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03 안 돼요 제자님 (with. 슈텔)

 

 


   제이드는 난감한 얼굴로 제가 손에 쥔 패를 만지작거렸다. 딱히 오늘따라 패가 좋지 않다거나 더 이상 내놓을 수가 없다거나해서가 아니었다. 으음. 시름에 잠긴 침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초조하게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톡톡톡.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자꾸 눈동자가 옆으로 샌다. 옆통수가 따가웠다. 아니, 이게 아닌데. 결국 다음 차례에 답지 않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세상에.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한숨을 푹 쉬며 허공을 보았다.

 

   “으하하. 천하의 제스도 실수를 할 때가 있군.”

 

   미인을 옆에 둬 그렇지 뭐. 깡마른 사내가 배를 붙잡고 낄낄거렸다. , , . 제이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원래 모조리 그의 몫이 되었어야 할 판돈들은 죄다 반대편으로 끌려갔다. 바라보는 눈이 가늘어진다. 그래서, 무슨 사이인가. 지레 친한 척을 해온 다른 사내는 그의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여자를 슬쩍 가리켰다. 아무리 목소리를 낮춰도 여자에게까지 들릴 만한 크기였다. 혹시. 교제하는 사이? 오오오. 순식간에 분위기를 장악한 헛소문이 혈기가 왕성한 뒷골목 사내들에게 쓸데없는 것을 퍼부었다.

 

   “아닙니다.”

 

   단호한 답변이었다. 제이드는 사내를 밀어냄과 동시에 침착하게 패를 내려놓고 예의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그 바람에 한창 물이 올라있던 판이 중단되어버린다. 옆에서 사각사각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써내려가는 중이었던 슈텔 피엔디라도 깃펜을 멈췄다. 바위에 낀 이끼를 연상시키는 한 쌍의 눈동자가 제이드를 향했다. 그녀는 이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의 중심에 본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하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제이드는 매우 우아하게, 하지만 신속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의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문이 닫히자 모서리에 걸려있던 방울이 딸랑딸랑 울린다. 슈텔은 두리번거리다가 제 짐을 모두 챙겨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라누아 경.”

 

   금세 까마귀를 따라잡은 그녀가 불렀다. 우뚝 멈춰 선 제이드가 돌아본다.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몇 장의 종이와빼곡히 메모가 되어있다얼마나 오래 두고 썼는지 털이 다 빠져 빈약한 깃펜에 꽂혔다. 뭔가요. 저의를 알 수 없으니 잔뜩 경계하는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자그마치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무려 어제부터! 아무리 떼어놓으려고 해도 어디선가 반드시 태연하게 다시 나타났다새벽에 문을 열자마자 정통으로 마주쳤을 때는 유령인 줄 알고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게다가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메모들은 다 뭐란 말인가. 혹여 관찰일지 같은 것이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어디 자신이 관찰을 당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인사던가. 말도 안 된다.

 

   “아까 경께서 패를 던진 것은…… . 그것도 일종의 수인가요?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리한 상황을 자연스레 타개하기 위한?”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소리냐고, 반사적으로 되물으려던 제이드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요즘 제 행동양식과 행동반경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이 부쩍 많아진 것 같지요. 누가 소문이라도 내신 건가. 반듯하게 각진 어깨가 으쓱였다. 슈텔은 반쯤 감긴 둥근 눈을 마저 서서히 감았다가 떴다. 저는 그냥, 뭐든 알고 싶어서요. 그녀에게서는 오래된 서재에서 날 법한 기분 좋은 냄새가 어슴푸레 난다. 제이드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호기심이 많은 분이시네요.”

   “알고 싶은 게 많아요.”

 

   특히 경에게는으음. 잘 알려지지 않은 생활의 기술들이 많이 보이니까요. 슈텔은 진심을 담아 꽤 솔직하게 말했다. 덕분에 제이드는 되레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지칭한 생활의 기술범위에 도박꾼들이 시전하는 사기전법이 포함될 줄은 몰랐다. 보통 생활의 기술이라면 지극히 건전한 것을 일컫는 것으로 아는데. 칼날을 숫돌에 잘 가는 법이라든가, 양초를 오래 쓰는 법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 그래도 이런 것들은 함부로 가르쳐 드릴 수가 없군요. 그는 무방비한 손을 들어보였다. 이래보여도 꽤 오래 전부터 쌓아 온 사업 노하우라서. 그녀가 고개를 들자 양 갈래로 곱게 땋은 머리가 시계추처럼 일정하게 흔들린다.

 

   “흐음. 그래요. 절 스승으로 모신다면 모를까.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장난스레 눈이 휘었다.

 

   “스승님.”

   “?”

 

   일말의 고민도 이루어지지 않은 즉답에 제이드의 눈썹이 폭삭 무너졌다.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면 배울 수 있는 거죠? 그녀가 묻는다. 아니, 그러니까. 아 아니, 이런 걸 대체 알아서 뭐에 쓰시게요피엔디라 경. 진심이었다. 슈텔은 품에 꼭 안고 있던 종이들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내민다. 모아서 책을 쓰고 싶어요. 침묵이 흘렀다.

 

   “책을, 내신다고요? 그거 일종의

 

   범죄조장 아닙니까. 제이드는 잠깐 서점에 성공적으로 남의 돈을 떼먹는 법’, ‘이것만 알면 나도 불한당이 될 수 있다!’ 따위의 부당한 제목을 한 불온서적들이 버젓이 전시된 풍경을 상상해보았다. 버미어의 미래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시퍼런 칼을 든 두목이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장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이미 진정한 범죄자가 기사단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로열 글라디우스의 전적인 위신추락을 막기 위해서라면 기사단장에게 자진신고를 하는 편이 공공의 선을 위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슈텔은 뺨을 살짝 붉혔다. 한 권이면 됩니다. 제가 볼 거예요. 혼자만요. 다행히 범죄조장의 영역은 아닌 듯 했다.

 

   “스승님.”

 

   그녀가 그의 손을 양 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지나친 학구열에 눈이 범상찮게 빛나고 있었다.

 

   “부디 제게 깊고 넓은 가르침을 하사해주세요.”

 

   이게 아닌데.

   제이드는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저어혹시 제가 이전에 슈텔 경께 뭐 잘못한 게 있습니까……?”

   “?”

 

   그렇게, 1대 제자가 생겼다. 너무도 갑자기.

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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