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02 아득히 먼 기억 (with. 에브닉)

 

 

   이벨리아가 아팠다.

 

   어린 에브닉이 기억할 수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때는 이른 봄이다. 봄 특유의 선득한 따뜻함이 있어 연분홍색 벚꽃이 일 년 중 가장 산만하게 피었다. 바람이 불적마다 꿀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며 맴돌았다. 에브닉은 보이지 않는 공기의 결을 붙잡으려 마차 밖으로 손을 뻗는다. 덜 자란 손가락들 사이로 다 빠져나가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던 것이 기억난다. 제가 참아보겠다던 이벨리아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두통과 오한을 호소했다. 결국 달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그리고 공작가로 가는 길을 벗어나 처음 보는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길이 좁아지고 벚꽃이 점점 없어진다. 달콤한, 봄 내음도 옅어지고 햇빛도 서서히 사라진다. 머지않아 낯선 장소에 도착하자 에브닉은 신이 나서 뛰어내렸다. 자박자박. 메마른 잔디가 소년의 작은 발밑에 힘없이 바스러졌다. 잎사귀 하나 달리지 않은 나무들은 마치 창을 거꾸로 꽂아둔 것 같았다. 하늘이 온통 회색이었다. 자욱한 안개가 커튼처럼 잔뜩 드리웠다. 담쟁이덩굴이 옭아맨 낡은 저택이 공터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다. 여기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소년의 뺨이 호기심으로 발그레 물들었다.

 

   소년은, 채 누군가가 말리기도 전에 공터를 가로질러 공작가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저택 안으로 뛰어들었다. 온 몸을 이용해 어린 남자아이에겐 아직 무거운 현관문을 밀어젖혔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당시에 에브닉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이성적인 판단보다 당장의 흥미와 즐거움을 더 좇을 시기다. 내가, 내가 열었어. 누나, 얼른 들어와. 순수한 웃음이 까르르 터졌다. 어여쁘다.

 

   하지만 소년의 하얀 웃음은 전구가 꺼지듯 한 순간에 사라졌다. 어어. 무심코 몸을 현관 안으로 들이려다가 뒷걸음질을 했다. 현관 앞에 서있던 누군가와 예고 없이 눈이 마주쳤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머리카락이 길고, 까맣고, 비쩍 마른 다른 소년과. 무언가를 소중히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시선이 황망히 훑는다. 그리고 그 소년의 손 안에 든 것을 목격한 에브닉은, 즉각 비명을 질렀다.

 

   누나!

 

   그것은 붉고, 검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누나. 나 봤어. 마물이. 어린 소년의 눈이 둥그렇게 커진다. 이브. 부탁인데, 지금은 제발 조용히 해줄래. 이벨리아가 부축을 받으며 앓는 소리를 내자 에브닉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면 안 돼, 누나. 저기에 마물이 살아. 그러나 종종 뛰는 소년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내가 지켜줄게. 별 수 없이 어린 소년은 주먹을 꾹 쥐고 누이의 앞에 섰다. 검은 문이 또다시 열렸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라누아 저택은 적막했다.

 

   하인들은 주인에게 대답을 하거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수다는 어딘가에 있는 저들의 방에서나 꼭꼭 숨어서 하는 모양이었다. 햇빛이 잘 들지 못해 침침한 복도는 거의 텅 비어있다. 그나마 구석에 거미줄이 쳐지지 않게끔 최소한의 관리 정도는 하는 듯 했다. 또 저택 내부는 터무니없이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아무런 방이 없는 복도며, 다락방 끝에 닿은 경사도라든가, 책장이 출입문인 침실, 기이하게 꺾어진 계단, 밖이 보이지 않는 테라스, 전신 거울 하나만 놓여있는,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방. 어린 에브닉에게 라누아 저택은 미로의 성처럼 보였다. 소년은 매일 홀로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가상의 상대를 좇아 저택을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이벨리아가 라누아 저택의 침실에서 앓아누운 지 사흘 째 되던 날, 에브닉은 정말로 누군가를 찾아냈다. 여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허름한 방문을 발견하고 열었다. 썩은 나무 문 틈새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뛰쳐나온 까만 벌레들이 후다닥 자리를 비켰다. 안에는 웅크리고 앉은 소년 하나가 있었다. 에브닉도 남부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 얼굴이 가무잡잡한 편이었지만 소년은 그것보다 훨씬 갈색으로 그을린 팔과, 다리, , , 얼굴노란 금화의 금빛으로 빛나는 눈은 어린 에브닉이나 머리 하나가 큰 소년이나 비슷했다.

