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24 화유和柔 (with. 례분)
그 선명한 쪽빛을 떠 담으면 이러한 색이 날까 하였다.
이환은 두 손을 짚고 못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잔잔한 수면은 면경이 되어 여름의 창천과 저를 동시에 비추었다. 실낱같은 남풍이 스미자 그 위로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풍경은 쉽게 이지러진다. 하늘에서 우러난 푸름이 살랑이며 퍼지는 것을 보고 차차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뺨을 타고 얼룩져있던 물그림자가 죄 가셨다.
사박사박. 설익은 풀잎을 밟고 뒤로 다가온 이가 홀로 멀뚱히 앉아있던 붉은 머리를, 말아든 종이로 내리쳤다. 아야. 경쾌한 소리와 함께 두 손이 올라가 얼른 웅크리고 만다. 엄살은. 수련을 보고 그리랬더니 뭘 보고 있어. 설마 익사를 희망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얻어맞은 쪽은 침음을 삼키고 제 머리를 감싼 손을 풀더니 목을 뒤로 젖혔다. 곱잖은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이가 전환된 세상에 서 있었다. 햇살을 더 맞이한 동공이 짧게 수축했다. 뭔데, 신관님.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기에, 투덜거리는 음성이 두어 쓸 데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답을 재촉하였다. 둥글게 담긴 쪽빛과 섞여든 호박색 눈을 두어 번 깜박인 뒤에야 게으른 입술이 열렸다. 거기서 으음― 하고 또 말을 골랐던가.
“내 너를 보고 있다.”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구겨진 종이가 이번에는 소년의 이마를 정통으로 타격했다.
“…… 아야.”
“이제는 반응도 늦네.”
화유는 사납게 등을 돌렸다. 몇 걸음 앞서 걷던 신발 코가 내리는 옷자락 아래로 사라진다. 댓살로 짠 자리에 앉아 색색의 물감이 담긴 그릇을 옆으로 조금 밀어냈다. 대신에 소담하게 담긴 과일이며 요화, 강정, 먹음직한 떡들을 펼쳐둔 것들은 앞에 오도록 당겼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약과 하나를 골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니 고소하고 달다.
부유하는 수련에 대한 때 지난 감상을 그만둔 이환 역시 자리로 돌아왔다. 물감이 담긴 물그릇에 닿을 듯 말 듯, 화유가 수련 한 송이를 그려놓은 종이 끝이 젖을 것만 같아 안전한 곳으로 두었다. 그림의 주인은 그것을 보고도 별 말이 없었다. 내 수련은 오늘 중에 꼭 완성할 터이니 걱정 말거라. 그리 말하며 분홍색 요화를 조심히 집어드는 다섯 손가락 중에, 두 개 정도가 겨우 여물었을만큼 어린 소년이었지만 신관은 신관이었다. 본인은 신관이 아닌 생도라고 주장하나 화유가 그 차이를 세심히 고려해 줄 인물은 아니었다. 글쎄다,
“너 때문에 지금까지 불쌍한 종이가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는 아느냐?”
자그마치 일곱 장이다. 일곱 장. 빈정거리며 유과를 입에 넣었다. 대번에 소년의 어깨가 축 처진다. 이게 말만 연꽃잎을 그린다 하면 연꽃잎인 줄 알아. 생긴 것이 영 댓잎인데.
“그래도 이번 것은 그나마 봐 줄 만 하구나. 그것 하나는 다행이다.”
