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드] Distanz

커뮤로그 2018. 1. 28. 19:35

160814 Distanz (with. 에브닉)

 

 


   재수 없는 북부 촌놈. 허옇고, 실속 없고, 순 맹탕같이 생겨선. 에브닉은 씨근덕거리며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직도 목검으로 가격당한 손목이 얼얼했다. 어쩌면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에브닉 쪽도 마찬가지다. 자신도 그 놈의 어깨라든가, 배라든가, 밥맛 떨어지는 얼굴에 주먹이나 목검 따위를 근사하게 선사해 주었다.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아마 지금쯤 끙끙 앓고 있을 것이다. 꼴좋군. 피멍이 든 손목을 주물거리며 허공을 향해 비뚜름하게 웃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래. 결과적으로는 제가 먼저 쓰러지긴 했으나에브닉은 다시 인상을 사정없이 구겼다. 그래. 먼저 쓰러졌지. 꼴사납게. 모래바닥에 벌렁 드러누워서. 쓸데없이 햇살이 유달리 강했었다. 아아악.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사실 온몸이 다 비명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술 더 짜증나는 것은여기서 더 짜증이 치미는 점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혁신적으로 끝내주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에브닉 경. 일어나셨습니까.”

 

   의무실에 가다가 뒤늦은 현기증에머리를 맞아서인지기절한 자신을 데려온 게 하필, 저 자식이라는 점.

 

   “영원히 잠들어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자신의 인맥이란 게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되었나. 기사단저 한 가운데서 기절한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올 수 있었던 자가 세상에서 정말, 오직 저 놈 뿐이었단 말인가. 새삼 도저히 통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다른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설마 전부 다 무시하고 지나쳤다는 말인가. 에브닉은 괘씸함에 눈을 세모꼴로 떴다. 새카만 남자는 그 사이 제멋대로 꺼낸 것이 분명한 딸기 쇼트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든 채 은제 스푼을 입에 물고 있었다. 바라보던 에브닉이 흉하게 터진 입술을 느릿하게 열었다. 그래. 바람대로 되지 않아서 거 참 안됐네. 그렇지. 명백히 비꼬는 어조였다. 하지만 까마귀는, 제이드 라누아는, 제 가시 돋친 말에도 문간에 기대어 그저 웃었다. 이거 맛있네요. 어디서 사오셨습니까. 대신 멀리 떨어진 소리를 잘도 한다.

 

   “저 오늘 재밌는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 . 멋대로 불이 붙어버리는 발화. 저 남자의 특징이다. 에브닉은 관심이 없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한 쪽만 신겨져 있던 부츠를 벗어버리기로 했다. 오늘 우리 아들이 말입니다, 스트랩을 풀던 손길이 공중에서 딱 멈췄다. 아들. 그 괴상한 관계는 에브닉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미 기사단 전체에 소문이 난 상태다. 진짜 부자 관계는 아니었지만 제이드가 선뜻 아들이라고 지칭하는 단 한 명. 로열 글라디우스의아무튼, 저 자식의 빌어먹을 아들이 바로 에브닉의 심기를 거스른 주범이 아니던가. 아들과는 아침부터 서로 기꺼이 두들겨 패주고 온 살갑고 정다운 사이였다. 덕분에 이렇게 실려 왔고. 자연히 눈빛이 고울 리 없었다.

 

   “어떤 멍청이가 우리 아들에게 시비를 걸었는데,”

 

   제대로 갚아주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이겼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시비를 건 그 멍청이는 애꿎은 부츠를 방 한 켠에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당연하죠. 우리 아들이 질 리가 없잖습니까. 싸움도 참 잘해요. 기특하기는. 안 그렇습니까. 제이드는 에브닉이 걸터앉아있는 침대 옆 베드테이블에 크림만 조금 남은 접시를 올려놓고 어느덧 석양이 지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도 노을이 번져 붉게 물든다.

 

   에브닉은 상당히 고까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오늘 그런 멍청이가 있었지. 배배 꼬이고 뒤틀린 목소리에 금빛 눈 한 쌍이 이쪽을 향한다. 제 것보다는 조금 밝은 색이다. 아무래도 어디서 혼자 잔뜩 게으름을 피우느라 정작 사건의 현장은 못 본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때와 장소와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그런데 공자님은 어디서 그렇게 얻어맞으신 겁니까. 이래서야 공자님도 그 멍청이같잖아요. 이미 한참 늦은 질문이었다. 솔직히 그게 더 열받았다.

