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 홍, 진유.

커뮤로그 2018. 1. 28. 20:43

170104 홍, 진유.




   이홍理灴의 아비는 이운理熉이다. 이운은 아시라가 인간과 동침해 낳은 마지막 아들이었다. 그는, 아시라의 네 자식들 중에서 그 신성이 가장 굳건하였으므로 초대 당주가 되었다. 한동안 모든 것이 천신과 아시라의 가호 아래 평안하였다. 하지만 어느 날, 이운은 저주된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발라의 땅에서 추방된 여자와 천년가약을 맺었다. 여자의 이름은 여라麗蓏. 당주의 행방이 묘연하였던 일곱이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밑에서 이홍이 태어난 것이다. 당주의 갑작스러운 일탈됨은 정말 당연하게도, 노장들의 커다란 반발을 샀다. 하필이면 그런 상대라니. 당주께서는 부디 일족을 살피시오. 이홍의 어미는 노장들이 당주를 찾을 때마다 난색을 보이며 아직 젖먹이에 불과했던 이홍을 품에 끌어안았다. 품에서는 천리향의 냄새가 났다. 그것이 어미에 대한 희미한 기억의 전부였다. 그 맑은 흑자색 눈과 함께.

 

   이홍이 열네 살 되던 해에, 아비는 어미와 떠났다. 당주된 자로 더 이상 일족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홍은 남겨졌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는 뻔한 말 덕분이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고 든든히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부모의 상실은, 사실 그렇게까지 이홍에게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저 휴일에 들를 곳이 하나 적어진 것뿐이었다. 어차피 태어난 이래로 이홍을 보는 눈길은 단 한 번도 곱지 않았으며 무지가 만들어낸 공포에서 유래한 뒷말은 여전했다. 이홍은 그것들에게 참으로 한결같이, 여지를, 스며들 곳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이홍의 녹색 눈은 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백무. 타고난 신성은 그를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머지않아 누군가 불의 선택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홍의 아비, 초대 당주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당주가 머무는 내실을 벗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일개 신관생도였던 이홍은 당주의 얼굴을 한 달 뒤에나 있을 큰 제례에서 뵐 수 있겠구나, 짐작했다. 때문에 새 당주가 생도들이 머무는 학관을 방문한다는 말을 듣자 그 얼음장 같던 얼굴이 조금은 동요하였다. 학관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본 것은 단정히 묶은 다색茶色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보다 연한 빛깔의, 이채가 감도는 눈. 새 당주는 진유眞燸라 했다. 몇 안 되는 백무인 탓일까. 타인의 특징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홍에게도 얼핏 그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성정이 퍽 선하고 만인에게 다정한 여자였다.

 

   네가 홍이로구나.

 

   성씨가 드문 아시라의 일족이었으나 이홍은 종종 오해를 받았다. 이홍이라 합니다. 나직하게 답하자 진유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내 알고 있다. 내가 홍이라 부르는 것이 불편한 게로구나. 이홍은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천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올해로 팔백오십 해를 살아온 당주는 인간이라면 스물 중후반으로 보였을 법한 젊은 외견이었다. 이홍은 그에 비해 한참 어렸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언니, 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을까. 답지 않게 괜한 생각이었다.

 

   네가 환이고.

 

   이홍은 진유가 다가선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제 옆인지, 뒤인지 대중없이 선 이는 어미를 닮아 저와 같은 어둡고 붉은 머리카락을 하였지만 그 눈이 달리 밝은 호박색이다. 당주께 예를 제대로 갖추거라. 이홍은 무어라 답이 없는 동생을 향해 차갑게 일렀다. 이홍과 한날한시에 태어난 동생이었다. 남아였고, 이름은 이환理煥이라. 어느 자리에서든 먼저 나서기를 꺼리는 자였다. 신장도 한 뼘은 더 작아 이홍과 이환이 쌍생이라는 것을 말하기에 앞서 눈치 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동생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 겨우 이환이라 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진유는 일족과 무간히 지내고자 했다. 항시 예와 위엄을 중시하였던 초대 당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 주, 또는 걸러 한 주의 끝자락이면 어김없이 아랑들 몇을 대동하고 생도들을 찾았다. 그리고는 생도들의 손에 유과며 강정을 하나씩 쥐어주는 것이다. 모자랄까 싶어 아랑들의 손을 넘어 직접 들기도 했다. 개인의 식습을 엄히 다스리는 편도 아니고, 그러한 것들을 마음먹고자 하면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신관생도들이었으나 당주가 주는 것은 아무래도 특별한 취급이었다. 이홍은 입이 단 음식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이 제 몫으로 받은 것을 먹지 않고 있으면 이리 주어라, 하여 대신 먹었다. 어미와 아비를 제하고, 누군가 이홍에게 선뜻 무엇을 건넨 것은 진유가 처음이었다.