색을 잘 입혀 봐. 봐 줄 테니까. 안으로 들수록 붉은 입술의 한 끄트머리가 말을 마치고 얄궂게 올라간다. 하얀 검지로 가리킨 신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기 쉽기는. 밖으로 나와도 별 수 없는 문장을 삼키며 강정을 골랐다. 궁 안에서 가져온 것이라 그런지 뒷맛이 깔끔하였다. 오늘은 그림을 그리러 이 앞에 간다 하였더니 들놀이에는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며 신관이 아침부터 챙겨온 음식들이었다. 들놀이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러 가는 것이라 첨언하여도 영 듣지를 않았다. 작은 한숨을 폭 자아낸 화유는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신관 생도와 눈이 마주쳤다. 무어냐. 할 말이 있어? 정작 나이는 그의 또래일지언정 꽤나 어려보이는 신관은 당과를 열심히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
그 때 마침, 화유의 콧잔등에 물이 떨어졌다. 아. 여우비다. 어딘가 먼 하늘에서 비구름이 머무는 듯 하였다. 자연히 손을 들어 가늠했다. 하나, 둘. 제법 빗방울이 무거웠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파랗다. 보기 드문 광경에 하늘을 우러른 채로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자 머리에 무엇인가가 급히 얹어진다. 무심결에 받아든 그것은 이환이 화구를 넣어 말고 다니던 가죽 보였다. 야, 하고 멈춰 세우기도 전에 제 그림은 어디 두고 시범을 보이느라 그려놓은 화유의 한 장 뿐인 그림을 달랑 챙겨들어 혼자서 들을 달려 나갔다. 젖을세라 가슴에 붙이던데, 저러다 신관복에 물이 들면 어찌하려는 겐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느라 뒤늦게 일어난 화유가 이환의 가죽 보를 머리에 이고 들을 건넜다. 가는 길에 붓 몇 개가 굴러 떨어져 잊지 않고 주웠다.
“…… 거 봐라.”
쏴아아. 분무 같았던 비는 금세 비구름이 떼로 몰려 굵은 소낙비가 되었다. 잎이 우거진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선 화유의 흰 뺨을 타고 빗방울이 물길을 만들어내며 굴렀다. 그나마 보를 쓰고 와 머리와 어깨는 덜 젖은 모양이었다. 반면에 물에 빠진 꼴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한 이환이 축축해진 그림을 두고 시무룩해진다. 곳곳의 색이 번져 흉했다.
“그냥 두나 이렇게 들고 오나 같잖으냐. 그럴 거였으면 네 그림이나 챙기지 그랬어.”
“…… …….”
간만에 볼 만한 그림이 나오는가 하였거늘. 그는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그림 선생의 그림이 망가진 것이 퍽 속이 상한 듯 했다. 함께 화유의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젖은 종이를 못내 버리지 못하고 쥐고 있는 것이다. 젖은 종이는 문 앞에서 화유에게 기어코 빼앗겼다. 그러고도 우물쭈물 거리는 신관 생도 소년을 향해 화유 말하기를, 시끄럽다. 들어 와. 하고 단호히 싹을 잘랐다.
이환은 화유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늘 정갈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이곳에서 가만히 물감을 개고 있자면 주변에서 새 울음이 들리고는 했다. 연적 안에서 찰랑이는 맑은 물도 세세히 느낄 수 있었다. 문살의 모양을 따라 햇빛이 엷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날이 흔했다. 오늘은 갑작스레 이리 날이 흐리게 되어 볼 수 없었지만. 빗물에 푹 가라앉은 옷이 무거워 걸을 때마다 둔중함이 느껴졌다. 제가 자초한 것이라 하나 이 감각이 약간은 불쾌하기도 하였다.
화유는 겉옷을 벗어 주름 없이 바닥에 잘 펴두고 화로에 불을 올렸다. 너도 겉옷 정도는 벗지 그래. 그 꼴로 돌아가면 최소한 칭찬은 못 받을 걸. 계절이, 수련이 못에 필 여름인지라 화로를 마지막으로 쓴 지는 꽤 되었다. 불이 잘 붙지 않아 몇 번을 더 뒤적였다. 무릎걸음으로 다가 온 신관 생도가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손끝으로 화로 주변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세필 붓으로나 쓸 법한 작은 글씨였다.
“뭐 해?”
쉽게 볼 수는 없는 광경에 화유는 물었다. 손끝이 획을 긋는 대로 밝은 빛이 돌았다. 손끝이 조각칼이나 붓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기에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이환은 진언의 마지막 획을 긋고 물러났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가까이에서 씩 웃는다. 화유는 미간을 좁혔다. 이놈의 제자가 무슨 속셈인지 알지 못하겠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투둑. 툭. 투둑. 하고 둔탁한 음이 나며 불꽃이 시시각각으로 색을 바꾸어 형형히 터지고, 제자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금시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아니, 꼭 그게 아니더라도 저 악령처럼 발광하는 화톳불을 보면 누구라도 그리 알테지. 그러니 일단 쥐어박고 보았다. 불은 곧 천장에 닿을 것 같이 커졌다. 아무래도 그것을 시작으로 지금 당장 집 전체를 홀랑 태워먹을 기세였다. 야! 이 멍청아! 어떻게 할 거야! 화유의 노호에 응답하듯 황천에서 올라온 불똥 하나가 홀연히 치솟았다. 그리고 그것을 토악질마냥 뱉어낸 불은 거짓말처럼 잿더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그라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하필이면 불똥이 화유의 겉옷 위로 정확히 낙하했던 것이다.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말리기 위해 바닥에 널어둔 옷에 엄지손톱만 한 구멍이 났다.
