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30 까마귀와 왕자님 (with. 엘란츠)

 

 

   제이드 라누아가 한여름 밤에 벌어진 난잡한 도박판의 판돈을 전부 챙겨 도주한 것은 뒷골목에서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동안 도박판 출몰이 드물었다는 쪽이 뒷골목 사람들의 의심을 샀다. 손을 털었다느니, 배신을 했다느니, 드디어 그놈이 칼을 맞고 죽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특히나 마지막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임에도, 쌍수를 들고 폭죽을 터뜨리며 격하게 환영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물론 당사자는 사지가 그 어느 때보다 아주 멀쩡한 상태였고고로 오늘도 무사 안일한 미래를 위하여 누구보다 먼저 발로 뛰는 영업을 자처해 지붕을 바쁘게 뛰어넘고 있었다.

 

   “저놈 잡아라!”

 

   전방에 격렬한 투지를 발산하는 무리가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정작 결심대로 붙잡는 것은 조금 어려워 보였다. 까마귀 깃털을 두어 개 머리에 단 인영이 지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기술은 평범한 이들이 시도하기에 지나치게 고난이도였다. 도약 한 번 없이 벽을 타고 높은 건물로 뛰어오른다. 실패한 주먹이 허공에 휘둘러졌다. 이 자식. 당장 돌려내라. 내 돈. 우리 돈. 하지만 그런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다. 금화를 닮은 눈 한 쌍이 장난스레 휘었다. 아아.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까마귀는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네고 건물의 가장 높은 부분을 향해 날아올랐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약 올리듯 뒤를 돌아 경례를 했다. 잔뜩 열이 받은 무리가 주먹이 아니라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휘두른다. 다음엔 반드시 네놈의 내장을 뽑아 줄넘기를 해주마. 대체 그런 끔찍한 짓을 왜 하려는지 모르겠지만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제이드는 가볍게 극구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깔끔히 거절의 의사를 전달한다.

 

   망할 자식. 저쪽으로 돌면 잡을 수 있을 거다. 누군가 퉁퉁한 손가락으로 번뜩이는 지시를 내렸다. 이크. 제이드는 한 발 빠르게 건물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이대로 뛰어내리면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거리를 잴 필요는 없었다. 뛰어내려도 무사히 착지할 자신이 있었다. 한두 번 한 솜씨도 아니고, 따라서 제이드는 서슴없이 높은 건물 아래로 몸을 던졌다. . 중간에 난간 모서리를 살짝 밟아 조금 더 멀리, 그러나 가볍게, 소리 없이, 그런데, 저게 뭐지그의 시선에 매우 신경 쓰이는 것이 들어왔다.

 

   은발?

 

   그리고 고개를 들고 제 위로 무언가 낙하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보라색이 감도는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그 순간 제이드 라누아가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그 짧은 순간에, 주마등이 스치고, 목이 원래 주인을 잃고 떨어져나간 것과, 왕실에 의해 샅샅이 분해되는 피같은 자신의 재산들과, 불타는 라누아 저택과, 애저녁에 승천한 자신을 가만 두지 않겠다며 울부짖는 아버지와, 지옥에서 못 박힌 몽둥이를 들고 기다리는 조모님, 그리고그리고아무튼,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바젤이시여. 떨어진다. 부딪힌다. 으악. 쿠당탕. 예정대로 엄청난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바젤은 그가 전례예물을 제때 바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전하아!!”

 

   맙소사. 전하. 나는 두목한테 죽었다. 이미 알아보고 전하, 라고 해버렸으니 도망도 못 간다. 벌떡 일어난 제이드가 제가 거하게 깔아뭉갰던 이를 서둘러 살폈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으윽. 고운 미간을 찌푸리고 쓰러진 남자가 신음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었으니, 묻는 제이드의 눈이 전에 없이 흔들리고 있다. 정말이지 당황스러웠다.