 

   여기서 뭐해?

 

   호기심 많은 셀레비스의 공자는 먼저 입을 뗐다. 소년의 느릿한 몸짓은 무언가를 잡아먹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거미를 떠올리게 한다. 그 팔이며 발이 얼룩덜룩한 것을 보았다. 공자께서는요. 신기하게도 에브닉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 여기 계시면 안되는데요. 소년은 에브닉을 문 밖으로 밀어 쫓아냈다. 정당한 이유를 듣지 못하고 쫓겨난 에브닉은 굳게 닫힌 썩은 문을 노려보았다. 이어서 문을 살짝 열어 안을 훔쳐본다. 그리 착한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작고 낡은 창문을 막 넘어 소년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에브닉은 창문에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갈색으로 변해버린 책들을 켜켜이 쌓아올리고 발을 디뎠다. 목을 밖으로 죽 뺐다. 소년은 통상의 1층보다 조금 높은 높이의 벽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소년의 발이 더러운 이유는 저런 이유일 것이다. 나도 갈래. 어린 소년의 앳된 목소리에 밑을 곧장 바라보던 큰 소년이 벽에 매달려 고개를 들었다. 그건 안 됩니다. ? 안돼요. 이 근처에 무서운 들개가 살아요. 공자님은 개보다 뜀박질도 느리고 몸집도 작으니까 안돼요. 아니야. 난 뛰는 것도 자신 있고 키도 큰 편이야. 너는 되고 나는 왜 안 돼. 에브닉은 그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괜한 소리를 한다고 여겼다. 까만 얼굴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돌아가 주세요. 그러나 기어코 에브닉은 창틀을 넘었다.

 

   개가 쫓아오면, 저는 공자님을 버리고 갈 거예요.

 

   마음대로 해. 네가 개에게 쫓기면 나도 너를 버릴 거니까. 우쭐거리며 대답했다. 신발을 신지 않은 발에 풀잎이 마구 엉겼다. 에브닉은 그게 신경 쓰였다. 너는 왜 신발을 신지 않느냐고 묻자 소년은 대꾸가 없었다. 그저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어가기만 했다. 따라가다가 몇 번인가 넘어질 뻔 했지만 절대로 넘어지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제스라고 불러주세요. 소년은 한참 만에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왠지 가짜 같다. 에브닉은 좀처럼 믿지 않고 입을 비쭉였다. 그것이 맘대로 지어낸 이름 따위가 아니라 그나마 가까운 사람들이 불러주는 애칭이라는 걸 안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정식 이름은 제이드 라누아라고 했다.

 

   있잖아. 어디로 가는 거야?

   그런 걸, 왜 이제야 물어보세요.

 

   에브닉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둘은 둘에게 아직 넓고 긴 뒤뜰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정돈이 되어 있지 않아 엉망이였긴 했지만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에브닉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봄인데도 겨울을 따라 회백색으로 물든 나무가 웅웅 속삭였다. 귀가 슬며시 간지러웠다. 옆으로 붉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키가 큰 소년, 제이드는 손을 뻗어 줄기들이 두드러진 덤불을 뒤졌다. 아늑한 공간 안에는 둥지 하나가 몰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알이 다섯 개.

 

   저게 뭐야?