“…… …….”
“…… …….”
이환도, 화유도 말이 없었다.
퍽. 이윽고 집 밖으로 누군가의 등, 혹은 어깨가 얻어터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환은 맑은 날, 머리에 문조 모란을 얹고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장터의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호객을 하는 것 외에 여념이 없는 상인들이 소년에게 손짓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정확한 목적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어디인지 잘 알지 못하여 몇 시진을 낭비하고 헤맸다. 행인을 붙잡고 물어도 전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궁 밖으로 좀처럼 나와 볼 일이 없는 신관 생도가 인간이 만들어 낸 장터의 복잡함을 미리 알고 있었을 리 없었다. 그릇을 파는 이가 셋, 옷감을 파는 이가 여섯, 먹거리를 파는 이가 열 둘, 노리개 파는 이가 넷.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 거리가 이 거리 같고, 저 거리가 저 거리 같으니 이환은 곧장 직진을 택했다. 괜히 이리 길을 들었다 저리 길을 들었다 하다가는 똑같은 곳을 맴돌 것 같았다.
가는 길에 우연찮게 화구방이 있어 연적과 작은 그릇을 몇 개 더 샀다. 누이가 알면 한 소리를 들을 테지만, 이환이 수를 물러주지 않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래서 신을 잔뜩 늘어놓고 손을 맞이하는 상인 앞에 섰을 때는 이미 두 손에 보가 하나씩 들려 있는 상태였다. 이환은 새 가죽 냄새가 나는 신 앞에서 몸을 낮추어 살폈다. 그러고 보니 신을 사 본 적이 없다. 신관 생도들의 복식은 전적으로 궁과 본당에서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복을 가질 수는 있지만, 딱히 입을 일도 없었다. 어떤 것이 어디에 신는 신인지도 잘 몰랐다. 뒷머리를 긁적이다 상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보게. 어느 신이 가장 괜찮은가?”
만일 이환이 머리가 조금만 더 컸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어리숙하고 모자란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상인은 제 코끝을 찡긋거리며 일단은 어디 봅시다, 하였다.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신이라면 이런 종류이지요. 자색으로 물들인 앞부리가 솟은 신이었다. 그런가. 기껏 질문에 답하여 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시큰둥하였다. 상인은 속으로 이 작은 신관이 돈과 신을 바꾸어 갈 것인지를 바쁘게 쟀다. 결론은 얼마 못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뭔가를 사들고 있기는 하나 신에 대해 큰 욕심도 없어 보이고, 잘 알지도 못해 보였다. 더구나 신관이란 자들은 앞선 여러 이유로 상인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객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시오. 오시오. 자자, 보러 오시오. 상인은 이환을 등지고 다른 이들에게 손짓했다. 어깨에서 내려온 작은 문조가 땅을 종종거리며 피이- 울었다.
이환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고민에 빠졌다. 어떤 것이 제일 잘 어울리려나. 또는, 어떤 것을 사 가야 화유에게 혼이 나지 않으려나. 저 보기에 온통 화유가 입으면 어울릴 것들 뿐이다. 사흘 전 화유의 옷 하나를 못 쓰게 만들어 둔 이후로 줄곧 골몰하던 생각이었다. 옆길에 태사문을 새긴 신 한 짝을 들어 올렸다가 도로 놓았다. 본래 망가진 것이 옷이기도 하고, 그래서 옷을 한 벌 사 줄 예정이었지만 지난 이틀 동안 평생 보았던 옷보다 더 많은 옷과 대면한 뒤로 얌전히 포기하였다.
신은 좀 덜 하겠지 싶어 방향을 선회한 이환은 이것도 어렵네, 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무엇이 더 낫고 덜한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다 고와보이거늘. 하긴, 화유는 곱다는 말을 싫어하였다. 제가 무얼 모르고 화유에게 표현 그대로 네 눈이 곱다하였을 때 그가 입을 다물고 짓던 표정이 여태 선연했다. 그는 화를 냈다. 사무치게 소리를 지르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이환은 흐음. 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운 분께는 고운 것이 어울리는 법이지요.”
