   이환에게는,

   지난 칠백이십 해 동안 그러했다.

 

 

   경아.

   .

 

   네게 어떠한 색이 가장 어울리는지 아느냐?

 

   경은 언젠가 이환이 던졌던 물음의 그 답을 여전히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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