 

   제이드가 몸을 낮추고 덤불 안으로 들어갔다. 뭐냐니까. 에브닉이 채근했다. 까만 손 안에 따뜻한 알 한 개가 잡혀 나왔다. 알은 자잘한 반점에 뒤덮여있다. 머뭇거리며 만져보려는 찰나 살아있는 알이 꿈틀거린다. 흠칫 놀란 에브닉이 왓, 하고 급히 손을 거두었다. 큭큭. 참지 못하고 어린 꼬마를 명백히 비웃는 미소가 새어나온다. 에브닉은 웃지 마, 하고 볼멘소리를 한다. 제이드는 둥지에 알을 다시 돌려두었다. 땅에 둥지를 틀어서 땅새라고 합니다. 빈틈없이 덤불을 꼼꼼하게 덮었다. 어미 새가 곧 돌아올 것이라 덧붙였다.

 

   이걸 보려고 온 거야?

   알이 잘 있는지 확인해야해요. 들개가 먹어버리면 안되니까.

 

   ? 대답을 고르며 어렴풋이 움직이던 그 눈동자도 기억한다.

 

   어미 새가 슬퍼하지 않을까요. 알이 없으면요.

   너는 네가 무섭다고 했던 들개를 이길 수 있어?

   아니요.

 

   에브닉은 붉고 고운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야? 알을 확인하는 게 알을 지켜주는 일이 아니잖아.

 

   힘이 없으면,

 

   지켜보는 게 다 이지만,

 

   힘이 생기면,

 

   언젠가 반드시 죽여버릴겁니다. 그거.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손으로 주먹을 쥔다. 동그랗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에브닉은 물었다. 어떻게 죽이게. 글쎄요. 이번에는 대답이 짧았다. 제이드의 입가에 생긴 딱지가 떨어질 듯 들려있었다. 돌아가요, 공자님. 슬슬 걱정하실 지도 몰라요. 해가 서산 너머에서 불을 껌벅였다. 에브닉은 소년의 눈동자가 해보다 밝다고 생각했다. 소년도 마찬가지다. 어린 소년이 큰 소년을 앞질러 달린다. 노을이 하늘을 빗는 빗살같이 가늘게 뻗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

 

 

   이후의 일은 물감을 엎지른 것처럼 어지럽다. 어떤 기억은 그렇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정신없이 산란하는 시야, 힘이 빠져 달리는 다리, 땀으로 흥건한 이마, 색색거리는 숨. 멀어지는 까마귀, 아니, 소년. 키가 큰 소년. 어린 소년은 목이 따가워 숨을 참았다. 싫어. 개가 사납게 짖었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공포. 두려웠다. 가지 마. 제스. 손을 힘껏 뻗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그 때 에브닉의 몸이 불쑥 기울었다. 바늘을 쏟은 것 마냥 아픈 풀밭에서 힘껏 발을 찼다. 허공에 허우적거리는 발. 덮쳐오는 짐승. . 들개. 개가 쫓아오면, 저는 공자님을 버리고 갈 거예요. 가지 마. 눈을 꾹 감았다. 뜨거운 것이 흐른다.

 

   깨갱. 눈앞이 붉었다.

 

   또다시 끝없는 적막이,

   흐른다. 암전.

 

 

*

 

 

   끊긴 필름은 어색하게 이어진다. 기억 속의 에브닉은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서 있었다. 키가 크고 검은 소년도 함께였다. 풍채가 좋은 중년의 남자도 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소년의 따귀를 갈긴다. 어딜 다녀온게냐. 또 한 번, 갈겼다. 공자님까지, 데리고. 굳이 지적하자면 에브닉이 소년을 따라간 것이지 소년이 에브닉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진실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각자 이유는 달랐지만, 모두가 함묵했다.