 

   일편, 선대 당주는 다른 이에게 비할 바 없이 유능하였으므로 진유는 태도부터 신성자질까지 모든 면에서 자연히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자기수련을 하느라 바쁜 신관생도에게까지 그 말이 하나 둘 들려올 정도이니 실제 윗선에서는 어떠하였을지 이홍은 가늠키 어려웠다. 진유가 다시 학관을 방문하자 이홍은,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라 하였다. 앞뒤 없이 꺼낸 말이란 것을 뒤늦게야 깨닫고 뺨을 붉혔다. 세세히 알지 못하는 처지에 필시 무례하게 들렸으리라. 진유는 그런 이홍을 탓하거나 무안을 주지 않고,

 

   고맙구나. 내 힘이 되었다.

 

   라 답했다.

 

 

 

* * *

 

 

 

 

   당주님, 당주님. 이것 보십시오. 새로운 진입니다.

   과연. 네 특별한 재능이 있구나, 환아.

 

   이홍은 제 쌍생이 저의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이홍이 웃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고운 꽃을 보아도, 절륜한 무구를 보아도 고고한 낯은 변하지 않았다. 미소는커녕 다른 감정이 깃들기를 고대하는 또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것이 이홍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여지를 주지 않는 것. 심지어 하나 뿐인 동생에게마저 그러했다.

 

   어떤 날인가, 그런 이홍에게 진유는 금불초였다. 안개가 드리운 회색질의 벌판에 핀 노란 꽃. 아무 것도 없는 언 땅에 유일하게 색채를 머금은 것이었다. 언제 싹을 틔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잘 하였다 칭찬하였을 적인지, 네 마음이 강하구나 인정받았을 적인지, 수련을 하느라 흐트러진 수식을 고쳐주었을 적인지, 은도에 손수 진언을 새겨 돌려주었을 적인지, 홍아, 오늘 네 눈을 닮은 순이 뒤뜰에 텄더구나, 했을 적인지. 금불초의 색은 비록 번지지 않았으나 그곳에 모였다. 그리하여 지지 않는 한 송이가 되었다.

 

   제 누이가 잔잔하게나마 웃음을 띤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지켜보는 이환은, 그랬다. 저는 물론, 아무도 주지 못했던 것을 이홍에게 나누어 준 진유가 고마웠다. 나누어 줄 수 있었던 진유가 대단해 보였다. 저는 그런 이가 되지 못하였으나 그것으로 족했다. 이환이 당주 진유를 잘 따를 수밖에 없는, 가장 간단한 이유였다. 허나 영리한 이홍은 알지 못하였다. 단지 진유가 피붙이 없는 저와 동생을 잘 달래어 주었으며 여태 누구도 그리한 자가 없었으니 동생이 마음을 쉬이 열어 그러할 것이라 여겼다.

 

   누이에 비하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홍은 매 굳이 숙이는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홍의 시점으로, 이환은 충분히 제 몫을 능히 해낼 수 있었으나 늘상 무력하였다. 그 또한 백무였다. 저와 같은 천조신 아시라의 직계였다. 그 자체로 충분히 다른 이에 비해 떨어짐 없이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법 했다. 심지어 나름대로 재능이 출중하다. 대체 주눅들 것이 무어란 말인가. 저와 동등해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래 전 부러 저러는 것인가 싶어 따끔하게 충고를 해보았으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에 기운이 빠져 그만두었다. 결국, 성정이 그런 것이다. 타고난 기질이 선하지만 약함에 그쳐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자 함이다. 맞서거나, 갖거나, 따지거나, 감히 책임을 질 여력은 없으니 무엇이든 먼저 내주고, 감수하고, 참 미련하게도 본인의 부족함만을 탓하다 스스로 그것을 견디지 못해 회피하고 만다. 게다가 기껏 바란다는 게 어디에 쓸 곳도 없는 제 누이의 웃는 낯이다.

