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08 TRICK (with. 에브닉)
그러고 보니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안카르 백작부인이 총애하며 기르던 영리한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고 하죠. 몸은 까맣고, 눈도 까맣고. 이름은 로렐이라던가, 하여튼 그런 고양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정숙한 백작부인이 소임을 다하지 않은 늙은 하인 하나를 꾸중했더니 그 괘씸한 하인이 앙심을 품고 레이디 로렐을 깊은 산 속 어딘가에 버려둔 채 혼자 돌아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인이 집에 돌아오자 레이디 로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난롯가에 앉아 있었죠.
“발 빠른 고양이네. 아니면 산길을 하인보다 더 잘 알았던가.”
에브닉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이드는 새하얀 여인의 조각상 위로 팔을 뻗었다. 여인의 눈동자에는 영롱한 은구슬이 박혀있었다. 그것을 빼내자 즉시 붉은 핏물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제이드는 물감이 묻은 은구슬을 낡은 커튼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뭐 그랬을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하인은 다음 날, 가엾은 레이디 로렐을 언 강가에 두고 도망쳤죠. 주인의 죄 없는 고양이가 얼어 죽기를 바라면서요.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또 한 번, 그 고양이는 하인보다 먼저 돌아와 백작부인의 침대 위에 멀쩡하게 앉아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는 손바닥 위에 올린 은구슬들을 세어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끝까지 분노한 하인은 불쌍한 레이디 로렐을 두꺼운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그랬나 봅니다. 그리고 레이디 로렐의 작은 시체를 숨기기 위해 지하 창고의 움푹 팬 벽 안에 그것을 넣고 벽을 채웠습니다. 아무도 발견할 수 없게 말입니다. 하인은 이번에야말로 그 건방진 고양이를 어딘가에 버려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죽였으니 홀연히 다시 나타나는 일도 없을 것이고, 틀림없이 이 고택에 백작부인의 슬픈 울음소리가 울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인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저녁 늦게야 고양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 백작부인은 예상대로 매우 슬퍼했습니다. 기분이 몹시 좋아져서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다고― 제이드 라누아는 뽀얗게 먼지가 얹은 잔을 우아하게 집어 들어 정말로 술을 권하듯이 뚱한 얼굴을 한 에브닉 셀레비스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에브닉이 잔을 받아들지 않자 도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부엌 안쪽에 난 문을 통해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끼이익. 끼이익. 계단을 밟을 때마다 불길한 소리가 났다. 이야기는 계속됐다.
――마음먹고, 부엌으로 돌아와 술병을 막은 마개를 뜯었을 때 하인은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새 나타난 고양이 한 마리가 하인의 다리에 머리를 부볐던 것이죠. 게다가 그 고양이는 누구처럼 털도 검고, 눈도 검고, 그렇습니다. 하인이 잔인하게 살해한 레이디 로렐이었죠. 소스라치게 놀란 하인은 얼른 뒷걸음질을 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그 때 레이디 로렐의 눈이 붉게 빛났습니다. 날카롭게 울부짖는 고양이는 마치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 흐음. 네. 결국 다음 날, 부엌에서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하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고양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요. 그 후로부터 저택에는 붉은 눈을 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지금껏 돌아다닌다고 하죠. 새벽이면 고양이 울음소리도 가끔 들리고. 왠지 울퉁불퉁한 지하창고 벽 표면에 제이드가 손을 올렸다.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쯤이 아니겠습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로렐의 무덤이.
손끝으로 벽을 찬찬히 더듬던 제이드는 에브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쌍의 눈이 밝게 빛난다. 공자님이 제의하신대로 은구슬을 몇 개 더 찾겠다며 굳이 이곳까지 들어왔다. 결정되자마자 제일 먼저 고른 장소가 이런 데라니. 아무리 그래도 왕녀의 시녀들이 빛조차 삼켜버리는 이런 으스스하고 누추한 곳까지 왔을 것 같진 않았다. 그 근거로, 요충지에 배치된 양초를 이곳에서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에브닉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어쨌든,
“다 소문일 뿐이―”
지, 라고 단정하려는 순간 에브닉은 제 눈을 의심했다. 어두컴컴한 공간이긴 했으나 분명히 부드러운 촉감도 느껴졌고, 아무튼, 웬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에브닉의 다리 사이를 불쑥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하필이면 때마침 제이드는 재차 고개를 돌리고 창고 벽을 살피던 기가 막힌 시점이었기 때문에 본 사람은 에브닉 뿐이었다. 고양이는 소리 없는 발걸음과 함께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사라진 고양이가 붉은 눈이었는지는 미처 보지 못했다. 뭡니까. 제이드가 얼어버린 에브닉을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에브닉은 고개를 필사적으로 휘휘 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까? 그가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응.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야기는 없어? 재미있는 걸로.”
