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05 Qui ambulat in tenebris nescit quo vadat
―그 애를 지켜줘.
―누군가를 지키는 데는 능숙하지 않습니다.
* * *
서부. 바위사막. 광산마을, 로비고.
하필이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인적이 드문 낡은 건물의 2층.
습하다.
“‘aa’?”
“또 ‘aa’?”
그렇습니다. 또 aa입니다. 야아. 이거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이네요. 제이드 라누아는 팔자 좋게 의자에 늘어져 눈을 가늘게 뜨고 문서를 팔락팔락, 흔들었다. 광산마을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밀수꾼들의 자금 흐름을 기록한 문서이다. 흐음. 뭘까요. 그리젤다 마레가 그에게 다가와 문서를 건네받는다. aa. 확실히 aa라고 적혀있다. 도대체 어디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방 안을 거닐며 천천히 맴돌았다. 각종 문서들로 어지러운 책상 위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책상을 쓰던 이가 밀수꾼들의 세계에서 별 볼일 없는 위치에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제이드가 한껏 불량하게 앉아있는 의자도 그 치가 쓰던 것이었을 터다.
“이런 것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더 있을까요?”
“그럴… 거라고 생각해.”
두 사람은 함께 요 며칠 간 줄곧 이 장소와 비슷한 곳을 조사해왔다. 그 때마다 발견할 수 있었던 출처 ‘aa’가 적힌 문서들. 앞으로 로열 글라디우스의 이름으로 허가된 조사 마감일까지는 단 하루가 남았다. 흐음. 제이드는 책상에 엎드려 허공을 바라본다. aa. aa라. 아아―인가요. 여기가 서부이니 ‘바아아위’ 아닐까요. 안 그래도 주변에 온통 그것들뿐이잖아요. 아니면 ‘하아아이로트’ 혹은 ‘라데타아아’ 라든가. 라데타. 라데타? 라데타는 철자가 원래― 친절한 그녀는 그의 말을 들어주다가 한숨을 쉬며 제스― 하고 타이른다. 예예. ‘마아아레’ 선생님. 끝까지 장난스러운 태도다. 그리젤다가 책상에 손을 얹고 그와 시선을 맞춘다.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일단 그것들을 ‘조금 더’ 모아서 단장님께 가져다드리면― 기분이라도 ‘조금 더’ 나아지시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로열 글라디우스의 기사단장은 줄곧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기 있는 문서들을 포함해 여태까지 저희가 발견한 것들이 모든 밀수꾼들의 것을 대변한다기에는, 양이 너무 적습니다. 그러니 어딘가에 또 다른 장소가 있을 거고, 그곳에도 그 ‘aa’ 가 있다면.”
그 aa라는 거, 점점 더 수상하게 보이겠네요. 제이드는 싱긋 웃었다. 머리 뒤에 달린 까마귀 깃이 흔들린다. 보고서는 그리젤다 경이 써주실 거죠. 저는 그 날 배가 아플 예정― 악. 그리젤다의 손가락이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정확히 이마 중앙에 응징을 가했다. 그가 찌릿찌릿한 머리를 감싸고 폭삭 엎드렸다. 너무하십니다.
“좋아. 그럼 그 ‘aa’ 라는 걸 ‘조금 더’ 찾으려면 무엇부터 해야하지?”
그녀가 어깨를 폈다. 만 하루밖에 남지 않았으니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해.
“… 지금이야말로 선생님의 특기가 대두될 시점이 아닐까요.”
“응? 내 특기?”
제이드는 이마를 문지르며 입을 비죽였다.
“네. ‘아이들’ 이요.”
* * *
아이들은 모든 걸 알아. 잊을 만 하면 그녀는 말했다.
“… 솔직히, 실망입니다.”
