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드] 선물

커뮤로그 2018. 1. 28. 19:27

160806 선물 (with. 에브닉)

 

 

   짙푸른 나뭇잎들이 무거워 올해로 딱 백 살을 먹은 나무는 팔을 그늘 위에 드리웠다. 선득한 바람이 잎새로 지나갈 때면 그것을 두고 어찌나 할 말이 많은지 부스스, 몸들을 떨어댔다. 나무가 뿌리를 뻗은 대지에는 토끼풀이 가득 자랐다. 하얗고 둥근 꽃망울이 만개해 하늘을 향해 웃는다. 나무 그늘 아래, 토끼풀로 무성한 풀밭 옆으로 널찍한 바위가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 그늘에 물들어 몸이 검어져버린 서늘한 바위는 일 년 내내 차갑게 식어있다. 찌르르. 찌르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지저귀는 산새가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꽁지깃이 푸른 산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늘 밑을 바라본다. 오늘, 그늘 안에는 객이 있었다.

 

   그는 바위와 마찬가지로 그늘에 물들어서일까 똑같이 검었다. 그을린 이마 위로 팔 하나를 늘어뜨리고 스스로 베푸는 안온한 휴식에 잠겨 눈을 감은 채 느지막한 고독을 즐기는 중이었다. 어깨가 내뱉는 숨결에 따라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 바위는 오랜만에 찾아온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제 품 위에서 잠든 그를 안고 체온을 시원히 달래주었다. 본래의 그는 뜨겁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언제나 데워져 끓고 있었다. 또한 조용히, 흐른다. 녹인 쇳물 같은 게 끓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주변에 많지 않았다. 미지근해진 손이 문득 움찔거렸다. 금방이라도 뒤척일 듯 바르작거리던 몸이 다시 잠잠해진다.

 

   으레 끓다보면, 반드시 넘치기 마련이다. 나무 그늘이 덮어 얌전히 감겨있는 그의 두 눈은 온전하지 못했다. 왼 눈은 멀쩡했으나 다 자란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로 찢긴 흉터가 오른 눈 위로 길을 낸 상태였다. 그것은 왠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단 한 번, 끓어 넘친 결과는 참담했다. 그러나 그는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실수를, 착오를, 현실을, 과거를. 모든 게 뒤섞인 그 날, 단단히 붙잡힌 어깨를 강제로 짓누르고 그 위에 독한 약을 흘렸을 때에도 절규 한 점 없이 잘게 떨었을 뿐이다. 대신 꽉 쥔 손바닥에 손톱이 틀어박혔다. 그래도 그 뿐이다.

 

   그는 늘 까마귀였다. 이제 까마귀가 좇아 날 빛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 무렵에 봉긋하게 핀 토끼풀 벌판을 밟는 다른 이가 있었다. 날아간 까마귀의 행방을 물어물어 왔지만 여정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좀처럼 아는 자가 없었던 탓이다. 발밑으로 토끼풀이 꺾였다. 남부의 루비처럼 타오르는 머리카락이 언덕에서 낮게 불어온 바람에 흩날렸다. 콧잔등을 따라 옅게 박힌 주근깨가 보일만큼 햇살이 유달리 밝다. 셀레비스. 누군가는 경외를 담아 그렇게 불렀다. 에브닉, 혹은 애정을 담아 이브, 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지만 까마귀는 남자를 줄곧 에브닉 경, 이라고 불러왔다. 아니면, 공자님. 그러고 보니 까마귀가 누군가를 애칭으로 부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어디서 이상한 별명을 가져다 붙였을지언정.

 

   에브닉은 묵묵히 벌판을 가로질러 바위에 도착했다. 함께 나무그늘에 물들었다. 두 눈만큼은 절대로 잠식되지 않으며 진한 금색으로 빛이 감돌았다. 눈동자가 거울처럼 상을 비춘다. 잠든 까마귀가 그곳에 있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다. 뾰족하게 날이 선 시선이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없었던, 생경한 것에 못 박힌다. 짧은 자상. 아마 눈을 스쳤다고 했던가. 하필 드물게 비가 내리는 날검붉은 피를 눈물처럼 흘리며 터덜터덜 돌아왔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껏 붙잡았더니 영문 모를 헛소리를 했었지. 주저하는 손끝이 멋대로 흔적에 닿는다. 곤히 잠들어있던 그의 뺨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눈꺼풀도 파르르 떨렸다가 멈추었다. 에브닉은 손을 뗐다. 아래로 떨구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감추었다.

 

   “일어나.”

 

   에브닉이 말했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일어나라고 했다.”