 

   작은 발이 뒷걸음질을 치려다 멈춘다. 이건 또 뭐야. 남자는 검붉은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 다그쳤다. 어디서 뭘 한거야. 대체남자의 손에 그것이 묻어나온다. 피다. 소년이나 에브닉의 것은 아니었다. 소년의 발목에서 나는 것을 제하면. 그것은 소년의 것이다. 피거품을 물고 마지막 발악을 시도한 개가 소년을 물고 늘어졌던 탓이었다. 제 머리를 돌로 내려친 데에 대한 최후의 복수이기도 했다. 이제 땅새의 알을 노리는 존재는 영영 없어졌다. 작은 땅새는 가장 따뜻한 봄에 태어나겠지. 어린 소년도, 가장 따뜻한 봄에 이곳을 떠나겠지. 이 조용하고 낡은 저택을 떠나 풍요가 가득한 곳으로. 여태껏 무사히 숨을 쉬고 있기 때문에숨을.

 

   셀레비스 공자님이 다치셨으면 어쩔 뻔 했느냐!

 

   숨을. 에브닉은 숨을, 쉬고 싶었다. 심장은 뛰고 있었으나 숨을 토해낼 수가 없다. 두꺼운 발이 소년을 힘껏 찼다. 속절없이 감싸 쥐고 고꾸라졌다. 구겨진 부츠가 벌겋게 부어오른 다리를 짓이겼다. . 소년은 얼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 따위가, 감히. 귀가 울릴 정도의 일갈이 터졌다. 귀를 막고 싶었다. 소년의 눈은 아무 것도 담지 않고 허공을 향해 있었다. 에브닉은 남자가 배를 걷어차는 것을 보았다. .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소년이 엎드려 헛구역질을 한다. 눈을 감고 싶었다.

 

   아아. 기억이 난다. 눈을 차마 제 때 감지 못해 마주쳤던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쿨럭쿨럭 기침을 하던 제이드의 시선과 우두커니 서 있는 에브닉의 시선이 맞닿았다. 고통에 수축하는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알고 있다. 당장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쯤은. 그렇지만 에브닉은 방 안의 공기에 압도되어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의, 제이드의 눈 아래가 움찔거렸다. 갈급한 일상 속에서 익숙해진 체념이 요동친다. 바짝 엎드린 아래에서 우러러보는 어린 소년, 에브닉의 눈동자는 거울처럼 잘 닦여 맑았다. 건드리면 깨질 듯이 흠집 하나 없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부러울 만큼. 딱딱하게 굳은 심장이 진동하자 돌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틈새로 걸쭉한 용암이 흘러내린다. 가슴이 열렬히 타들어가 뜨겁다.

 

   사창가에 있는 것을 기껏 데려다 먹고 입혀줬더니.

 

   힘이 없으면, 지켜보는 게 다 이지만.

 

   보지 마. 이쪽 보지 마. 뒤섞인 감정이 한 번에 휘몰아쳤다. 곧 시뻘건 아가리를 쩍 벌린 거대한 불이 붙었다. 바닥을 긁는 손톱이 깨져 피가 흘렀다. 화끈한 고통이 열 손가락 끝마다, , , . 다리는 이미 한계를 넘어 감각이 없다. 소년은 날개가 꺾여 바르작거렸다. 남자가 검은 머리채를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더러운 자식.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가 다 책임질 것이냐. 머리가 처박힌다. , 마른기침이 터졌다.

 

   힘이 생기면, 언젠가 반드시 죽여버릴겁니다. 그거.

 

   눈에서 마침내 불꽃이 폭발했다. 초점이 존재하지 않았던 금빛 동공에 붉은 것이 차오른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모멸감. 적대감. 시기. 질투. 원망. 수치심. 아니면, 혹은 다른 것. 그것의 정체와 근본이 무엇이든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에 어린 에브닉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움직이지 않았던 다리가 뒤늦게 힘이 풀려 덜덜 떨렸다. 더듬더듬 뒷걸음질을 쳤다. 그림자가 울렁이는 벽이 등에 닿았다. 뭘 그런 눈으로 보는 게야. 감히. 불타오르는 벽난로를 쑤시는 쇳덩어리가 새카만 소년의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어린 소년은 모든 것을 외면하며 눈을 꾹 감았다. 바로 그 때,

 

   에브닉. 에브닉.