제이드는 말라비틀어진 당근을 포크로 찍어 눌렀다. 그의 접시에는 타버린 오믈렛과 왠지 썩은 냄새가 나는 검은 콩조림, 그리고 방금 입에 넣은 당근 하나가 전부였다. 혹시 지옥에서 가져온 오믈렛인가요. ‘디럭스 런치 세트’ 라는 그럴 듯한 메뉴라 그나마 낫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지만 역시나다. 디럭스. 그냥 런치 세트도 아닌 디럭스잖아요. 이 근방 식당은 왜 다 이 모양이죠. 당근에서 정체불명의 시큼한 맛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삼킨 그리젤다가 말했다.
“조금만 참아. 어차피 정말 식사를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애초에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래도 말입니다, 하고 투덜거리는 제이드 앞에 앞치마를 두른 여자 아이 하나가 다 녹은 셔벗이 담긴 접시를 내려두었다. 후식입니다. 주홍색 말총머리를 한 여자 아이는 제법 싹싹하게 꾸벅 인사를 했다. 막 돌아서려는 찰나, 그리젤다는 소녀를 불러 세웠다. 얘, 잠깐만. 네? 돌아보는 소녀의 손에 반짝이는 동전 하나가 쥐어졌다. 그것을 확인한 눈이 둥그렇게 커진다.
“안녕. 예쁜 아가씨. 언니가 물어볼게 있어서 그래.”
살가운 말에 소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몸을 꼬았다. 주인의 눈치를 보는 듯 했다.
“괜찮아. 별 거 아니니까. 혹시 이 부근에서 …이런 문장들을 본 적 있니?”
언뜻 본 것 같은 것도 상관없단다. 언니랑 아저씨가 확인하러 갈게. 아니, 왜 저는 아저씨입니까― 주머니 안에서 종이를 꺼낸 그리젤다가 밀수꾼들이 흔히 사용하는 문장 몇 개를 보여주었다. 소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커졌다. 제이드가 솜씨 좋게 직접 베껴 그린 문장들을 이리저리 살핀다. 음― 한동안 종이를 바라보던 소녀는 갑자기 양 손을 뒤로 감추며 씩 웃었다. 귀여운 앞니가 하나 빠져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리젤다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간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누굴 참 닮았네. 그렇지? 명백하게 제이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가 불만스레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윽고 소녀의 작은 손에 동전 하나가 더 올라간다. 이젠 알겠니?
“마을 외곽에 건물이 하나 있는데― 거기 드나드는 아저씨들 혁대에 이 문장이 있었어요.”
소녀는 그리젤다의 귀에 제 손을 모아 속삭였다. 마을 외곽에? 소녀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상한 물건들 들여오는 아저씨들이요. 저희도 알거 다 알아요. 조그만 새가 혼자 신이 나서 삐약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눈이 샐쭉 휘었다. 그럼 혹시, 우리를 안내해 줄 수 있니? 근처까지라도. 그녀가 급히 소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중요한 일이야. 이 마을을 위한 일이란다. 당황한 소녀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죽 바라보던 제이드가 어깨를 으쓱인다. 무슨 그런 것까지 어린 아이 도움이 필요하겠습니까. 딱 보니, 겁도 많아 보이는데. 저희가 나눠서 직접 뒤지면 되죠.
“제스. 나도 알지만 지금은 시간이―”
“할 수 있어요.”
나 겁 안 나요. 약이 조금 오른 소녀가 발을 굴렀다. 제이드는 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소녀의 시선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리젤다가 반색하며 소녀를 껴안았다. 고마워. 언니가 사례는 꼭 할게. 소녀는 수줍게 헛기침을 했다. 베키라고 불러주세요. 제 이름, 베키라고 해요. 언니. 그리고 아저씨. 아저씨에 방점이 거나하게 찍혔다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으음. 저도 라슬로에선 인기가 꽤 많은데 말이죠. 그는 중얼거리며 턱을 긁적였다.
“좋았어. 알아냈으니 가 볼까, 제스?”
그녀는 의욕으로 가득 차서 일어났다.
“이왕 가는 거 비가 그치면 가면 안 될까요.”
