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12 누구나 말 못할 사정 하나쯤은 있지 (with. 비비안)
“하필 로열 글라디우스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뭡니까?”
막 목도를 내려치려던 비비안은 심드렁한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눈만 오롯이 빛나는 남자가 있었다. 의문의 남자는 한참 전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흙바닥에 주저앉아 비비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집안 사정입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굳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짧게 대꾸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래요? 정말 궁금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수긍한 남자는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자리를 뜨는가 싶었는데 나른하군요, 하고 툭 말을 던졌을 뿐이었다.
“…… 아무개 경은 할 일도 없습니까?”
아무개 경이라니. 제이드는 비비안의 말에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워낙 부지런한 성격이라 하루 일과 정도야 기상 후 한 시간 안에 다 마칩니다. 일어나서, 씻고, 식후 산책. 자 어떻습니까? 상당히 파격적인 일과였다. 생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노인의 일과도 저보다는 생산적이고 계획적일 것이다. 저런 유형의 사람이 자신이 지원하고자 하는 로열 글라디우스에 소속된 기사라니 새삼 회의감이 들었다. 비비안은 그가 입은 푸른 제복을 한 번 흘끔거리고 다시 몸 풀기에 집중했다. 막고, 찌르고, 막고― 세로, 세로, 가로. 목검이 허공을 빠르게 찔렀다. 발아래에서 거친 흙들이 죽 비벼지는 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신 웃는 얼굴이다. 신경이 쓰여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구경만 하시지 마시고 미래의 후배를 위해 귀띔이라든가, 해주는 게 어때요?”
“흐음― 성공적인 입단을 위한 노하우라. 봅시다. 기사단장님을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십시오. 여어! 혹은 이봐! 라든지, 이런 것은 안 됩니다. 아아, 정강이를 걷어차셔도 안 됩니다. 그 분은 왕녀 전하시니까.”
“명심하죠. 안 그래도 제 목숨은 한 개 뿐이거든요. 그 다음은요?”
“그리고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변하시면 됩니다.”
정말 주먹이 떨릴 만큼 도움이 되는 팁이었다. 당장 꺼지는 게 어떨지 친절하게 권유하고 싶었지만 휩쓸리지 않고 내면의 평화를 바르게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귀찮은 것은 질색이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비안은 그를 향해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비비안이 성공적으로 로열 글라디우스에 입단한 뒤 일 주일 만의 일이었다. 첫 휴일이었으므로 기사단저 주변을 가볍게 돌아볼 계획을 갖고 시작한 외출이다. 외벽을 따라 걷는 동안 햇살이 눈부시게 내렸다. 예상보다 뜨겁고 강한 햇살에 비비안은 푸른 눈을 찌푸렸다. 이대로는 얼마 가지 못하고 지칠 것이다. 벌써부터 그늘에 뛰어 들어가 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무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제치고 한적한 가로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 하아.”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비비안이 걸터앉은 돌은 차갑고 시원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선선하게 바람이 불었다. 덮었던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려 땀이 맺힌 이마가 드러났다. 그렇게 더 이상 어디 갈 생각도 없이 한동안 앉아있었다. 먼저 와 있었던 노인이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에 온 꼬마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떠날 때 까지도.
하지만 이어 덜그럭거리는 짐들을 잔뜩 짊어지고 그늘 안으로 기어코 들어온 남자 하나를 발견했을 때는 이 아까운 명당을 정녕 떠나야하는지를 고민했다. 비비안은 어쩔 수 없이 옆으로 조금 비켜났다. 그가 그늘 안으로 꾸역꾸역 가지고 들어온 짐이 엄청나게 비대하고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짐더미에 스친 굵은 나뭇가지가 우지직 부러졌다. 짐들이 즉시 그를 깔아뭉개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충 가늠해보아도 무게가 대단해 보였다. 사람이 저 정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그는 비비안처럼 바위에 걸터앉아 휴우, 하고 한숨을 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아. 선객이 계셨군요. 날씨가 참 좋습니다.”
“…… 네. 저기……”
비비안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짐을 살피던 그가 돌아보았다. 아는 얼굴이 빙긋 웃었다.
“그 무시무시한 짐들은 다 뭡니까? 라누아 경.”
“아아. 오늘 팔 물건들입니다. 일종의 사업이랄까요. 잠시 실례―”
그는 짐을 풀어 두꺼운 나무판자들을 골라 꺼내기 시작했다. 짐더미 부피의 절반이 금세 줄어들었다. 능숙하게 세워지고 눕혀지는 판자들을 구경하는 동안 더위가 또 한 번 식는다. 곧 허리 높이의 훌륭한 좌판대가 완성되었다. 탁탁, 뿌듯하게 손을 털었다. 재차 짐 안으로 불쑥 집어넣은 그의 손에 잡다한 장신구와 정체불명의 그림들이 그려진 종이들, 생필품 몇 가지가 잡혀 나와 좌판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비비안은 흥미롭게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마지막으로 자수정으로 장식된 수상한 팔찌까지 모두 진열되며 오늘도 그의 행복한 미래설계를 위한 첫 걸음이 떼어졌다.
“이건 굉장하네요.”
비비안은 매혹적인 자태의 자수정 팔찌를 가리켰다.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800셀입니다, 친애하는 고객님.”
“산다고는 안했어요. … 그런데 이렇게 장사를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라누아 경은 연차도 꽤 되는 것으로 아는데. 으음, 보기보다 씀씀이가 굉장히 크신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달 지출이 평균 10에서 20셀 정도로, 마땅히 근검절약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사실이라면 그것은 이미 근검절약의 수준이 아니었다. 평민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치는 지출이었다. 그의 주장은 존경이 아니라 수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비비안은 평기사의 초봉이 1000셀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나머지 990셀은 죄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하늘로인가 땅으로인가.
“집안 사정입니다.”
담백하게 답변한 제이드 라누아는 장난스레 웃었다. 첫 만남에서의 복수인가. 허탈하게 웃고 그래요? 라고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조금 더 자리를 옮겨 다가가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비비안은 좌판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진 카드 덱을 들어올렸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꽤 괜찮은 솜씨다.
“…저도 장사라면 좀 할 줄 압니다. 저의 가문은 ‘돈’ 과 제법 가깝거든요.”
물건들을 살피는 푸른 눈동자는 연못 같았다. 수초들이 어지러이 섞인 푸른 연못.
“도와드릴까요?”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들리는 제안에 제이드는 뭐― 좋습니다, 라고 선뜻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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