 

   네 당주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는 것이 먼저니라.

 

   한 번도 동생을 환아, 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동생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바라보는 이홍은 미약했던 미소를 거두고 평소의 싸늘한 얼굴을 하였다. 진유의 따스한 손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야 이홍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홍아. 너는 네 아우를 항상 염려하는 것 같구나. 그것도 아주 엄해.

 

   이홍은 웃음기 어린 진유의 말에 선뜻 입술을 떼기 어려웠다. 글쎄, 성품이 그럴지언정 삶은 동생의 몫이다. 동생의 성정이 그렇다는 것을 안 이상 개입은 어디까지나 논외이다.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조언은 조언에 그친다. 이환은 혹 다를지 모르나, 속에 무엇을 품었든 저는 저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단독자로서 나아가면 될 일. 때문에 이홍은 그렇습니까, 하고 말았다.

 

   먹고 싶은 것은 없느냐. 다음에 꼭 챙겨오겠다.

 

   굳이 소망이라 한다면 이홍은 진유의 다음 대를 이어 당주가 되고 싶었다.

 

 

 

* * *

 

 

 

   일족의 당주란 자리는 신이 간택하는 것이었다.

   일족을 이끌기에 가장 적당한 자. 혹은 그 숙명을 짊어져야만 하는 자.

 

   당주가 손수 돌보아야 하는 본당의 화로에는 아시라가 일족에게 하사한 최초의 불꽃이 타오른다. 모든 신성의 근원이 되는 그 불이 잦아들면 아시라의 무한한 가호 또한 유한하게 변모할 것이라 전해져왔다. 이는 생도들이 익히는 신학서의 첫 장에 명시되어 있는 바이니 모르는 일족은 없었다.

 

   최초의 불꽃이 형형한 화로에 손을 넣으면 보통은 아무런 열기를 느낄 수 없었으나 일족의 당주는 그 불에 직접 손을 댈 수 없는 유일한 자였다. 오직 그 불만은 쉬이 다루지 못하였다. 아시라의 뜻은 알 수 없었다. 신을 섬기는 일에 항상 겸손하며 오만하지 말 것을 이르는 것이라 하는 가르침도 있었고, 네 가장 무거운 것을 안고 있다는 것을 신께서 알고 위로하는 것이라 하는 가르침도 있었다.

 

   임관식이 거행되던 날, 백자에 본당의 화로에서 온 불씨를 담아주는 진유의 손에는 그을음이 묻은 흰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매를 받는 버렁 외에, 다른 것이 그 손을 감싼 것은 처음 보았다. 불씨가 위태롭게 일렁이는 백자를 받아들며 이홍은 잔잔한 목소리로 생도 이홍은 천명을 받듭니다, 라 읊었다. 생도 이홍이 신관 이홍이 되었음을 당주 진유가 천조신 아시라를 대신하여 증언하노라. 진유는 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백자는 차게 식어있었다. 이리 뜨겁게만 보이는 불꽃이거늘. 이홍은 불씨를 받아들고 그날로 짐을 꾸려 천백으로 올라갔다.

 

   한동안은 천백의 한 골에서 홀로 신당을 돌보며 지냈다. 소요素燿라 이름붙인 귀한 옥해청玉海靑도 그때 길들였다. 이홍의 신당 주변에는 마물은 제쳐두고 인적이 매우 드물어 산을 넘는 이들이 무사를 기원하고자 찾는 것이 고작으로, 소요가 가끔 물고 오는 본당의 소식이나 진유의 서신이 접할 수 있는 소식의 전부가 되었다.