제이드가 우중충한 창밖을 가리켰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 돼. 그리젤다는 귀 뒤로 머리를 넘겼다. 제이드는 어쩔 수 없이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주방 안으로 쏙 들어갔던 소녀가 둘렀던 앞치마를 모서리에 걸고 뛰어나온다. 조잡한 우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가요. 얼른. 주방장님이 오시면 또 입씨름을 해야한다구요. 소녀는 주머니에서 그리젤다가 준 동전이 바닥에 떨어지자 잽싸게 주워 식당 입구를 향해 달린다. 두 사람은 소녀가 달려가는 길을 그대로 답습하기 시작했다.
* * *
소녀가 안내한 건물은 마을 외곽 중에서도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녀는 이 근처에서 물을 떠온다고 했다. 건물 외관은 굉장히 허름한 편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마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어보였다. 제이드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런 데서 모종의 사건이 벌어진다면 밀거래가 아니라 혹 살인사건이 아닌지. 슬쩍 외벽을 긁어보니 돌 부스러기가 기다렸다는 듯 떨어졌다. 촛대에는 다 녹은 양초가 말라붙었고 구석마다 거미줄이 쳐져 있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 벽을 타고 파스스 사라진다. 풍기는 분위기마저 괴이했다. 안은 왜 인지 모르게 검붉었다. 세 사람은 차마 건물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우두커니 입구에 서 있었다.
“그… 사람들을 언제 보셨습니까. 한, 20년 전?”
“저 아직 열 살이거든요!”
발끈한 꼬마 숙녀가 눈을 흘겼다. 하지만 이상하네. 제가 그 사람들을 본 것은 겨우 사흘 전 일이었거든요. 고개가 갸웃, 하고 기울었다. 사흘 전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사람도 많고, 불도 번쩍번쩍 하고. 그리젤다가 잠시 기다려 보라며 말리기도 전에 제이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건물 안으로 거침없이 발을 들였다.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렸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로 건물 1층은 대부분 침수가 된 상태다. 걸음을 뗄 때마다 얕은 물이 찰박인다. 정말 사람이 오갔을지는 몰라도― 증거 같은 게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가 중얼거리며 젖은 의자의 목을 쓸었다.
“아무 것도 없니? ……그런 것 같네.”
그리젤다가 한 발 늦게 소녀와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보살펴주었다. 아래, 조심하렴. 낡은 서랍을 뒤적이자 젖은 종이 몇 개가 나왔다. 그러나 두 사람이 원하는 내용은 아니다. 뒤로 얼마 간 사실상 텅 빈 방을 서성이던 제이드는 계단 옆에 잠겨있는 벽장을 강제로 힘껏 잡아 뜯어냈다. 쾅. 우지직. 쿠궁. 덕분에 깜짝 놀란 소녀가 움찔거렸다. 벽장 안은 아직 젖지 않고 건사한 문서들 몇 뭉치가 남아있었다. 선생님, 이것 좀 보십시오. 아무거나 집어 휙휙 문서들을 넘기던 중 익숙한 단어가 보였다. aa. 그는 그녀에게 그것을 넘겼다.
“2층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젤다는 문서를 훑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보일 듯 말 듯 한 해답이 신기루처럼 일렁인다. 응. 우리도 곧 올라갈게. 그는 그녀와 소녀를 1층에 두고 계단을 올라 2층에 당도했다. 역시나 2층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장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챙긴 것 같았다. 제이드는 홀로 2층을 휘 둘러보다가 손을 탁탁, 털었다. 어디 볼까요. 금색으로 형형히 빛나는 한 쌍의 눈이 주위를 둘러 싼 어둠을 몰아내는 것 같았다.
“보물찾기는 언제나 재밌거든요.”