 

   딱히 인내심을 발휘해줄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가차 없이 그를 발로 밀어냈다. . 졸지에 널찍한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진 까마귀, 제이드 라누아가 잠에서 벌떡 깨어났다. 으악. , 뭡니까. 그는 풀밭에 보기 좋게 널브러져 황급히 외친다. 활짝 열린 두 눈 중 하나가 빛을 잃고 색이 옅어져 혼탁하다. 칼날이 할퀴고 간 쪽이다. 나뭇잎들 사이로 내리는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빛을 보면 덜 가신 통증이 아리게 찾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평소 그가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그늘을 찾는 것은 멀쩡했을 당시에도 자주 있었던 일로, 때문에 증상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에브닉이 햇빛을 등지고 그의 앞에 서서야 구겨졌던 얼굴이 피었다. 아니. 우리 공자님이시잖아. 은근한 배려에 눈이 휜다.

 

   “에브닉 경이 어떻게 저를 찾으실 수 있었죠?”

   “물어봤어.”

 

   누구에게 물어봤을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 그래서 용건이 있으신지.”

 

   그가 뒤늦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혹시 떨어진 것은 없는지 주위를 휘휘 살피던 그에게 에브닉이 작은 상자 하나를 던졌다. 그것을 덥석 붙잡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게 뭡니까. 상자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짐작이 가는 게 없었다. 결국 제이드는 에브닉의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의외의 것이 들어있다. 내용물을 확인한 그의 눈썹이 들린다. 이건.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은 안대였다. 설마 몇 초 뒤에 폭발하는 건가요. 으악. 쓸데없는 사족 덕에 정강이를 실컷 차였다. 아이쿠.

 

   이러다간 하나도 남아나진 않겠네요투덜거리는 제이드에게 에브닉이 불쑥 거리를 좁혀 다가갔다. 움찔, 뒷걸음질을 하려던 그는 충동을 잠재웠다. 유난히 빛나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가까웠다. 서서히 다가온 손가락이 흉터를 더듬었다. 얇은 살을 베어 가른, 느껴지는 틈. 아야. 그가 퍼뜩 인상을 썼다. 그러다 덧납니다.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에브닉은 멀뚱히 그를 응시했다. 아파? . 아픕니다. 얼마나 아픈데? 굉장히요. 흐음.

 

   “이거, 가져오셨으니까 해주십시오.”

 

   왜 가져온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는 대뜸 에브닉이 가져온 상자를 내밀었다.

 

   “내가 왜?”

   “가져오셨으니까요. 공자님이.”

 

   두 눈이 동시에 깜박였다. 더 무어라 말하려던 차에 그가 손에 안대를 들려주었다. 그가 뒤를 돌았다. 머리에 장식으로 매단 까마귀 깃털이 경쾌하게 흔들렸다. 앉아 드릴까요. 필요 없어. 뚱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에브닉은 요구대로 안대를 씌웠다. 다만 매듭은, 조금 강하게, 아야야! 조심해주세요. 묶는다. 히죽 미소가 떠올랐다. 미안. 실수였어. 그가 다시 에브닉과 마주선다. 오른쪽 얼굴의 절반이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여즉 하나 남은 눈이 웃는다. 저 조금 멋지지 않습니까. 그 뭐야, 해적 두목 같고. 에브닉은 홍산호 군도 근방을 맴돌았던 건방진 해적들을 떠올린다. 그래. 그대로 목을 매달면 아주 좋겠다. 솔직한 감상이었다.

 

   “선물 감사합니다.”

 

   제이드는 입술을 떼어 말했다. 틈만 나면, 어떻게든 공격을 가하고 지키기 위해 방어를 하는 사이었지만 그 정도는 할 줄 안다. 그럼 됐어. 에브닉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가리니까 훨씬 낫네. 못생긴 얼굴에 흉터까지 있으면 흉하잖아. 그런가요. 그가 씩 웃었다. 여전히 위태한 절반은 문득 불안하게 느껴진다. 용건이 끝났으니 싱겁게 몸을 돌리는 에브닉의 귀 뒤로 별을 빼닮은 검은 점이 보였다. 풀꽃들이 만개한 벌판을 딛는 발끝이 가볍고 유려하다. 그거 귀찮다고 벗지 마. 어차피 당분간은 비슷한 거라도 해야 한다며. 에브닉은 멀어지며 덧붙인다. 그가 여태 알면서도 구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사나운 빛 아래에 있으면서도 사나운 빛에 안주해 구태여 받아내야 했을 이유가 무엇일는지. 우수수 바람이 떨어진다. 붉고 고운 실타래가 일제히 일었다. 그 날도 저것으로 알아보았다. 겨우 절반이여도 선연하게, 비춰졌으니.

 

   “생각해볼게요.”

 

   검은 안대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어두운 그림자가 생겼다.

   둘의 불완전한 시선이 어느덧 교차한다.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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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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