 

   에브닉. 이브. 여기서 뭐하는 거야. 약을 먹고 기운을 차린 이벨리아가 동생을 발견하고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속삭였다. , 설마 저런 걸 계속 보고 있었니. 예의 없이. 그렇게, 어린 소년은, 저보다 큰 소년을 내버려두고 문틈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딱히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그는 피식 웃었다. 그의 옷깃을 꽉 틀어 쥔 양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멱살을 잡은 손목 안쪽에 힘줄이 도드라진다. 여전히, 또 지금도 불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늘 그렇듯이 언제나 저런 표정이었다. 에브닉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놈을 어떻게 보든 내 마음이지. 그렇습니까, 돌아오는 것은 지극히 가벼운 대답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진한 황금빛 눈동자에서 불똥이 튄다. 당장이라도 찍어 누르고 저 아래로 끌어내릴 것처럼.

 

   “그래도 저는 공자님의 그런 눈이 마음에 듭니다.”

 

   공자님께서 그런 눈을 하신다는 이유만으로 마음껏 싫어할 수 있거든요. 다른 이유들은 이미 오래 전에 색이 바래버려서 말입니다. 엊그제 합을 맞춰 본 입술이 움직여 나불거리며 말을 한다. 그 외에 별다른 기억은 없다. 가늘게 뜬 눈에서 배어나온 건조한 시선이 그를 꿰뚫는다. 오래전에. 그래. 시간이 많이 흘렀지. 에브닉은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아랫입술을 눌렀다. 그대로 느릿하게 지분거리기 시작한다. 그에게 생각이 많을 때면 이런 버릇이 있다는 것을 얼핏 들어 알고 있다. 실은 나도 잘 기억나지 않아. 오래 전에는 흉한 딱지가 앉아있었을 입매를 더듬는다. 그는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가 에브닉을 다시 응시한다.

 

   “이렇게 된 거, 날 싫어할만한 다른 이유도 만들어줄까?”

 

   반쯤은 농담이었고, 반쯤은 진심이었다. 웃음기가 조금 가신 시선이 아래에서부터 꽂힌다. 그건 제 쪽에서 사양하고 싶은데요. ? 에브닉이 되묻는다. 그런 거, 이왕 하나 더 생기면 좋잖아. 제이드 라누아. 옷깃을 잡고 있었던 나머지 힘을 풀었다. 그러나 깔고앉은 그의 위에서 결코 내려오지 않는다. 대신 심장 부근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는 제 급소를 지배한 에브닉의 손을 거부하거나 강제로 떼어내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그것은 손바닥 아래에서 규칙적으로 전율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그대로 칼을 꽂으면 즉사할 것이다이 까마귀는. 에브닉도, 제이드도, 이제 어리숙한 소년이 아니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죄송하지만, 이유는 지금으로써도 충분하거든요.”

 

   큭큭. 에브닉이 웃을 차례였다. 결 좋은 붉은 머리카락이 즐겁게 춤춘다.

 

   “저는, 공자님이

 

   지독히도 싫습니다, 라는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부드럽고 열에 데어 홧홧한 입술이 그 위를 덮었다. 경직된 감각을 치밀하게 침입하는 진득한 입맞춤. 조금 전 엄지로 얼마간 지분대던 아랫입술을 불시에 깨문다. 그것도 애정이 어린 행동은 아닌지라 꽤 아프다. 말이 끊긴 그가 유지하던 표정을 무너뜨리며 미간을 확 찌푸렸다.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에브닉은 진심을 다해 밀어내는 팔의 손목을 곧 부러뜨릴 듯이 잡아챘다. 뭡니까.

 

   “그러고보니 네 크라바트 매주기로 했지. 제이드 라누아.”

 

   잘 됐네. 아무래도 이유가 하나 더 늘겠어. 비뚜름한 미소가 걸린다. 새벽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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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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