예를 들어서, 이런 거? 그는 바닥에 난 흠집을 금세 포착하고 그것을 당겼다. 짜잔. 바닥 아래에 교묘하게 숨겨져있던 작은 창고가 너무나 쉽게 만 천하에 드러났다. 제이드는 스스로에게 무한한 뿌듯함을 느끼며 예의 문서로 가득한 그곳에 손을 뻗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것들 또한 밀수꾼들과 관련된 문서들이다. 다른 곳으로 빼내기 전에 이곳에 일부를 감춰둔 것 같았다. aa. 찾았다. 이번에는 꽤 많은 양이다. 조사 자료로서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이 정도면 보고할 만한―
“와, 그건 뭐예요?”
어느 새 다가온 소녀가 그의 등 뒤에서 숨겨진 창고를 발견하고 감탄했다. 아저씨가 찾은 거죠. 멋지다. 그는 소녀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 아저씨가 좀 대단하긴 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모든 문서를 챙기기엔 무리가 있다. 그래서 1층에서 문서를 읽고 있을 그리젤다를 불러 올 생각이었다. 다른 분을 데리고 올 테니 여기 잠시만 계십시오.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그런데,
“제스!!”
갑자기 아래층에서 날카로운 금속 굉음이 터졌다.
* * *
“제스!!”
그리젤다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는 상황에 대한 고찰을 할 새도 없이 계단을 급히 뛰어 내려갔다. 1층에 내려서자마자 단검이 날카로운 기세로 날아왔다. 으앗. 몸을 숙여 피했으나 그게 끝이 아닌 듯 했다. 제스! 그리젤다는 쇄도하는 검을 방패로 쳐내 반격하며 외쳤다. 습격이다. 검을 뽑아, 라누아 경. 그녀가 한꺼번에 두 괴한을 상대하며 얼굴을 굳힌다. 그는 제 쪽으로 달려오는 괴한의 범위 안으로 불쑥 들어가 명치를 가격했다. 비틀거리던 괴한은 복부를 한 대 더 얻어맞고 쓰러졌다.
“음, 집주인이신가…? 세 놓으시려면 건물 보수를 좀 하셔야겠네요. 이게 다 뭡니까. 축축하게.”
제이드는 허리에 찬 단검을 빼들었다. 다시 날아오는 단검을 두 번 쳐내고 신속하게 엎드려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당황한 괴한이 넘어진 채로 허우적거리자 단검 옆에 차고 있던 작은 암기들 중 하나를 재빨리 꺼내 급소에 쑤셔 박았다. 켁. 켁. 부여잡은 목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괴한은 바르작거리다가 얼마 못가 절명한다. 도와드릴까요? 그가 그녀에게 넌지시 말했다. 우습게 보지 마. 그녀는 능숙하게 상대를 벽에 몰아붙여 어깨를 방패로 짓이긴다. 뼈가 대번에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휴.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제스! 뒤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머지 괴한 하나가 계단을 빠르게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베키! 베키가 위에 있어!
“그 애를 지켜줘!”
그녀는 아직 남아있는 괴한과 대치중인 상태였다. 제이드는 위층으로 간 자를 쫓아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소스라치게 놀란 소녀가 괴한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불행히도 소녀는 괴한의 진정한 목적일 확률이 구 할 이상일 숨겨진 창고 앞에 서 있었다. 목격자는 무조건 없애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어린 여자아이에게도 칼을 뽑아 달려들었다. 제이드가 급히 뒤에서 덮쳐 괴한을 저지시켰다. 우당탕. 큰 소리가 났다. 그는 소녀를 얼른 끌어당겼다. 하지만 소녀는 즉시 따라오지 않고 제이드가 골라두었던 문서 몇 개를 기어코 챙겼다. 이거 필요하잖아요. 뭐, 그렇긴 한데― 그가 소녀를 안아들고 창틀을 넘었다. 쥐새끼 같은! 괴한이 욕설을 뱉는다.
“뭐, 뭐, 뭐, 뭐하는 거예요!! 아악! 떨어진다!!”
“안 떨어져요. 괜찮습니다. 매일 하는 거라.”