 

   이홍은 동생이 보낸 서신을 눈으로 읽으며 미간을 좁혔다. 필체는 수려하였으나 그 점이나 획이 대부분 틀려있으니 이 아이 아직도 그 자들을 핑계로 서책을 읽기 싫어하는 것이 틀림없구나. 소위 일족의어른이라고 하는 자들을, 동생은 몹시 꺼려했다. 저와 제 누이를 곱잖게 대했다는 이유일까. 완전한 악심은 품지 못해 그들을 상대로 택한 것이 문을 멀리하는 것이라니. . 이홍은 혀를 찼다. 아시라께서 이환을 본당에 두지 아니했더라면 혹여 멈추었을지도. 어쨌든 이 또한, 필경 도망치려는 것이로다.

 

   반면에 진유의 서신은 흠잡을 데 없이 정갈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을 확인한 이홍의 눈은 크게 뜨였다.

 

   도성을 침략한 마물들의 엄청난 수와 참혹한 현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홍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 소요야. 식경 전 도착한 것 내 알고 있으나 떠날 시간이다. 신당을 돌보는 아랑이 따로 두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발라. 발라라니. 그 타락한 존재들이. 응답하듯 흰 매가 날개를 퍼덕였다. 네 먼저 산을 넘어 이환에게 돌아가거라. 당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전쟁이었다.

   이홍이 사백십구 세 되던 해 벌어진 일이다.

 

 

 

* * *

 

 

 

 

   가시면 안 됩니다.

   홍아.

 

   너무 위험합니다, 당주.

   그래. 당주이니 마땅히 가야 하는 것이다.

   ―…… …….

 

   그곳엔 네 동생도 있지 않니.

 

 

 

* * *

 

 

 

   진유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타락한 발라가 전선을 뚫고 동궁 앞까지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거대한 화로를 당장 옮길 수는 없으니 급히 결계를 더하기 위해 무심코 잡은 화로가 뜨겁지 않았다. 때마침 암담할 것이 뻔한 소식을 전하려 달려와 숨이 채 가라앉지 않은 이홍이 할 말을 전부 잃은 채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한참 만에 나온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진유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궁으로 가자. 일족을 도와야 하니. 이홍은 정지한 사고를 억지로 움직여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전세가 혼란하게 뒤바뀌어 발라들 중 몇 무리가 후문으로 진입을 시도하매 피가 역류하며 끓는 소리를 내는 발라의 가슴에 마지막으로 창을 관통시킨 진유가 본당으로 서둘러 되돌아와 이홍과 함께 찾아낸 것은 이환이었다.

 

   불이 옮겨져 식은 화로가 있는 본당의 실을 한참이나 지나친 창고에서였다. 이환과, 주변에 널린 몇몇 일족의 시체와, 최초의 불. 작지만 찬란하게 타오르는 홍염이었다. 그리고 그 불은, 원래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허름한 병에 담겨 있었다. 반쯤 넋을 놓은 이환의 손은, 본능적으로 잿더미를 헤쳐내고 불의 근원을 찾아 맨손으로 옮기느라 피부가 다 짓무르도록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것을 본 진유는 자신의 죽음과, 자신이 누군가의 숙명을 목도했음을 기어이 확신했으며,

 

   전부, 지킬 수가,

 

   이홍은 동생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릴 만큼 차분하다고, 생각했다.

 

   없어서.

 

   그 이지러진 눈가에는 눈물과 피가 말라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검신까지 전부 흑색인 외날검을 쥔 손에서 끈적하게 진물이 배어났다. 붉은 살점이 묻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다른 손으로 최초의, 영원히 타오르는 불이 담긴 병을 진유에게 내밀었다. 이홍은 그것을 가로막아 대신 낚아챘다. 뜨겁지 않았다. 이홍에게는 그 잔인한 열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두 눈동자가 심히 떨리고 있었다. 이환은 제 누이의 동요를 주저앉아 멍하게 응시하였다.

