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 암월暗月

커뮤로그 2018. 1. 28. 21:11

180120 암월暗月 (with. 사사)





   씁쓰름한 향내가 섞인 공기가 무겁다. 회정당의 천장은 높았다. 일족의 회의는 젊은 당주가 상을 내리침과 동시에 중단되었다. 당주를 호위하는 자인 경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책더미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건조하게 정면을 응시하였다. 당주의 등은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두운 붉은 색 머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오르내리는 어깨를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뿌득, 윤이 도는 상이 긁혔다.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환이 이리 직접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그 역시 처음 보았다. 밝은 눈동자에 깊숙이 박힌 동공이 두드러진다. 난감한 얼굴을 돌린 일족의 원로 중 하나가 다른 자와 눈길을 교환했다. 곧 제일 나이가 많은 원로, 문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뒤를 앞다투어 맞장구친다.


   “… 별 일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주. 당주께서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저희도 모르지 않으나―” 
   “이 주위에서 아직까지 발라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들어온 적이 없지 않습니까.”
   “대전쟁 후에 발라를 본 자는 아무도―”


   이환은 냉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 발라가 전부 죽었습니까. 이런. 제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중요한 일이 벌어졌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멀쩡한 신관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어린 생도가 실종된 것입니다. 헌데 어찌 이렇게 다들 태평하십니까? 모르시지 않는다더니, 혹 생각이 아주 없으신 것은 아닙니까?”


   누군가 침음을 삼켰다.


   “말씀을 삼가세요.”
   “어허. 어찌 그런 말씀을 …….”
   “저희도 찾아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당의 신관들을 급히 풀어 반나절 내내 수색을 감독하였단 말입니다.”


   이후로 말이 없던 문흥은 이제 막 등장한 문장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저런 눈치라고는 없는 자 같으니. 아니나다를까 즉시 당주의 노호가 떨어졌다.


   “생도 하나가 숲에서 낙오된 지 무려 사흘이 넘으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오늘까지 제겐 물론이고 다른 어르신들에게도 여태 명확한 보고가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금 더 숨기실 수 있었다면 영영 묻으실 작정이셨습니까!!”

   “…… …….”
   “…… …….”


   결국 문흥이 사태를 중재하고자 나섰다.


   “… 문책은 생도를 찾고 나서 하여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 당주.”


   당주의 차가운 분노가 문흥에게 향했다. 여태 마주한 적 없는 묵직한 위압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찰나에 머리를 스치는 흰, 불꽃의 환영. 그 재능만큼은 당주로서 적격이로구나. 허나. 달리 감탄할 새가 없었으므로 문흥의 마른 입술이 미세히 떨렸다. 그러나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늦었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말씀이 얼마나 위선적으로 들리는 지 알고 계시지요?”


   문흥이 고개를 숙였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았다. 당주는 고개를 돌리며 코끝으로 웃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환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자리를 떴다. 붉은 옷자락이 사납게 펄럭였다. 당황한 몇몇 원로들이 당주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으나 문흥은 점잖은 말로 그들을 도로 앉혔다. 앉으시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왜 모르는가. 당주가 완전히 멀어지자 원로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불필요한 불평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녁달이 먼 하늘에서 희게만 보였다.



* * *





   이환은 그 없어졌다는 신관 생도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었다. 여아의 이름은 윤도라 하였는데, 부모가 대전쟁에서 죽어 언니나 오라비, 동생도 없이 혼자가 되었다. 진언을 새기는 데 재능이 있어 촉망을 받는 인재였다. 하루는 수업에 가지 않고 숨어 울고 있는 것을 우연찮게 찾아내어 몇 마디를 들어주었다. 많이 그립고 외로운 듯 했다. 얼마간 이것저것 손에 주전부리를 내주기도 하고, 실없는 수다를 피우기도 하였다. 착한 아이였다.

   내실에 들어가 곧장 검을 챙겨들었다. 경이 나직하게 물었다. 제가 어느 쪽을 살피길 원하십니까. 경은, 그리 긴 단서가 없이도 이리 이환의 생각을 짚어내고는 했다. 이환은 쓰게 웃으며 가까운 마을들을 하나씩 돌아보라 하였다. 알겠습니다. 고마워, 경아. 둘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갔다. 저는 반대편 숲을 직접 뒤져볼 참이었다. 경이 목례를 하고 먼저 물러났다. 머지않아 이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보름이라 밤이 밝은 것은 다행이었다.