 

   “멍청이한테 몇 대 얻어맞으면 기분이 어떨까.”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까. 벌떡 일어난 에브닉은 뻐근한 목을 한 바퀴 돌리고 그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끌어 침대에 떠밀었다. 어라. 갑작스런 외압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는 사이 세게 밀리기까지 해 침대 위로 벌렁 넘어진 제이드는 살짝 당황한 얼굴이었다. 표정 봐라. 뒤늦게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다시 한 번 밀치고 배 위로 올라왔다. 아하하.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인지 그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제이드 라누아를 죽인다, 라고 진작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무어라 반응하지 않은 에브닉이 옷깃 옆으로 드러난 목덜미에 누구처럼 이를 세게 박았다. . 잠깐. 잠깐만요으윽. 들어줄 필요도 없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강하게 주면 좋게 봐주어서 턱이 빠질 것이다.

 

   두 사람에게 이런 행위는 서로를 탐닉한다거나, 쾌락을 좇는 의미가 아니었다. 깔아뭉개고, 제압해서, 그 때의 위치를 확인한다는 것에 보다 가까웠다. 짐승 같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다. 상대를 위한 배려가 담긴 행동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행위가 끝나고 나면 필연적으로 상처가 남았다. 몸 여기저기에 남은 상흔들이 증거들이었다. 어떻게든 반대편에 서 있는 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해 집착했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서로가 상징하는 것들을 동등하게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싹을 틔웠다. 어떠한 이는 과거로부터 온 모멸감, 고통, 탐욕과 좌절들을, 또 어떠한 이는 언젠가 내면에 존재했었던 거대한 두려움, 잡다하게 파생된 흑색 기억들과 무력감들을 양 손에 넘치도록 쥐고 있었다. 놓을 방법을 알지 못해 영원히 방황한다. 상대는 그것들의 집약체다. 그러다 막상 맞닿뜨리게 되었을 때, 실체 없는 기대감이 저며지고 불꽃이 튀고 마는 것이다.

 

   에브닉 셀레비스가 제이드 라누아를 제 아래에 둘 때는 움직일 수 없게 단단히 짓누르는 경우가 많았다. 객관적으로 순수한 무위는 셀레비스의 공자 쪽이 게으른 까마귀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떤 의미로든 폭탄이 앞서 완전히 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 불이 붙게 된다. 어딘가에 속에서 치미는 것들을 욱여넣듯이 쉴 새 없이 몰아붙이고 찍어 눌렀다. 상처도 상대적으로 많이 남는다. 그래서 꼬박 다음 날 오후까지 두 사람 모두 거동을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면에 제이드 라누아가 에브닉 셀레비스를 제 아래에 둘 때는 똑같이 일방적이긴 하지만 불쾌한 감각이 조금 더 가세하고는 했다. 셀레비스의 공자는 건방진 까마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식으로 대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꿈틀거리는 벌레를 통째로 삼킨 기분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몹시 더웠다. 위에 올라온 제이드가 체온이 뜨거웠기에. 불쾌지수 자체는 멀쩡했던 몸이 흠씬 두들겨 맞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높았다. 흔히 날선 욕설과 주먹다짐이 부차적으로 뒤따르고는 했다.

 

   “그게 에브닉 경이셨습니까?”

   “바로 정신이 든 것 보니까 효과가 좋네. 몇 대 더 맞는 게 좋겠다.”

 

   에브닉은 크라바트에 손을 올렸다. 이대로 목을 조를까, 하다가 풀어서 옆으로 던진다. 금을 입힌 제복 단추를 푼다. 제이드는 음저런. 하고 침음성을 낼 뿐 에브닉의 그런 손끝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겉옷이 양 쪽으로 펼쳐지고 금세 하얀 셔츠가 드러났다. 오늘따라 상대는 의외로 순순하게 나왔다. 평소 같으면 웃기지 마시죠, 라며 주먹이나 발이라도 내질렀을 것이다. 이질적인 낌새를 알아차린 에브닉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간다. 뭐하는 거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웃었다. 왠지 기분이 더럽다. 하루 종일 대련하시느라 무지 고생하셨겠네요. 놀리는 듯한 투에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장난하지목검에 얻어맞고 멍든 손목이 덥석 잡힌 것은 그 때였다.

 

   “말고, , 진짜!!”