 

   누가 믿어줄까. 천하의 악당들을 피해 건물에서 뛰어내렸는데 아래에 있던 이가 하필 버미어의 왕자더라, . 엘란츠, 루에리, 버미어. 성기사단 루멘 글로리에의 기사단장이며, 그가 주군으로 정한 랑케아 왕녀의 오라비이기도 했다. 뭐랄까제가딱히전하께위해를가하기위해전하의위에떨어진것은아니잖습니까. 하하. 나머지 두 왕자녀에게 무릎을 꿇고 속사포로 사정을 읊는 자신의 모습이 선연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비스는, 두목은, 직접 화형대에 불을 붙일 것이다. 아니면 작두를 대령하라 명하든가. 진짜로.

 

   “자네는…… , 괜찮네. 걱정 말게.”

 

   뒤늦게 비척비척 일어난 엘란츠가 손을 들며 말했다. 제이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입을 뻐끔거렸다. 사고였으니까. 왕자는 아직 이름조차 듣지 못한 그를 안심시키려 푸스스 웃는다. 제이드 라누아입니다. 로열 글라디우스의, . 그래. 리리의 기사인가. 은색의 머리카락이 달빛에 빛나 비단처럼 반짝였다. 그런데 이 시간에 경이 이런 곳에 무슨 일이지? 눈썹이 올라가지 않고 처진다.

 

   “그건 그럴만한 사정이, 저어, 괜찮으십니까?”

   “허언이 아니라, 괜찮네.”

   “정말이십니까? 어디가 막, 어지러우시다거나

   “괜찮

   “, 두통이 이신다거나

   “으으음. 아니정말일세.”

   “왕왕 울리신다거나

   “하하. 정말이라니까. 못 믿겠어?”

 

   저어, 그렇지만, 피가 나는 걸요. 제이드가 조심스레 엘란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비꽃을 연상시키는 눈이 만개하듯 커진다. ? 가리킨 곳에 손을 대어본다. 가늘게 찍힌 붉은 생체 도장이 의외라 어하고 말을 끌었다. 괜찮지 않았나. 뒤로 넘어지면서 얼결에 붙잡은 나무판자 같은 것에 생채기가 난 모양이다. 왕자의 앞에 덜 만들어진 자세로 있는 그가 품 안을 뒤적여 깨끗한 손수건을 꺼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이마에 난 한 줄기 가는 상처를 금세 찾아내 부드럽게 닦고, 누른다. 엘란츠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수건을 이어받는다.

 

   “여기누르고 계시면 곧 멈출 겁니다. 심하진 않으니.”

 

   으응. 알았네. 역시 얼결에 대답을 한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마 잠행을 즐기고 계신 듯하니, 라는 말은 미처 이어지지 못했다. 마침 근처에서 저기 있다! 잡아라! 하는 외침이 들렸던 것이다. 찾아라, 따위가 아니었으니 이쪽을 어쨌든 본 셈이다. 제이드가 먼저 일어났다. 도통 무슨 일인지 파악 할 수 없는 엘란츠가 그새 무사히 멈춘 피를 닦아내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가려면 이거 잊지 않게 챙겨가게. 하지만 제이드가 붙잡은 것은 왕자의 손이었다. . 그냥 돌려주는 게 아니라 세탁을 해준다고 했어야 했나.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여하튼 전후 사정 설명 없이 무작정 붙잡고 달렸다. 라누아, 라누아 경? 당황한 엘란츠가 그를 불렀다.

 

   제이드는 제이드 나름대로 머리가 굴러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다신 되돌아오지 못할 만큼 내리막길을 향해 내달리는 미친 황소처럼 폭주하고 있었다. 큰일 났다. 졸지에 왕자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답이 없는 진흙탕에내몬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리는 이제 제이드 하나가 아니라 엘란츠까지 도합 둘을 쫓아왔다. 저 둘, 틀림없이 흑염소단이다. 아닙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즉시 부정했다.

 

   아까 내버려뒀으면 조금 달랐을까 싶었지만 이성을 잃은 자들이 저와 함께 있었던 이를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 같았다. . 무리 중 하나가 들고 있는 흉악한 삽자루가 얼핏 눈에 들어온다. . 저 삽. 저런 건 왜 들고 오는 거야. 묻어버리려고? 그는 엘란츠가 혹여라도 저런 것에 맞는다던가, 하는 끔찍한 상황을 가정하고 싶지 않았다. 검을 뽑으면 어떻게든 상황은 반전되겠지만 여러모로 그게 능사인 상황은 아니다.