   경을 대신하여 소쩍새 한 마리가 뒤를 따랐다. 먼 과거의 문조를 떠올리고 모란이라 이름 붙인 어린 소쩍새는 그래도 누이가 기르던 소요를 언젠가는 돌보아볼까 하여 얼마 전 새로 들인 새였다. 친근히 여기는 것은 아직껏 어색했으므로 범연하게 굴만도 하건만, 모란은 이환에게 꽤 살갑게 굴었다. 곱지 못한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살금 깨물다 날아올라 밤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숲 전역에 깔린 흙이 보드랍고 푹신하였다. 발 딛을 때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환은 숲을 가로질렀다. 신관생도들이 야외에서 실습을 했다는 곳부터 추적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멀지 않아. 찌륵찌륵, 밤벌레가 울었다. 반딧불이가 가는 길에 두셋씩 종종 깜박인다. 마치 어딘가로 안내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느덧 술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숲은 진녹색으로 거칠게 붓질한 듯이 칠해져 있었다.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반딧불을 따라 도착한 물가를 둘러싼 나무들은 저마다 뿌리를 수면 아래로 드리운 모습이었다. 이윽고 주위를 거닐다 나무껍질이 인위적으로 벗겨진 흔적을 보았다. 생도 중 하나가 만들었을 엉성한 결계가 파괴되어 흙이 푹 패인 자국도 발견할 수 있었다. 몸을 낮추고 땅을 더듬던 이환이 몸을 일으켰다. 모란이 돌아오면 무엇인가 소식을 전해줄 것이다. 별 일 없어야 할텐데. 걱정이 가득했다. 


   “…… ……?”


   순간, 이환은 어떤 소리를 감지하고 몸을 돌렸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향하였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유달리 선명하게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어둡고, 메마른, 빠르게 소실된, 혹은 아주 깊은. 죽음의 기운이다. 신족의 보법은 인간과 달라서 그 폭과 움직임이 기묘하였다. 백색의 잔영이 밀도 높게 밀려들어오는 수해樹海를 거슬러 올랐다. 조금만, 더. 빨리. 말초가 바스라지는 감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미없는 생각이었다. 고개를 가로저어 흩었다.

   아이라면 구할 것이고, 

   발라라면 죽인다.

   이환은 발뒤꿈치로 땅을 한 번 짓이긴 뒤 시위에 살을 걸었다. 인영이 둘이다. 예리한 본능과 판단이 동시에 빨랐다. 응축된 신성이 담긴 살이 대기를 찢고 텅 빈 공터를 갈랐다. 누군가를 정확히 맞히기 위해 쏜 것은 아니었으나 상대의 진영과 대치를 흐트러놓기에는 충분했다. 다른 인영에 비해 작은 인영이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이환은 그 머리가 땅에 부딪히기 전에 부드러이 안아들었다. 갈색의 단발. 어린 아이였다. 실종된 신관생도. 당주는 가장 최소한의 안도감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엷게 미소하였다. 그리고 턱께에 겨누어지는 칼끝. 시린 달빛이 사늘한 칼날 위에 얹혀있었다. 이환이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달을 등지고 있었다. 


   “…… …….”


   그는 발라였다. 끝없이 침참하는 한쌍의 눈동자가 저를 명백히 향하였으나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얼굴에 깊고 큰 흉을 진 발라는 밤하늘의 달을 닮았다. 그러나 달이 저리 검으면 으레 암월暗月이라 한다. 선득한 고요는 발라의 양 어깨에 앉아 달그림자로 드리웠다. 다만 둘 중에 한 편이 이어지지 못하고 공허하였다. 검을 쥐고 있는 마디진 손 위로, 고급스러운 비단을 소재로 한 남색의 옷소매가 권태롭게 늘어졌다. 소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자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쿨럭. 그 때 이환의 품에 안긴 아이가 별안간 기침을 토하였다. 보아 부상이 심하였다. 이 부상은, 저 발라가 만든 것인가. 도자기 가면을 씌운 듯 했던 당주의 얼굴이 참 쉽게도 흐트러진다. 섬세한 분노와 탄식으로.

   허나 이환은 고민하였다. 이 자를 칠 것인지, 아니면 아이를 데리고 곧장 돌아갈 것인지. 아이를 품에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른도 아니고 이만한 부상을 입은 아이를 데리고 섣불리 이동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아이의 숨이 가쁘다. 암월과 같은 발라와 이환 사이에 등줄기를 거미처럼 기어오르는 긴장감이 흘렀다. 기울어진 균형이 위태롭다. 