 

   , 하고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미처 놓으라 말하기도 전에 제이드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에브닉을 거꾸러뜨렸다. 이런 씨발.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제 위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는 재수 없는 면상을 즉시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그가 퉁퉁 부은 어깨를 슬며시 누르자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아. 이런 상태이셨으면 미리 말씀해주시지. 꼭꼭 숨기기나 하고. 재미있는 걸 놓칠 뻔 했잖습니까. 빌어먹도록 한가한 소리였다. 에브닉은 진심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는, 그저, 공자님이, 기절하신, 줄만, 알고. 제복에 달려있던 단추들이 차례로 우두둑 뜯겨나갔다. 이거 놔. 몸서리를 치며 몸을 일으키려들자 제이드는 재차 어깨를 잡아 눌러 그를 반대로 돌려눕게했다.

 

   제이드 라누아, 이 새끼여전히 옷은 갖춰진 상태였지만 흐트러진 그 안으로 불시에 뜨거운 손가락들이 파고들었다. 몸이 꼼짝없이 엎드려 갇힌 꼴이었으므로 침대에 몸을 붙이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하지, . 손가락이 배 위로 난 상처 하나를 찾아 슬쩍 건드린다. 찌릿한 아픔에 에브닉이 발작적으로 움찔거렸다. 숨죽여 웃는 소리가 귓가에서 바쁘게 깜박인다. 어쩌다 이러셨습니까.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이 없는 틈을 타 멍든 손목이 거세게 쥐였다. . 고운 입술에서 욕지기가 절로 터졌다. 말씀 안해주실건가요? 그럼 여긴요? 여기는요? 참 그런 것들만 골라서 귀신같이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이번에는 목검에 후려쳐진 옆구리가 욱신거린다. 제이드가 그것을 놀리듯 지분거리자 에브닉이 악,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만지지 마!”

 

   에브닉은 얼굴이 벌겋게 익어 거칠게 소리쳤다. 싫습니다. 전부 말씀해주실 때 까지 계속 할 예정인데요. 상처를 좇아 배를 더듬던 손이 조금 내려가는가 싶더니 불시에 등을 콱 눌러 자세가 무뎌진 사이, 약간의 난투 끝에 하의를 한 번에 벗겨내 아무렇게나 던졌다. 곧 제이드의 눈이 둥그렇게 뜨였다. 흐음. 장관이네요. 훤히 드러난 두 다리의 전반에 누군가 낸 상처가 가득했다. 많이 얻어맞으셨나봐요. 거의 반나절을 흙밭에서 뒹굴었으니 알만 했다. 발끈한 에브닉이 주먹을 휘두르려다 제압당한다. 닥쳐. 그리고 꺼져. 제이드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가르쳐 주실 때까지 안 갑니다. 그가 에브닉의 뒷덜미를 잡아 강제로 침대에 억누른다. 침대에 바짝 눌린 얼굴 위로 루비빛 머리카락이 스러졌다.

 

   이윽고 호흡이 가빠진다. 늘어지듯 엎드린 에브닉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침대가 규칙적으로 흔들린다. 덥다. 지랄 같다. 아래는 나체였지만 위로는 아직까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영 우스운 꼴이었다. 그가 좋을 대로 움켜쥐는 통에 에브닉이 걸친 진청색 제복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전신이 불쾌하게 끈적거렸다. , , , 하고 최대한 숨을 삼켜가며 소리를 죽이다가도 그의 손이 상처에 침입해 더듬으면 조금 더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것이 재밌는 놀림거리라고 생각했는지 아까부터 등을 덮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등 위에 난 상처에 흔적을 맘대로 새겨 넣었다.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따끔하고, 아프고, 불에 덴 듯 뜨겁고, 짜증이 치밀었다. 어차피 상처들이 워낙 검붉어 흔적이 제대로 남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꾸만 전신에 힘이 빠지는 통에 멀쩡한 침대 시트만 계속 북북 긁어댔던 것이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계속 이런 식이니 정신도 혼미해지는 기분이다. 뜨거운 열기가 무력한 에브닉을 지배하고 있었다. 제기랄. 붉은 머리채가 다소 쉽게 잡혔다. 턱이 쳐들렸다. 목선을 따라 이가 박힌다. 맥박이 뛰는 부분을 지나 그 아래를 침입했다. 어깨와 목 부근에 얼굴을 푹 묻는다. 무언가가 차오른다. 우득, 하고 살점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제이드의 입매가 미묘하게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지만 그것을 볼 수 없는 에브닉은 알 길이 없다. 허벅지 위에 난 상처에 슬그머니 또 손이 간다. 만지지 말라니까! 아윽, 젠장! 다만 용암처럼 끓는 역정이 일었다. 결국 씩씩대던 에브닉이 먼저 입을 뗐다.