 

   “이 쪽입니다.”

 

   그가 좁은 길로 접어들어 왕자를 안내했다. 꽤 복잡한 경로였다. 길에는 선득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길쭉하다. 엘란츠는 영문도 모른 채 밤하늘을 따라 뛰었다. 뜀박질이 멈춘 것은 소리가 좀처럼 정확한 방향을 찾지 못하고 근처를 맴돈다고 판단한 직후였다. 대충 따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제이드는 초조하게 머리를 쓸어올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적당한 것을 찾았다. ‘남부 산 맛 좋은 사과’. 뒤에는 당도가 아주 높은!’ 이라는 저렴하면서도 익숙한 문구. 귤보다 사과가 인기가 더 많았던가. 무도회 때 쓰고 돌아다녔던 상자는 저것보다 훨씬 작았다.

 

   “전하.”

 

   뒤 돌아선 제이드는 비장한 얼굴이었다.

 

   “…… ?”

   “부디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엘란츠의 눈앞에 어둠으로 뒤덮인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반드시. 그러니 잠시만. 외치는 목소리가 헐레벌떡 멀어져 간다. 발소리도 함께. 으아아아. 여기 그 유명한 흑염소단이 있습니다. 당신네들 판돈을 떼먹은 사기꾼도요. 여기. 여기요.

 

   그렇게 왕자는 홀로 남겨졌다.

 

 

*

 

 

   그는 왕자에게 대뜸 만행을 저질렀을지언정 약속대로 돌아오긴 했으나, 비교적 멀쩡했던 떠날 때의 모습과 달리 머리에 나뭇잎을 잔뜩 매달고 돌아왔다. 저를 쫓는 사람들을 떼어놓느라 덤불에 무작정 몸을 던져 숨었기 때문이다. 기실 특기대로 윗길을 통해 따돌렸으면 조금 더 수월했을 테지만 방금 전 같은 비극이 혹시라도 또 벌어질까 싶어 무리를 했다. 원래 재수가 없는 날은 끝까지 없는 법이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뒷골목은 고요하다.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임시방편으로 사과 상자를 덮어 씌워두고 오긴 했지만 정말 여태까지 그곳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설마. 왕궁으로 돌아가셨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거나. 그러나 누가 보아도 뒷길 한복판에, 지나치게 수상하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사과 상자를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했다. 아니. 잠깐. 많은 시간까지는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설마. 에이. 조심스레 다가가 불렀다. 전하. 그 때 분명히 보았다. 사과 상자가 저절로 움찔거리는 것을. 헛웃음이 나왔다.

 

   “…… 아직 안 돌아가셨습니까?”

 

   제이드는 사과 상자를 들어내며 말했다. 머리를 휘휘 흔드는 왕자에게서 달큰한 사과향이 풀풀 풍겼다. 경이,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았어. 엘란츠가 일어섰다. , .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랬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경이 약속대로 돌아왔으니,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뭐랄까, 특정 상황에서는 제법 멋있는 장면이 될 법도 했지만, 뒷골목에 버려진 사과 상자 안에서 쭈그려 앉아 무작정 기다렸을 현실을 떠올리면 썩 감동적인 장면은 못 됐다. 그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급한 것 같았는데일은 잘 처리 되었는가?”

   “…… 일단은요.”

 

   왕자가 옅게 웃었다. 그런가. 다행이군. 제이드는 새삼 흑염소단의 두목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더불어 로열 글라디우스의 기사단장과도, 다른 종류의 인물이다. 그나저나 전하께서는 이런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그가 정말로 궁금해져서 물었다. 왕자와 개인적인 친분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소속 기사단이 달라 공적인 태도 말고는 알거나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정말 잠행이십니까. 일단 사전에 찍은 것을 똑같이 골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엘란츠가 정문을 놔두고 월담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나 할까…… 으음.”

 

   왕자는 웬일인지 말끝을 흐린다.