 

   환아. 진유의 다정한 음색이 이환을 불렀다. 그것을 신호로 억눌렀던 맑은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전부 지키고 싶었어요. 몇은 제게 그것을 들고 어서 어디로든 피하라 하였고, 몇은 제게 도와 달라 하였습니다. 헌데, 무엇이 우선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항의라도 하듯 이환은 생전 처음으로 악을 썼다. 당장 눈앞에서 내게 손을 뻗으며 하나하나 살해당하는 이들보다 이 따위 불덩이의 안위가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는 게 너무. 한바탕 고함을 지르고 나서 지쳐 고개를 떨구었다. 쏟아지는 무력함. 맑은 핏물이 옆머리를 타고 흘렀다. 침묵이 홀로 늘어졌다.

 

   다 괜찮다. 애썼느니라. 진유는 흩어질 것처럼 느지막이 답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침내 이홍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입을 열었다. 당주 진유는 당주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으며, 물러날만한 부덕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심지어 지금은 타락한 마물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당장 본당 앞으로만 나아가도 발라를 힘겹게 대적하는 아시라의 일족들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다. 현명한 아시라께서 그것을 모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 시점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당주의 승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시라께서 내게 새 일을 부여하신 게로구나.

   ―…… …….

 

   아주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느니라.

 

   그 기회란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홍의 질문에 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이홍은, 감히 자신이 추측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단 한 번도 대면한 현실을 부정한 적이 없어 더욱 간절했다. 기절한 이환의 손을 살피던 진유가 허리에서 물을 꺼내 상처를 깨끗하게 씻기고 열을 식히는 약을 발라주었다. 당주. 진유가 돌아보는 것에 이홍은 안심했다. 진유는 가볍게 손짓하여 이홍을 제 옆에 앉혔다. 흙과 피가 너절한 바닥이었으나 둘 모두 망설이지 않았다.

 

   홍아.

   .

 

   팔월의 취래화에 가보았니.

   풍경놀이에는 취미가 없어 가본 적 없습니다.

 

   그렇구나.

 

   진유는 이환의 손을 마저 추슬러주고 거두었다.

 

   다음에 꼭 가보렴.

 

   팔월의 취래화에는 금불초가 피었다.

 

 

 

* * *

 

 

 

   진유는 모든 것을 끌어안고 죽었다. 그것에는 일족을 향한 헌신과, 일족이 돌려 준 평판과, 비교와, 신께서 주신 가호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몇몇 덜 행복하고 더 행복한 기억이 있으리라 이홍은 멋대로 생각했다. 나무로 된 작은 함을 닫고 보를 쌌다. 매듭을 짓는 것이 마치 정성들여 누군가의 머리를 빗기는 손짓처럼 보였다. 이홍은 옆으로 흘러내리는 제 머리카락을 귓바퀴를 따라 넘겼다. 환아. 네 거동을 할 수 있다면 이것을 도와다오. 햇살이 드는 창가 아래에 앉아있던 이홍의 아우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가왔다. 천으로 만든 매듭 위에 연한 철사를 감았다. 철사의 끝에는 노란 꽃이 달려있었다. 장식으로 쓰기에 어딘가 실하지 못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었으나 이홍은 상관치 않았다. 그는 동생의 두 손을 둘둘 감은 흰 천에 눈길을 주었다. 얼룩이 덜한 것을 보아 이제 진물은 멎은 듯 했다.

 

   “환아.”

 

   이홍은 매듭을 당겨주는 이를 환아, 하고 불렀다.

 

   “. 누님.”

 

   쌍생이었으니 존대를 그만둘 만도 하건만, 한결같았다.

 

   “네 그림은 적당히 그리는 것을 잊지 마라.”

 

   이홍의 말은 끝나지 않은 전시라는 사실을 잊은 것만 같았다.

 

   “끼니는 거르지 말되,”

   “…… …….”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아우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덧붙였다.

 

   “당주의 가르침을 항상 새기면서,”

 

   이홍에게 당주는 진유였다.

 

   “몸과 마음가짐을 항시 정갈하게 하고,”

 

   철사가 두어 번 더 돌았다.

 

   “책은 하루에 한 권은 꼭,”

   “싫습니다.”