보다 못한 상인이 넌지시 말했다. 슬슬 돌려보내지 않으면 금일 장사에 영원히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이런 신은 어떻습니까? 신코와 뒤축에 운문이 풍성히 그려진 신을 한 켤레 들어 건넸다. 코앞에 내밀어진 신을 응시하던 이환이 순간 어, 하고 반응을 보였다.
“화유는 곱지 않다.”
어색할 만큼 딱딱한 어조였다. 예? 상인이 무심코 되묻자 이환도 덩달아 미간을 구겼다.
“여기서 제일 곱고 편한 것으로 주게.”
결국 소년의 손에는 새 신을 싼 보자기 하나가 더 들렸다.
화유는 제 집 안마당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신관 생도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대낮부터 뭐야. 어디서 불이 나기라도 했든. 그러나 소년은 난데없이 다짜고짜 제 그림 선생의 손을 잡아 끌어다 대청에 앉혔다. 오죽하면 이런 적이 처음이기에 정말 무슨 일이 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붉은 머리가 폭삭 내려갔다. 화유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환이 잘 매듭지은 보자기를 풀어 헤치고 신 한 켤레를 꺼내들었다. 감색 물이 든 비단신이었다. 화유의 손 옆에서 날개손질을 마친 문조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이환은 화유의 왼쪽 발이 신은 신을 조심히 벗겨내고 제가 가져온 신을 신겼다. 발목에 잠시 닿는 체온이 불을 쬐는 것처럼 따뜻하였다. 하여 그냥 제멋대로 굴도록 두었다. 고개를 조금 숙인 화유의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신은 화유의 발보다 살짝 컸다.
뭐, 예상 못할 일도 아니었으나―
“이런. 네가 더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을 수 있겠구나.”
“… 인간은 여기서 더는 안 큽니다, 바보 신관아.”
얼른 가서 바꿔 와. 나 참. 하도 급히 달려들기에 뭔가 하였다. 화유는 남은 비단신 하나로 이환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잰걸음으로 마당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흰 얼굴이 옅게 미소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빈 집 앞에서 가지런히 놓인 한 켤레의 비단신을 바라보며, 화유가, 정말 떠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길잖은 시간인 한 달이 걸렸다.
이환은 더없이 상냥하게 웃고 있는 화유에게 그림 한 장을 받았다.
―직접 그린 것입니다.
무척 나긋한 음성이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받으세요. 멀리 떠나는 길에 마지막 선물입니다.
아니,
그것은 화유가 맞던가?
―…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이냐?
―아주 먼 곳으로 갑니다.
아니었나?
무엇을 그린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받은 그림은 한 번 펼쳐보지 않았다.
화유는, 죽었다. 그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이환은 땅에 떨어진 붉은 동백을 손에 넣었다. 나무가 털어낸 꽃은 갈빛이 잠식하여 볼품이 없었다. 생기가 넘치던 꽃잎이 늘어지고 자꾸만, 자꾸만 틈이 벌어지고 만다. 노란 술은 죽어서 가루가 되어 날렸으며 푸른 잎은 멀리서부터 시들었다. 마지막 남은 그 붉음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죽은 꽃잎은 이 정도의 바람에도 덧없이 흩어져 버린다. 손이 추락하매 동백도 추락을 면치 못하였다. 하강은 무엇보다 조용히 이루어졌다. 내리깐 시선이 동백에게 못 박힌다. 그것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나 죽은 꽃은 그저 죽은 꽃에 불과했다.
화유란 이름에는 화할 화和에 부드러울 유柔 자를 빌려 쓴다고 하였다. 어쩌다 꽃 화華를 쓰는 것이 아니냐 물었더니 세상에 그런 괴이한 이름이 어디 있느냐며 핀잔을 들었다. 그것을 문득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애당초 제가 화유에 대해 저 혼자 가늠하여 무엇을 맞힌 적이 거의 없었다. 화유는 언제나 제가 상상하던 궤도 너머에 있었고, 그래서 잘 닿지 않았다. 손이 잘 닿지 않으니 눈을 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붓으로 그려넣은 듯한 쪽빛이 가장 먼저 보였다. 간혹 짓는 표정에 눈 아래의 점이 한 번 더 잡아끌었다. 화유는 빤한 시선에 가끔씩 너 무어 할 말이 있느냐 물었고, 저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매번 그냥 네가 거기 있지 않았느냐,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그곳에 있었기에, 내 너를 보고 있다.