은근히 상상을 초월한 높이에 잔뜩 굳어버린 소녀가 그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는 개의치 않고 폐건물 지붕들을 가볍게 돌파했다. 으악. 소녀가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어차피 남은 건 한 사람 정도였으니 그리젤다 쪽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강하다. 제이드는 당연히 그녀의 승리를 미리 확신하고 제가 닥친 상황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생각보다 끈질긴 괴한이었다. 거리를 벌리기가 의외로 쉽지 않았다.
그는 소녀를 안은 채로 뛰어내려 바닥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착지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달렸다. 다시 지형물을 올랐다. 혼자라면 이대로 저 자와 붙어도 상관없었으나 지금은 지켜야할 것이 있었다. 기사라고는 하나 제이드는 뭔가를 지키는 데 익숙하거나 능숙치 않았다. 그런 경험은 없다시피 했다. 누군가를 지키며 싸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지킴과 동시에 지켜야 할 사람도 지켜야 한다. 또한 상대를 꺾어야 하는 삼중고다. 차라리 소녀를 방어전에 능한 그리젤다에게 맡기고 자신이 적을 상대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상황이 급했다지만 착오였다. 소녀는 찾아낸 문서들을 꼭 쥐었다. 작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전 누군가를 지키는 데는 능숙하지 않습니다.”
“네? 그, 그게 무슨소리에요!”
그는 안고 있던 소녀를 급경사 아래로 떨어뜨렸다.
제대로 기겁한 소녀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런 상황에 멈칫한 괴한은 그에게 턱을 얻어맞았다. 아뿔싸, 하는 사이 단검이 명치에 정확히 꽂혔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던 괴한은 위태롭게 비틀거리다가 소녀가 떨어진 급경사 아래를 굴러갔다. 그것을 멀거니 지켜보다가 그도 경사를 타고 내려갔다. 아래에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푹신하게 깔린 짚단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죽을 뻔 했어요! 악을 썼다. 그런데 살았잖아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습니까. 전 지키는 데는 소질이 없습니다.”
“기사라면서!!”
“음…… 기사도 사람이니까요. 특기분야는 다 다르죠.”
“… 아저씨는 뭔데요?”
저는 월담 및 도주 담당입니다. 제이드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런 거 기사랑 전혀 관계없잖아! 소녀가 문서들을 집어던졌다. 팔락팔락, 종이가 나비처럼 날았다. …저는 갈래요. 소녀는 제가 홧김에 집어던진 문서를 갈무리해 제이드에게 주었다. 여기서부터는 갈 수 있어요. 나쁜 사람들도 없어진 것 같고, 이제 마을이니까. 짚단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소녀가 말했다. 새카만 아저씨는 그 예쁜 언니에게 가 보세요. 제이드는 멀뚱멀뚱 멀어지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혼자 가실 수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비도 오는데요.
“당연하잖아요! 다 컸다구요.”
소녀는 씩씩하게 골목 사이로 향했다. 파문이 이는 웅덩이에 즐거운 상이 비친다. 소녀가 곧장 가로지르는 좁은 골목 너머로는 두건을 쓴 여자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보였던 여자의 머리카락은 갈색과 금색이 버무려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뭐지. 물끄러미 응시하던 제이드는 홀린 듯이 걸음을 떼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어라.
앞서가던 길을 비추던 빛이 돌연 가늘어진다.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낯선 사람이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떼는 속도가 서서히 빨라졌다. 잠깐만요. 무작정 부르는 소리에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잠깐만요. 말총머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잠깐― 잠깐만요. 그의 손이, 소녀의 어깨를, 붙잡지, 못했다. 놓쳤다. 이런. 아까의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여기에, 또 하나. 손이 서늘하게 반짝인다. 어린 소녀가 아찔하게 비명을 질렀다. 시간이 태피처럼 마구 늘어진다. 끊어진다. 끊어진 것은 결코 다시 이어지지 않는다.
그는 작은 소녀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 애를 지켜줘.
―누군가를 지키는 데는 능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른쪽 얼굴이 통째로 날아가는 끔찍한 느낌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 * *
비가 내렸다.