 

   “. 혹시 자네는 알고 있나?”

   “무얼 말입니까?”

 

   내밀어진 검지 끝이 도드라져있다.

 

   “보통의서민들이 즐기는, 다소 사행성이 깃든 유희 말일세. 사실그걸 직접 내 눈으로 관망하고 싶어 나왔어.”

   “?”

 

   잘못 들었나 싶어 미간을 좁혔다.

 

   “그런 놀이판들이 어디서 벌어지는지 아는가?”

   “…… 도박판 말씀이시지요?”

   “그렇다네. 내 찾아 벌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저 궁금해서.”

 

   알다마다요. 안 그래도 방금 제가 그 중 하나를 말아먹고 오는 길인데. 그 바람에 전하께 사과 상자도 좀 씌웠고.

 

   “안내해 줄 수 있나?”

 

   제이드는 아니오, 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려다 엘란츠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제대로 바라보는 왕자의 보라색 눈동자는 몽롱하고 창망한 느낌이었다. 광활한 자색 호수에, 하늘에 뜬 달이 비친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은 한 박자 늦게 입술이 열린다. 글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요.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제이드였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뱉었다. 왕자는 환한 얼굴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그가 휘적휘적 앞서갔다. 어둠에 쉽게 녹아들어 자칫 놓칠 것만 같다. 반면에 은하수의 부스러진 먼지처럼 빛나는 이가 그를 쫓았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어둑한 뒷골목이 휘영청 밝다.

 

 

*

 

 

   얼뜨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허여멀건하고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여지없이 신참이었다. 신참을 노린 늙은 늑대들이 금세 모여들었다. 원탁에 다함께 둘러앉는다. 카드가 빠르게 돌아간다. 신참의 앞에, 규칙대로 카드 일곱 장이 놓였다. 첫 판은 아슬아슬하게 이기게 해 준다. 그게 사업 노하우다. 두 번째 판은 손쉽게 이기게 한다. 세 번째 판부터는, 조금 다른데, 아슬아슬하게 이겼으니 아슬아슬하게 질 차례다.

 

   얼뜨기 신참을 제외한원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눈빛을 교환했다. 빳빳한 카드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트리플. 남자가 먼저 외쳤다. 쿼드라. 맞은편의 다른 남자가 손을 들었다. 트리플이라 외친 남자는 부러 아쉬운 표정을 한다. 시선이 신참에게 집중되었다. 철저한 사전 작업 덕에 패가 좋은 것이 돌아갔을 리가 없다. 이 판은, 패배가 곧 운명이다. . 어서 패스라고 외쳐.

 

   “…… 으음.”

 

   제가 쥔 패를 갸웃대며 응시하던 신참이 옆머리를 긁었다. 신참의 뒤로 웬 새카만 남자가 시원한 맥주를 두 잔 들고 다가온다. 이거신참이 우물우물 그에게 자신의 패를 보여준다. 규칙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자인가. 쯧쯧. 지켜보던 이들이 혀를 찼다. 고개를 숙여 패를 살피던 그가 별안간 눈을 번쩍 빛냈다. 네에, 맞습니다. 더 이상 뭘 망설이시는지. 자신 있게 외치세요, 루에리님. 내가 펜타다! 라고요. 유쾌한 목소리에 테이블에 앉은 작자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그럴 리가.

 

   “, 펜타……?”

 

   엘란츠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테이블에 패를 보여주었다. 맞다. 부인할 수 없이 최고 득점인 펜타다. 알록달록한 카드들의 조합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제이드가 왕자의 옆에 차게 식은 맥주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재능 있으신 것 같은데, 혹시 이전에 배운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그가 해준 것은 규칙을 설명해 준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가지 팁 정도. 왕자는 고개를 순순히 가로저었다. 대단하시네요. 금색 눈이 샐쭉 호선을 그린다. 테이블 위에 올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잔을 들어 맥주를 마셨다. 밑가슴 아래가 선선하다.

 

   “또 한 판 하시겠습니까?”