   당주는 몸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일으켰다. 날카로운 검끝은 미동조차 없었다. 숨을 죽인 채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스락. 발끝이 움직이며 낙엽이 부스러졌다. 여전히 적막한 숲에서, 오래된 발라와 아시라의 당주는 서로의 간극을 한동안 유지하였다. 왜곡되었을 것이 분명한 기시감마저 느껴질 무렵에 이환이 아이를 고쳐안고 반 보 물러났다. 반 보, 다시 반 보. 일 보. 이 보. 무명의 발라는 정한 눈으로 저를 꿰뚫고 있을 뿐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환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뭐지?

   발라의 검날에 비치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이 마치 핏자국 같았다. 그것에 잠깐 시선이 고정된다. 발밑으로 뻗은 암월의 그림자가 갈래갈래 찢어져 발목을 잡아챔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야래향이 물씬 흐드러진다. 이환은 얼굴을 굳히며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발라는, 느릿하게,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명치 부근을 이질적인 감각이 스쳤다. 입술을 감아물었다. 전투 직전의 긴장과는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다른, 그런― 



   왜?




   의도가 없다면야. 찬물을 얻어맞은 것마냥 사고를 바로잡았다. 이환은 더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이렇게 된 이상 부상당한 아이가 먼저였다. 결정 직후의 이동은 신속하였다. 품 속의 아이가 당주님, 하고 제 옷깃을 움켰다. 조금만 참아라, 하고 달래며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깊은 숲속에서 느껴지던 모든 인기척이 일순에 분멸되었다.



* * *





   “… 하여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윤도는 상처투성이인 손을 꼬물거리며 이환의 눈치를 보았다. 이환은 여아를 크게 나무랄 생각이 없었으므로 허공에 작게 한숨을 쉬고 어쨌든 다행이다, 하였다. 햇살이 눈부셨다. 젖은 흙과 썩은 나무껍질 냄새가 나던 그때와는 다르게, 풋풋한 단내가 코끝을 간질였다. 에취. 이환은 코를 훌쩍이고 신관 생도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짐짓 엄한 얼굴을 한다. 여아가 눈을 굴렸다.


   “다음부터는 피하는 것이 먼저이니라.”

   “예에…….”
   “아직은, 말이다.”


   커다란 손이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도는 알겠습니다, 하고 시무룩하게 답하였다. 자신의 눈앞에 발라가 보이자 무작정 달려든 것이 패착이었다. 우습게도, 순수하게 어미와 아비의 복수를 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단순히, 아득한 공포와 혐오가 뒤섞여 검을 빼들었다. 일합은 손쉽게 막혔다. 다음 합도 다를 바 없었다. 발라는 강하였다. 발라 내에서도 알아주는 강자였음을 어린 생도가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그 발라는, 어린 생도의 일방적인 공격을 흘리고 방어하는 데서 대처를 마쳤던 것이다. 

   이환은 생도의 상처를 눈여겨 보았다. 검격. 흔적. 위로, 다시 긋고, 막고. 역시나 얕다. 어째서. 발라라는 존재들이 이제와서 자비를 베풀고 비살상을 추구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윤도가 제 눈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것도 잊고 골몰하였다. 상대가 워낙 어린아이라 그런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제일 그럴듯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연이어 떠오르는, 그자의 움직이지 않는 검끝과 비틀린 미소가 있었다. 이환은 청차가 일렁이는 잔을 뚫어져라 보며 미간을 슬쩍 좁혔다. 

   하아. 왠지 머리가 아프구나. 당주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 저어, 그 발라의 이름을 들었사옵니다.”
   “이름을?”


   묻는다 하여 이름까지 가르쳐주었단말인가. 묘한 일이로다.



   “사사라 하였습니다.”


   사사.

   둥그렇게 뜬 호박색 눈이 서서히 껌벅였다.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고, 사사라. 하고 나직한 음색으로 되새겼다. 공중에 떴던 그 이름이 햇살에 덧없이 흩어졌다. 음. 짧지 않은 음성을 굴리는동안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제가 기억하는 그 어두운 달과, 평선 없는 밤하늘, 수를 세기에 벅찬 별의 결정들과는 확연히 다른, 따뜻한 양지가 대청 아래에 가득했다.


   “그래. 내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 만나게 되면 꼭 혼내주마.”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이환은, 왠지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퍽 잘못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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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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