다른 이야기라. 일단 여기서 나가도록 하죠. 여기에 구슬은 없는 것 같네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눌어붙은 희미한 양초 불빛이 그렇게 밝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또 엉뚱한 곳으로 향하려던 제이드를 에브닉이 이끌어주었다. 그런 덴 없을 게 뻔하잖아. 제이드는 더없이 아쉬운 표정으로 에브닉의 뒤를 따랐다. 왜요. 있을 지도 모르잖습, 시끄러워.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안카르 백작이 총애하며 기르던 영리한 개 한 마리가 있었다고 하죠. 설렁설렁 끌려가던 제이드가 뜬금없이 입을 뗐다. 몸은 까맣고, 눈도 까맣고. 이름은 잭이라던가, 하여튼 그런 개가 있었는데― 백작 부부가 쌍으로 동물 애호가였나 보군. 에브닉이 퉁명스레 지적했다. 그런가 봅니다. 아무튼, 백작이 말년이 되어 지방으로 요양을 가게 되는 횟수가 잦아졌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잭은 백작을 충성스럽게 기다렸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저택에 돌아오기만을요. 하지만 점점 횟수에 비례해 기간도 길어졌고 주인을 기다리는 잭이 식음을 전폐한 채 하루를 보내는 날들도 많아졌습니다. 에브닉과 하인들이 쓰던 방에 들어간 제이드는 하마터면 지나칠 뻔 했던 은구슬을 알아보고 챙겼다.
“듣고 계시는 거죠? 이야기 해달라고 하신 분은 공자님이십니다.”
“듣고 있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요구했더니 으스스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퍽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충견의 이야기라. 정작 그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은구슬을 이리저리 살폈다. 에브닉은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았다. 머리 뒤의 깃털 두 개가 흔들린다. 까마귀란, 반짝이는 것만 보면 그저 좋아서.
“저기, 이거 나중에 몇 개 챙길 수 있을까요?”
“꿈 깨라. 제이드 라누아.”
시무룩하게 어깨를 내린 제이드는 방의 반대편으로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백작은 별장으로 떠날 때마다 잭에게 말했습니다. ‘기다려’ 라고요. 기다려, 라는 게 충성스러운 잭에게 얼마나 무거운 문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말한 주인은 반드시 돌아왔으니 잭은 철썩 같이 믿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백작의 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았습니다. 본래는 길어야 일주일이었던 요양이 자그마치 석 달이 넘도록 길어지게 된 것이죠. 하인들이 총 동원되어 애썼으나 잭은 기어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억지로 먹이려는 하인을 물어버리기까지 하며 밥도 물도 거부하고 백작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웅크린 채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백작은 매우 걱정했습니다.
야옹.
어디선가 구슬픈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야옹. 에브닉의 걸음이 우뚝, 멈춘다. 괜스레 조금 전의 이야기가 구름처럼 마구 피어올라 커진다. 여전히 굳은 얼굴에 꾹 다물린 입술이었지만 멀찍이 감상하는 제이드에게는 그것이 얼핏 다르게 느껴졌다. 이윽고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잭을 위해 거동이 가능해지자마자 돌아가기로 결정했지요. 잭. 잭. 백작이 도착해서 본 것은 비쩍 마른 충견이었습니다. 오직 돌아올 주인만을 하루하루 기다리다가 아주 쇠해버린 모습이었어요. 오 세상에. 잭.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단다. 백작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지요. 주인을 알아본 잭은 꼬리를 힘없이 흔들면서 다가와―
“왜 이제야 돌아온 것이냐!!!”
“으아악!!”
하고, 말했답니다. 제이드는 싱긋 웃었다. 에브닉은 펄쩍 뛸 만큼 놀라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갑작스레 고막을 내려친 고함에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으하하하하하. 반면에 그는 허리를 접고 고택이 떠나가라 웃고 있었다. 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장면이었는가 하면, 눈가에 눈물이 절로 맺힐 정도였다. 에브닉, 에브닉 경. 아니. 아하하하. 으하하. 제대로 넋이 나간 에브닉의 동공이 떨렸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웃음을 못이기고 비틀비틀 가까이 다가온 제이드가 창백한 에브닉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쿡, 찔렀다. 오오. 이것 봐. 엄청 하얗네요, 공자님. 에브닉의 뺨이 다시 건강한 다갈색으로 물든 것은 그 때쯤이었다. 퍽. 그리고 말아쥔 주먹이 제이드를 자비 없이 후려쳤다. 악. 우당탕.
짜증나는 자식.
에브닉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두고 보자.
괜히 옆에 있던 쓰레기더미를 세게 걷어찼다. 야오옹. 어디서 또 고양이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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