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06 바젤께서 가라사대 

 

 

   분노하는 벼락, 천벌을 내리는 자, 그리고 심판자’. 뇌우를 신이 호령하는 목소리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현재 대륙의 40%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대국 버미어는 건국의 주춧돌이 된 루 페리 영지 시절에서부터 뇌우의 신 바젤을 섬겨왔다. 부정함에 대한 지엄한 분노로 하늘을 울리고 구름을 찢으며, 땅을 불태운다는 바젤의 위대한 뜻은 칸자크, 레르케, 델메트로니아, 시오인을 넘어 가장 위대한 현대 종교인 바젤 신교에 의해 널리 전파되고 있다. 신교에서는 최초의 네 가지 전언을 채택하는 모든 교리의 근간으로 삼고 가장 큰 율법으로 명시한다. 바젤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말라. 이웃의 죄를 탓하지 말라. 남에게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 바젤 신전의 입구마다 반드시 쓰여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문장들이다. 바젤을 섬기는 버미어의 국민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신조가 담긴.

 

   그런 의미에서 제이드 라누아는 현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국가는,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가 직접 나서서 교리를 거스르는 패륜아가 될 것을 자신에게 종용하고 있었다. 참으로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이지 않은가. 대체 언제부터 제이드 라누아가 위대한 바젤의 성실한 종이자 신도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온전히 그가 생각하기에) 이 부당한 상황을 죄다 국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 네 가지 율법 중 남에게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라는 항목을 어길 최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물론 그 짧은 문장에는 훨씬 심오하고 보다 깊은, 진정한 뜻이 담겨있었으나 바젤 신교 신도를 이제 막 자처한 제이드 라누아가 알 리도 없었고, 달리 알 바도 아니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머리 위를 내리쬐는 뙤약볕은 몹시 따가웠다. 국가와 기사단의 사정이야 어쨌든, 당장 알몸으로 시원한 강물에 뛰어들고 싶을 만큼.

 

   “…… .”

 

   이내 단상 위로 올라오는 자신의 상대를 보며 그의 입술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감탄도, 분노도, 절망도 뭣도 아닌 제 3의 종류였다. 마침내 마주 선 두 사람을 위해 백성들이 주먹을 위로 뻗으며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어찌나 큰 소리인지 귀에서 잠시 이명이 울렸다. 현기증이 이는 듯 한 착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마치 지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매우 느릿하게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슬프다. 이렇게 바젤의 뜻을 어기게 되는가.

 

   그의 1회전 상대, 루멘 글로리에 기사단 소속의 라이사 니키티치 올란드 경은 이미 대전 전부터 성령충만한 의욕을 온 몸에서 광휘처럼 뿜어내는 상태였다. 그는 대번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그것이 몹시 과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라이사 경을 떠올리자면 성기사로서 갖는 바젤에 대한 신심보다 엘란츠 왕자를 향한 충성과 본인 자체의 호쾌하고 호전적인 성품 및 의욕에 가까웠으나 상황 자체에 학을 뗀 이상 본질이 무엇이든 의욕이 바다 저 밑까지 떨어지는 데 충분히 일조하고 있었다.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전 재산을 헌납하겠습니다. 바젤이시여.”

 

   본인 앞의 재산이라고는 낡은 동전 몇 개가 다인 것을 간과한 것인지, 아니면 바젤이 그의 형편없는 자금 상황을 진작 알고 무시한 탓인지 기도는 고스란히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대신에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의 상호 경례가 끝나자마자 심판의 신호와 함께 경기가 칼같이 시작되었다.

 

   “저기, 올란드 경우왓!”

 

   어설프게 든 검과 거대한 양손 검이 부딪히며 믿기 어려울 만큼 시끄러운 굉음이 났다. 시작부터 벌어진 엄청난 상황에 백성들은 열렬히 박수를 쳤다. 기사 간의 결투는 흔히 보기 어려운 그림이다. 초합에 온 힘을 다해 내려친 상대 덕에 그는 보기 좋게 얼이 빠져있었다. 방금 전은 하마터면 진짜로 몸이 쪼개질 뻔 했다. 좋게 봐줘도 최소한 전장 이탈이었다. 어쩌다 가까스로 방어에 성공했지만 팔도 손도 온몸이 얼얼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무심코 상석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무심한 표정의 랑케아 왕녀, 로열 글라디우스의 기사단장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란츠 기사단장님을 위하여!”

   “…… 이거 정말 돌아버리겠군.”

 

   그 짧은 순간에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바닥을 잽싸게 굴러 검을 찔렀다. 그러나 깊이가 너무 얕았던 것이 컸다. 부웅,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검이 길게 휘둘러졌다. 아슬아슬하게 뺨에 가는 자상만을 남기고 합이 끝났다. 아니, 끝난 줄 알았던 공격은 돌진하는 라이사에 의해 반쯤은 강제로 속개되었다. 좀처럼 오지 않는 틈을 타 검 날을 따라 빠르게 붙었다. 그리고 그대로 반격. 검을 쥐고 있던 손등에 세로로 긴 상처가 났다. 하지만 그다지 큰 타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이드 라누아가 노린 수는 그 다음이었다. 그렇지만,

 

   “…… ……!!”