 

   이홍은 장식을 마무리 지었다. 불안해 보이는 이환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녹안은 늪처럼 깊었다. 이환은 제 누이의 시선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이홍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보의 주름을 어여쁘게 정돈하였다. 책은 하루에 한 권은 꼭, 읽도록 하여라. 동생이 잘라냈던 말을 건조하게 이어 붙였다. 이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네 일족의 어르신들을 정말로 척지려는 것이 아니려거든 그리 하는 것이 좋을 게야. 흔들림 없이 건네는 문장이었다.

 

   “네 당주께 은혜 입은 것을 스스로 해하지 말거라.”

 

   아우에게도 진유는 특별하였다. 이홍은 함을 이환에게 건넸다.

 

   “소요에 대하여 적은 것이다. 환이 네가 돌보지 아니할 것을 알고 있으니 적당히 좋은 사람에게 주어라.”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 …….”

   “내 알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이환의 옆을 지나쳐 검을 챙겼다. 온통 흑색인 이환의 검과는 달리 검신과 검집이 모두 새하얀 검이었다. 이홍은 등 뒤에서 이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히 알고 있었으나 구태여 돌아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어느덧 이환은 이홍보다 한 뼘이 더 커져 있었다. 검집에서 검을 빼 날이 상한 곳은 없는지 살폈다. 검날을 따라 선득한 예기가 파르스름하게 돌았다.

 

   “신의 가르침은 항상 마음에 새기거라.”

 

   “가지 마십시오.”

   “너는 나의 아우이며 쌍생이지만 그게 이유는 되지 못한다.”

 

   모르지 않을 터. 아니면 이제 와 떼를 쓰는 것이냐. 그리 말하는 이홍은 이환이 기억하는 대부분의 이홍이었다.

 

   “못 찾아오실 겁니다.”

 

   진유의 시신을 가리켜 말했다. 이환은 울듯한 얼굴이다.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홍은 숨을 고른다.

 

   “내가 찾아뵙는 게지.”

 

 

 

* * *

 

 

 

   과거. 혹은 잔재.

 

   , 가을 아스라이 사라진다. 누이는 돌아오지 못했다. 최소한의 계승의식조차 치르지 못한 이환의 안위와 부상을 걱정하여 실제로는 텅 빈 화로를 지키는 양 발라를 끌어들인 진유가 신성력 전부와 목숨을 대가로 도성 전체에 파마의 결계진을 쳤고, 그 시신을 되찾으러 홀로 전장에 깊이 진입한 이홍은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발라를 모두 몰아낸 후에, 이환은 자신의 누이가 진유의 곁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환은 사백이십 세에 당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운과 진유에 비해 한참이나 어린 나이었다. 좋지 못한 파란이 일었다. 그러나 삼백년이 더 흐른 이 시기까지도 골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이환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멀리서 매 울음이 들렸다. 소요, 누이가 이름을 붙여 아끼던 흰 북극매가 근처 가지에 내렸다. 그 발톱이 매섭다. 어제는 찬바람이 유난했다. 눈이 오려나. 천백에서 온 소요가 기뻐할 것이다.

 

   주위에 소나무가 들어선 평평한 바위에 앉아 궁을 물끄러미 보았다. 동궁이 훤히 보이는 자리이니 본당도 마찬가지였다. 수학시간이 막 끝이 났는지 학관과 기숙사관에서 신관생도들이 두셋 씩 짝을 지어 쏟아져 나왔다. 당주는, 제가 기억하는 누이의 시선을 좇아 있었다. 또한 진유의 시선이 섞여있었다. 이환의 시선은, 가장 밑에 머물렀다.

 

   생도 중 하나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이환의 호박색 눈이 호를 그리며 접혔다. 안녕.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손을 반갑게 흔들었다. 본당 뒤 바위에 앉은 당주를 발견하고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던 생도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제 또래 무리를 따라 뜀박질을 한다. 그 때,

 

 

   환아.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환아.

 

   또 다른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부채처럼 쌓여만 가는 환각에, 홀로 남은 이환이 눈을 질끈 감아 시야를 몰아냈다. 긴 한숨이 유일하게 저를 고요와 적막으로 인도할 길임을, 알았다. 날아오른 소요가 먼 하늘에서 원을 그렸다. 백색의 검집을 저도 모르게 움켰다. 각진 손마디가 붉어진다. 이내,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렇게 현실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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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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