어둠은 쉽게 찾아왔다. 어쩌면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화유가 굳은 얼굴로 하루 종일 대답이 없었을 때도 있었고, 붓을 잡으려다 선 하나를 긋지 못하고 놓을 때가 있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엇인가 그에게 해주었더라도 제 오만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환 또한 백지를 들고 와서 백지를 들고 물러가는 일이 얼마 간 잦았다. 그 후, 화유는 떠났다. 언질은 없었다. 온기가 식은 방이 남아있었다.
이환은 대청에 앉아 무작정 기다렸다. 어디 멀리 나간 것이 틀림없는 게로구나.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툰 손으로 어수선한 방을 정돈해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째 되는 날에 비단신을 안으로 들였다. 닷새, 이레, 열흘. 붓이 잡히지 않았다. 물어 볼 사람이 없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보름. 스무하루. 부러 이틀을 찾아가지 않았으나 누군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스무닷새. 그믐. 그믐날에는 비가 내렸다. 화유가 찾아왔다. 화유가 아닌, 화유가.
그는 마지막에 문조 모란을 그려 이환에게 건네주었다. 그림을 펴보지는 않았지만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제가 화유에게 불평했던 적이 있었다. 모란은 근본이 새여서, 마구 움직여 그리기 힘들다고. 화유는 불평이 많다며 시범을 보일 터이니 기다리라 하였다. 그 날 미처 다 완성하지 못한 것을 분명 건네주었을 것이다. 화유가 이환에게 보여주겠다 약속을 하고 보여주지 않은 것은 그 뿐이었으니. 모란이 수명을 다하여 본당 뒷산 땅에 묻어주던 때에 화유가 건넨 그림 함께 묻어주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흙에 조각조각 잘린 추억도 함께 묻혔다. 혹여 넘칠까 염려하였는데, 그 정도 크기의 땅이면 충분했다. 허무하기도 하였다. 전부 그러모은 것이 이렇게 볼품없이 작았던가. 이리도.
이환은 밤의 화원을 거닐었다. 본당에서도, 서녘의 별궁에서도 떨어진 곳이라 한산하다 못해 적막하였다. 겨울에만 피는 꽃나무들이 양 옆으로 서서 굽은 길을 만들어냈다. 땅과 못이 얼지 않도록 곳곳에 온등이 매달려 있었다. 온등을 따라 걸었다. 화원의 중심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과연. 도착한 화원의 심장부에는 노란 납매가 피어 있었다. 이환은 꽃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섯 개 모두 굳게 여문 손끝이 여린 꽃잎에 닿았다. 무엇인가 닿았다는 감각만 설피 존재했다. 손을 금방 떼어 냈다. 그 꽃망울 틔운 여린 것이 상할까 싶어서.
“오늘은 꽃구경인가요?”
이환이 몸을 돌렸다. 열 보 떨어진 곳에 례분이 서 있었다.
“매번 그런 표정이네요.”
희디 흰 검지가 아시라의 신관을 가리키고 나붓하게 웃는다. 말이 없던 이환은 기시감을 느끼고 얼굴이 굳었다. 저 봐. 또 저런 표정이지요. 당신은 제가 싫은가요, 신관님? 아니면― 례분이 문장의 끝을 길게 늘였다. 한 발, 다가왔으나 이환은 움직일 수 없었다. 꼭 제가 밟고 선 땅이 발목을 단단히 잡아챈 것 같았다. 두 발, 세 발. 화유가 아닌 례분이 가까워 올수록 이질적인 것이 목을 죄인다. 숨이 턱 막혔다.
“저 때문에 무엇이 견디기 어려운가요?”
“…… 아니다.”
“허면요?”
드디어 듣는 상대의 목소리에 례분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긴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며 물었다. 눈길이 잠깐 머리끈에 닿았다. 검은 비단끈. 석류석과 호박, 녹주옥 조각이 알알이 박힌 것. 제가 마음대로 쥐여 준 것이다. 하여간 무르기가 그지없다. 저런 것 그냥 버리고 아랑이든 궁인이든 아랫사람을 시켜 새로 하나 사왔으면 되었음을. 그깟 머리끈이 무어란 말인가. 저리 모든 것에 일일이 얽매이니 도망치는 와중에도 제 스스로 목을 졸라매는 꼴이다. 례분은 그런 것이 싫었다. 저 보아라. 참으로 미련하지 않느냐. 입가에 만연히 걸어두었던 웃음을 찰나에 거두었다.