   “멋졌습니다.”

 

   검을 정면으로 쳐내며 라이사는 들릴 듯 말듯 속삭였다. 회심의 공격이 무로 돌아간 제이드도 기계적으로 마주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훈련을 요령으로 때우는 횟수도 조금 줄일 걸 그랬나. 하여튼 그만 두겠다는 생각만은 절대 빈말로도 하지 않았다.

 

   “갑니다.”

 

   분위기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것을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는지 라이사가 다시 검을 바로 잡는다. 제이드도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었다. 다만 누가 보아도 의욕을 상실한 자의 태도였다. 기사라면 섬기는 주군을 위해 전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거늘, 라이사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 자는 대전 상대를 모욕하지 않는 최저의 선을 겨우 유지하는 게 다였다. 대적할 수 없는 실력의 상대를 만나 전투 의지를 상실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제이드 라누아는 상호 경례를 한 그 시점부터 꾸준히 저 모양이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승부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생각에 자세를 고쳤다. 엘란츠 왕자님을 위하여.

 

   “…… 사실 검술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

 

   뜬금없는 발화에 라이사는 반사적으로 되묻는 반응을 보인다.

 

   “그게, 적성에 안 맞아요.”

 

   투자한 만큼 이윤이 안 남더라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실없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라이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양손 검이라면 날이 둔하고 무식하게 때려 부수기 위한 칼이라는 편견이 많지만, 보기보다 절삭력이 우수하고 치명적인 검이다. 간신히 방어에 성공한 제이드도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차라리 맨손 격투라면 꽤 자신 있는데. 달리기 시합이라거나그런 거라면 자신이 왕재로 모시는 왕녀님께 틀림없이 승리를 안겼을 터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아까는 뭐 얼마나 달랐겠느냐마는

 

   그는 폼멜로 정확하게 라이사의 손목을 가격했다. 그리고 잔상으로 그려지는 부채꼴. 노련하게 얼른 반 보 후퇴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놓칠 뻔 한 검을 집요하게 붙잡으며 라이사는 그를 조금 더 물러서게 해 거리를 벌렸다. 다가올 2회전을 대비하기 위해선 체력 안배도 중요하기에 무리하게 더 끌 필요가 없다. 이제 승패를 결정할 순간이다. 특유의 호전적인 투지가 재차 불끈 솟았다. 결착점은 지금이 될 것이다. 반드시 승리하여 아직은 주인 없는 영광을 왕자와 기사단과 본인의 영광으로 만들 것이다.

 

   “으음 …….”

 

   이대로는 몸이 남아나지 않겠다. 동상이몽. 딱 그 짝이었다. 같은 경기장 위에 서 있었으나 그는 열렬히 불타는 라이사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적당히 넘겨서 기권을, 아니지. 그건 좀 자존심 상하고.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승패의 결과를 넘은, 그런 영역까지 왕녀에게 별 볼일 없는 자라고 찍히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그 때백만 년 전 계산을 끝낸 라이사가 그를 향해 돌진했다. 예상보다 대단히 의욕적이었다. 일순간 제이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라이사 니키티치 올란드 경의 승리입니다!”

 

   잠시 후, 다행히 꼴사납게 경기장에 뻗어 있는 것만은 면했다. 그는 물리적인 충격 여파 때문에 간헐적으로 떨리는 제 손목을 감쌌다. 기적적으로 방어에 성공하긴 했으나 의외의 상황이 있었다면, 표현 그대로 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하하. 그는 허망하게 웃으며 칼자루를 던졌다.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전투. 라이사의 마지막 일격으로 승패가 완전히 결정 났다. 승리한 라이사가 주먹을 불끈 쥔다. 앞으로 한 사람 더. 그리고 옷에 묻은 흙먼지들을 툭툭 터는 제이드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축하드립니다. 올란드 경. 멋진 승부였습니다.”

 

   경기장에서 내려온 그는 어딘가 진심으로 기뻐보였다. 다분히 영혼이 담긴 표정이었다.

 

   “멋진 승부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럼 저는 이제숙소에 가서……

 

   씻고, 뒹굴어야지. 느긋하게 새 사업 구상이나 하면서. 그러자 라이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라누아 경. 어제 기사단에 도착한 공문을 다 안 읽어 보셨습니까? 라누아 경도 아직 한 경기 더 남았습니다. 한 사람 당 무조건 두 경기 씩입니다.”

 

   그의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쾌한 목욕은? 따뜻한 식사는? 밝고 건강한 미래를 위한 사업구상은? 동시에 자신이 공문을 엄청나게 대충 읽어 내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헛된 희망을 자초한 셈이다. 가히 절망적이었다. 주먹으로 벽을 치며 몸을 떨었다. 라이사는 겸연쩍게 뺨을 긁으며 다음 경기를 위해 뒤편으로 사라졌다. 왠지 얼른 자리를 피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제이드 라누아의 첫 경기는 그렇게 엉성하게 막을 내렸다.

   곧 에곤 르웰린 아르망 경과 라이사 니키티치 올란드 경의 두 번째 경기가 있을 것이다.

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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