 

   “. 다른 사람이랑 할 때도 이런 식이냐.”

 

   손이 즉시 멈춘다. 당연히 아니죠. 엄청나게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제이드가 태평하게 대꾸했다. 물론 예상은 했지만 울컥한 에브닉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흐음. 나른한 인기척이 뒤에서 들렸다.

 

   “다른 사람이랑 할 때는,”

 

   이렇게, 합니다만. 에브닉은 안을 채웠던 무언가가 순순히 빠져나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반응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두 사람은 마주보게 되었다. 침대에 바로 누워서도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던 에브닉의 뺨을 제이드가 감싸 쥔다. 눈을 맞추고 묘하게 미소를 짓던 제이드가 고개를 직접 정중히 숙여 에브닉의 터진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부드럽고, 무르며 따뜻하다. 온기가 어린 것이 고른 치열을 스치듯 훑고 에브닉이 입을 편하게 벌릴 수 있도록 배려하며 뺨을 엄지로 조심히 어루만진다. 이어 습하고 뜨거운 공간으로 몰래 들어온 제이드는 천장과 안을 느릿하게 살피다 에브닉의 것과 만나 합을 맞추어 틈을 주지 않고 엉기었다. 오갈 데 없이 어설프게 떠 있던 손이 주먹을 쥘 듯 말 듯 하다가 그의 어깨에 저도 모르게 손을 얹는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유유히 빠져나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고 입가에 난 상처를 핥는다. 그러다 다시 그 안으로 뱀처럼 들었을 때는 한층 박자가 빨랐다. , 천천히, 그러다 다시, 빠르게 리드한다. 멈추거나 끊이지 않도록. 짧은 은사가 끊기고 타액이 섞인다. 어쩐지 쓸데없이 달큰한 향이 나기에 끊기려는 기억을 되새기다가 그가 일 직전에 쇼트케이크를 훔쳐 먹은 것이 간신히 떠올랐다. 제이드는 눈을 감고 낮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안을 한바탕 휘저은 뒤, 마무리로 입술에 새처럼 가볍게 부딪혀 쪽, 하는 소리까지 낸다.

 

   “…… . 진짜 짜증난다.”

 

   눈을 가늘게 뜬 에브닉이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으하하. 제이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를 세워 목 옆을 확 물었다. 대번에 열꽃이 화하게 핀다. 어딘가 멀리 떠났다가 의지와 상관없이 현실로 돌아와 앉혀진 기분이다. 다행히 이젠 손이 자유로워졌으므로 그의 검은 머리채를 한 뭉치 잡아 세게 당겼다. . 귓바퀴에 박힌 장신구가 유난히 빛난다. 그만 깨물어. 여기 깨무는 거 더럽게 좋아하네.

 

   “. 그거 아세요? 공자님 뒷머리에 혹난 거.”

 

   그는 푹신한 흰 베개 위의 결 좋은 붉은 머리 안으로 손을 넣어 뒤통수를 살살 헤집었다. 에브닉은 얼얼한 고통을 느끼고 콧잔등을 팍 찡그렸다. 여기도 맞으셨나보네요. 하지 마. 그 손 떼지 못해. 그가 에브닉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둥근 이마가 드러난다. 가만히 그것을 응시하다가 돌연 신나게 웃는다. 아하하. 이것 봐. 두 대나 맞으셨네. 제이드의 손가락이 빨갛게 부은 이마 한 구석을 쿡 찔렀다. 날카롭게 뜬 눈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불똥이 튀었다. 퍼억. 에브닉은 그의 가슴을 힘껏 걷어찼다. 으아악. 어이쿠. 그가 침대 밑으로 볼썽사납게 굴러 떨어진다.

 

   “나머지는 알아서 실컷 해라.”

 

   경멸어린 시선으로 그를 쏘아봐 준 에브닉은 구겨진 옷매무새를 다듬고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챙겨 입었다. 임시로 마련한 이 집이 아니라 저택으로 가면 하녀에게 제대로 세탁을 맡겨야 할 것 같다. 공자님. 어디가십니까아. 여태 바닥에 쓰러진 채로 제이드가 저를 불렀다. 집을 두고가시는 겁니까. 이 집, 공자님 집이신데. 명의가 셀레비스라고요.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열쇠를 집어 그에게 다짜고짜 휙 던졌다. 얼결에 날아오는 열쇠를 붙잡은 제이드는 눈을 껌벅였다. 뭡니까.