“이환.”
신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저도 모르게 반 보를 물러났을 때, 제가 휘말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검집 위에 손이 간다. 그 다부진 손등에 타인의 창백한 손이 얹혔다. 단지 얹혔을 따름이나 시간이 오롯하게 정지하였다. 고요한 쪽빛 한 쌍이 가까웠다. 차게 식은 손으로 이환의 뒷목을 달래듯 쓸어내렸다. 시선이 속절없이 떨어지고, 긴 속눈썹이 쓸쓸한 그늘을 드리운다. 례분의 이마가 이환의 어깨에 툭, 닿았다. 제게서 떼어내기 위해 례분의 팔뚝을 붙잡았을 이환의 손이 돌연 멈추었다.
“거 봐라.”
―거 봐라.
이환의 두 눈이 혼란으로 흔들렸다.
“그냥 두나 이렇게 오나 같잖으냐.”
―그냥 두나 이렇게 들고 오나 같잖으냐. 그럴 거였으면 네 그림이나 챙기지 그랬어.
손가락이 금을 연주하듯 간질이는 뒷덜미를 타고 온 한기가 짙어진다. 얼음장 같았다.
“…… 여전히 알기 쉽구나.”
례분의 얼굴이 슬쩍 들린다. 웃음기가 어려 있던 우미한 입술이 벌어지고, 목선에 이를 세웠다. 삶을 취하고자 하는 이는 망설임 없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뒤늦게 이환이 큭, 하고 신음한다. 입 안으로 피가 엉겨왔다. 한 번에 구미를 당기는 맛은 아니었다. 해갈에 매달리는 입술과 혀에 달고 은은한 향이 스몄다. 감겨있던 눈이 열리고 쪽빛이 얼마간 머물렀다. 례분은 이환이 저를 밀쳐낼 때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피로 물든 입술을 먼저 조심스레 떼어냈다. 허나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례분의 팔뚝을 꽉 틀어쥐는데 그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대신에,
“야!!”
례분은 등 전체에 예상치 못한 커다란 통증을 느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환의 손이 반사적으로 휘청이는 례분을 붙잡았다. 례분은 그것을 밀어냈다.
“너. 다음번엔 목을 잘라 줄 거야.”
여한은 검끝으로 례분을 가리켰다. 아마 멀리서부터 보고 달려온 듯 했다. 당주의 안위를 생각해 의도적으로 검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검이 들리지 않은 다른 손에는 백무를 상징하는 흰 불꽃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도련니이이임. 그 뒤를 따라 달려온 발라 하나가 외쳤다. 닥쳐. 여한이 여지없이 싸늘하게 답했다. 발라는 입을 비죽이며 그대로 멈춘다. 례분은 분노 가득한 여한을 향해 마지막까지 방긋 웃어주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너.”
여한은 아직까지 얼빠진 얼굴을 한 이환의 얼굴을 힘껏 후려갈겼다.
“네 몸은 너 하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거 자꾸 잊어버리지.”
“…… …….”
부어오른 쪽에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상대가 비틀거린다.
“계속 멍청한 짓 하면 다른 놈이 죽이기 전에 내 손에 뒈질 줄 알아라.”
“…… …….”
알았어? 저를 쳐다보는 이의 목에서 흐르는 핏물이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지극히 차분한 어조로 쏘아붙인 여한은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화원을 빠져나갔다. 현운이 그 뒤를 따랐다. 도련님. 도련님. 손을. 작은 주먹이 역시나 벌겋다. 현운은 사족을 더 붙이지 않고 천으로 여한의 손을 싸맸다. 여한은 다만 가자, 하고 현운을 채근하였다. 동백에 둘러싸인 납매나무 아래 멀거니 서 있는 이환에게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었다.
“…… …….”
이환은 뜨끈한 열이 몰려오는 목에 손을 대었다. 손바닥에 적잖은 피가 묻어나왔다.
침묵이 물러앉았다.
뺨을 타고 기어오르는 환각을 쳐내려 눈이 질끈 감겼다.
향 없는 동백이 그 발치에 제 꽃을 하나 더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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