어떡해요. 울먹이는 소리는 너무나 멀다. 모든 게 멀었다. 손틈 사이로 붉은 것이 물줄기를 만들며 한없이 흘러내렸다. 아저씨. 어떡해요. 가물거리는 의식이 이성의 문제인지 시야의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딛는 발밑마다 허공을 걷는 느낌이었다. 끊이지 않고 추락과 비상을 반복하는 중이다. 두통이 일었다. 이대로 폭발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헛웃음이 나왔다. 소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그치라고 말할 수 없었다.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괜찮다, 라. 생각이 여기저기 부딪혀 산란하게 부서진다. 어지럽다. 그는 고귀한 진청색 제복이 붉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얼굴의 절반이 갈래갈래 찢기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켜든다.
겉은 찼다. 하지만 속은 불이 끓고 있었다. 너무나 뜨거워서 손을 떼고 싶었다. 열기에 손마저 타들어간다. 그것은 끔찍하리만큼, 고통스러웠다. 틀어막은 손바닥이 축축했다. 어떡해요. 글쎄요, 어떡할까요.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되물었다.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어둠이 딱 절반을 갉아먹는 동안 나머지 빛은 복잡하게 울렁인다. 쏟아지는 비가, 붉은 것이, 쓰리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소멸하고. 어떡해요. 아저씨.
비슷한 기억이 있다. 격노한 부친이 머리를 내리쳤는데 잘못 내리쳤는지 얼마간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억지로 일어서면 모든 게 밑으로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덜 자란 제이드 라누아는, 바닥을 벌벌 기어서, 살고 싶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약이란 약은 모두 집어먹었었다. 그게 무슨 약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자신에게 삶에 대한 애착이 그리 많았을 줄은 몰랐다. 이성이 혼미했다. 그 때와 지금이 다른 게 뭐지, 라는 의문이 커졌다. 지금은 그저 텅 빈 껍데기가 된 것 같다. 그냥, 가서, 눕고, 싶은데. 어서. 다가가기 전에는 두 개로 상이 나눠졌던 짙푸른 깃발이 비로소 겹쳐 보였다. 입구에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파렐 경.”
그는 왼손으로 하얀 기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기사의 어깨도 빗물에 젖어 무거웠다. 뿌연 안개 같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그는 타들어가는 입술을 움직여 겨우 말한다. 이 아이, 마을에 파렐 경이 직접 데려다주세요. 하얀 기사는 대꾸가 없다. 언제나 그랬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끈적하고 불쾌한 감각이 손바닥과 손목을 타고 뚜욱. 낙하했다. 저는, 가볼 데가 있어서― 말끝에 선 외로운 문장이 영원히 늘어진다. 그리고 지나쳤다.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인지 멍청히 멈춰 서 있는 것인지 감각이 깎이다 못해 무뎌져 알기가 어렵다. 풍경이 절로 흐른다. 그래. 그게 맞는 것 같다. 두 다리는 대지에 매여 있고. 그는 웃었다.
푸른 덩어리들이 몇몇 씩 뭉쳐 옆으로 샌다. 개중에는 제멋대로 말을 하는 것이 있다. 소름 돋는 오한이 일었다. 보폭이 제멋대로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 제멋대로 소리를 치고,
퍽. 충격이 있다. 그는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하다가 중심을 잡았다.
“뭐야.”
붉은 것. 혼탁해져가는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울린다.
“……? 너, 얼굴이 왜 그래?”
번쩍이는 금빛. 뿌리쳤다.
걸었다.
의식이 급격히 짧아진다.
“제이드 라누아!”
점멸,
하는,
빛.
그리고 반점으로 뒤덮인 어
둠.
“야!”
“… 이상하네요, 에브닉 경.”
당신과 제가 서 있
는 이 세상이 조금 좁아진 것 같습니다.
아. 혹
시 저만 그렇게
느끼
는 건가
요.
아니면―
* * *
비가 그쳤다.
제이드 라누아의 한 쪽 눈이 결국 날아갔다더라, 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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