 

   까마귀가 은근한 표정으로 잔을 흔든다. 발끈한 남자가 버럭 외치며 테이블을 내려쳤다. 이번엔 절대 봐 주지 않겠다. 이를 부드득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러시죠. 가볍게 긍정한다. 그렇게 또다시 카드가 돌았다. 다른 다섯 장의 카드가 엘란츠의 손에 쥐어진다. 저들이 짜고 손을 댄 것인지, 첫 합부터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왕자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에 어떤 선택이 가장 적합할 것인가. 벌어졌던 입술이 달싹인다. 정사도, 카드도, 선택도, 늘 연속적이라 어렵다. 다만 생각이 깊어질 뿐이다.

 

   돌연 긴 두 개의 손가락이 나타나 대신 카드를 선택한다. 어디 볼까요. 처음은 이게 좋겠군요. 함부로 딸려 올라가는 카드를 향해 시선이 따라붙었다. 복잡했던 온갖 것들이 타의에 의해 선뜻 휘발되어버린다. 검은 가시 덤불이 그려진 카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엘란츠는 흘끗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로 옆에서 잔뜩 신이 난 까마귀는 카드를 비교하는 것을 골똘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눈동자가 소륵, 구른다. ? 다음도 제가 받아서 할까요? 엘란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세. 내가 하지. 왕자가 카드에 재차 시선을 박았다.

 

   판은 길어졌다. 하지만 마침내 승패가 결정 났다. 왕자의 네 번째 승리였다.

 

   멋진데요. 솔직한 감상이었다. 제이드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진지하게 엘란츠를 흑염소단에 입단 시킬 수는 없을지를 고민했다. 버미어의 창창한 미래를 고려했을 때 당연히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었지만무엇보다 두목이 절대결사반대를 할 것이다그만큼 재능, 이라고 할까, 그것이 몹시 아까웠다. 울상을 하는 자들에게 카드를 막 돌려준 왕자는 미소 지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니까. 그가 이어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떠나기 직전 왕자가 이쪽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헛된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경고를 의미하는 단검을 테이블에 내리꽂는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니요. 매우 대단한 일입니다. 전하. 손을 턴 까마귀는 왕자를 따라 휘적휘적 걸었다. 전하, 는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그래서. 어떠셨습니까?”

 

   으음. 엘란츠는 말을 골랐다.

 

   “…… 모르겠는데.”

   “그렇죠? 원래 다 그렇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제이드가 빙긋 웃었다.

 

   “전하께서 상상하신 것과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고.”

 

   . 돌멩이 하나가 발에 채여 굴러갔다. 왕자는 그것을 바라본다. 도움은 되셨습니까. 까마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찾아 올 수도 없었을 테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는 히죽 웃었다. 다행입니다. 저는 전하께서 부딪힌 일이나 사과 상자 일로 꼼짝없이 경을 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움이 되었으니 이로써 형량이라도 조금 줄겠군요. 엘란츠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농담입니다.”

 

   물론 전하께오선 그리 생각지 않으셨겠지요. 왕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가 나를 잘 알아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르면서도 무작정 그런 말을 꺼낸 것인가. 따지자면 초면이었다. 분명 후자일 확률이 높을 것인데 이상하게 쉽사리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이그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나.”

 

   묵직한 미끼를 던졌다.

 

   “그거야 때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너무나 가벼이 넘겨버린다. , 넘긴 게 아니라 피했을지도 모른다. 유난히 발걸음도 가볍다. 엘란츠는 눈을 내리깔았다. 왕자가 멈춰서자 그도 가던 걸음을 멈춘다. 앞으로 펼쳐진 칠흑같이 어두운 골목길이 길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아닐세. 괜찮아. 엘란츠가 대답했다. 오늘 즐거웠네.

 

   괜찮아. 되새기듯 떨어져나온 말이 발등에 떨어진다. 불꽃이 탁, , 튀었다.

 

   “다음에는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인사드리지 않겠습니다.”

 

   제이드는 우아한 손짓으로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러길 바라네.”

 

   엘란츠가 피식 웃는다. 파문을 그리며 떠올랐던 것들이 비로소 가라앉았다.

   아마 단 둘이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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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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