 

   “너 가져.”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밖은 어느새 해가 지고 쌀쌀한 공기와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잘 닦인 인도 위에 발을 딛는 에브닉의 얼굴에서는 표정 한 점 찾아볼 수 없다. 어떤 거지같은 자식이 단추를 죄다 뜯어버렸기 때문에 입지 못하는 겉옷은 손가락에 걸어 한 쪽 어깨에 걸쳤다. 뚜벅뚜벅. 곧고 바른 보폭이 규칙적인 발소리를 만들었다. 머릿속이 까맣게 무언가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새로운 것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조차 없다. 불만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먼 하늘에 뜬 손톱달이 찢어진 틈으로 에브닉을 줄곧 훔쳐보는 중이다.

 

   “…… …….”

 

   길가에 핀 이름도 없는 들꽃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에브닉은 부츠의 뒤축으로 들꽃을 밟았다. 꽃은 힘없이 우그러진다. 발을 들었다. 구겨진 꽃이 고개를 들었다. 또 한 번, 꽃을 밟는다. 꽃은 또 한 번, 고개를 든다. . 제 자신이 우습게 느껴져 혀를 찼다. 아무리 대상이 없다손 치더라도 불모지에서 계절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힘겹게 만개한 꽃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니 점잖은 꼴은 아니었다. 짜증스레 뒷머리를 긁적인 에브닉은 드문드문 들풀과 들꽃이 난 길에서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위로 빠끔히 열린 하늘을 제외하면 그늘진 어둠으로 점철된 길이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으나, 또 생각을 아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손을 가져다 대면 베일만큼 날카롭고 실체가 없는 파편들이 얼기설기 맞춰져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완성한다. 확실한 것은, 예의 짜증이 슬금슬금 형체를 갖춰져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희멀건한 북부 촌놈의 탓이기도 했고, 자신을 실컷 놀리던 시커먼 까마귀의 탓이기도 했다. 그 염병할 두 놈들이 동시에 책임을 지면 딱 좋겠다. 에브닉은 신랄하게 코웃음을 쳤다.

 

   무심코 지붕 위에 시선이 닿았다. 하지만 없었다.

 

   한편, 그 두 사람을 어떻게 하면 가장 통쾌하게 엿을 먹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너무 골똘히 몰두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에브닉은 저택을 나설 때부터 제 뒤를 밟던 두 명의 남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비로소 목적을 드러내며 바로 앞을 가로막기 전 까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는 에브닉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내 놔.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찰나에 온갖 실없는 추측이 난무했다. 마침내 비교적 정상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데 성공한 에브닉은 한숨을 쉬며 품에서 지갑을 꺼내 그들에게 던졌다.

 

   “가라.”

 

   평소 같았으면 대뜸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너무 심신이 피곤하기도 했고, 갖가지 생각이 에브닉을 쥐어짜고 있었기 때문에굳이 외적 갈등을 사서 유발하기보다 이런 질 떨어지는 상황에서 한시라도 빠르게 벗어나는 것을 지향하기로 했다. 그러나 눈빛을 교환한 두 남자는 생각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지갑을 받은 남자 측이 감사의 의미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날카로운 흉기였다. 일반 나이프를 숨기기 좋게 개조한 것이다. 에브닉은 그 상황을 정시에 확인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남자가 소리 없이 달려들었다. 한 발 늦게 에브닉의 눈에 그것이 들어온다.

 

   멈추었던 소리가 다시 생긴 것은 누군가 그 좁은 간극 위에 난데없이 날아든 시점이었다.

 

   “

 

   제이드 라누아. 에브닉은 눈을 크게 떴다.

   팔을 들어 앞을 간단히 막아선 까마귀는 아무렇지 않게 후드득, 검은 날개를 털었다. 뼈가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한 악력으로 손을 붙잡힌 남자가 버티지 못하고 칼을 바닥에 떨군다.

 

   “실례합니다. 가출한 저희 도련님을 모시러 왔습니다만.”

 

   잘 만든 가면을 씌운 듯한 미소.

   긴 손가락을 타고 내려오던 그 끝, 벼랑에서 핏줄기가 뚝끊어졌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에브닉의 이성도 아마 그 때 끊어졌던 것 같다.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이드] TREAT  (0) 2018.01.28
[제이드] Good Afternoon  (0) 2018.01.28
[제이드] OR  (0) 2018.01.28
[제이드] TRICK  (0) 2018.01.28
[제이드] 선물  (0) 2018.01.28
Posted by IllillIl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