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11 소녀의 순정은 백만셀짜리 순정 (with. 에곤)
저번 주 수요일이었어요. 네. 그 엄청 더웠던 날이요. 저의 일흔 일곱 번째 공연이 정확히 3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저는 리허설에 참가하기 위해 극장에 가는 길이었어요. 극장은 묵고 있는 여관에서 30분 정도만 걸어가면 돼요. 생각보다 금방이니까. 그래도 말씀드렸잖아요. 아시죠, 그 날은 엄청 더웠기 때문에 그 30분조차도 무척 괴로웠어요. 이래서 여름은 딱 질색이야. 여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당장 달고 시원한 게 먹고싶었어요. 예를 들면…… 셔벗 같은.
그래서 더위도 식힐 겸 짬을 내서 디저트 가게에 들러 셔벗을 먹고―그러고 보니까 그 가게 주인이 엄청났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해드릴게요― 그늘이 있는 길로 돌아서 가기로 했어요. 좀 더 걷더라도요. 그늘진 길은 위험하다고요? 저의 흰 피부가 타버리면 어떡해요? 이봐요, 저는 배우라고요. 일흔 여섯 번이나 공연을 한, 대 여배우요. 노래도 부르고 연기도 하는 만능 재주꾼이 바로 저랍니다.
하아. 뭐, 제 잘못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죠. 네. 인정해요. 연약한 저 혼자 그 험한 길에 들어가서는 안됐어요. 하지만 몰랐다고요. 저란들 그 날, 그 길에서, 못된 건달들이 셋이나 모여서 기다릴 줄 알았겠어요? 안일했어요. 네. 네.
그들은 절 둘러쌌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처음에는 소리를 지를까 했죠. 그들 중 하나가 저에게 칼을 들이밀지 않았다면요. 칼을 본 순간 온 몸이 얼어붙더군요. 칼로 제 턱을 무례하게 들어 올리면서 가진 돈을 다 내놓으라고 했어요. 돈이요. 네. 쓰레기 같은 녀석들. 그런데, 전 가진 돈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왜냐면… 디저트 가게에서 셔벗을 사먹을, 딱 그 정도의 돈만 가지고 나왔단 말이죠. 미리 가격도 알아가서요. 충동구매나 예기치 않은 과소비는 딱 질색이에요.
제가 돈이 없다는 걸 알아챈 건달들은 흥미가 떨어졌는지 겁을 주었어요. 자기들이 이 구역의 제일가는 미친놈들이라면서― 알게 뭐야. 하여튼,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어요. 제 손목을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 들었죠. 저는 끝까지 반항했지만 저처럼 가녀린 여성이 싸움꾼들을 이기는 것이 어디 쉽나요. 아아. 정말 무서웠어요…… 정말로. 잠깐, 뭐죠? 그 표정은?
그 때였어요.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신 기사님이 감히 제 손목을 붙잡은 그 건달의 손을 잡아채 떼어내셨어요. 그리고 저를 등 뒤로 숨기셨죠. 분명 보호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걸 거예요. 기사님은 말 한마디 없이 강렬한 눈빛만으로 건달들을 제압하셨어요. 세상에. 건달들 따위는 그 분의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겨우 길에서 심심하면 주먹질이나 하는 건달 나부랭이가 고귀한 버미어의 기사님을 전투, 기품, 성품, 그 어느 면에서도 이길 수 있을 리 없죠. 정말 멋졌어요. 그 분은 마치 동화 속에서 읽은 백마를 탄 기사님 같았답니다.
쓸데없는 싸움은 좋지 않습니다. 물러나십시오. 아아아. 그래요. 맞아요. 저는 가슴이 뛰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이 감정… 어쩜 목소리마저 그렇게 좋으실까. 기사님은 진중하시고 과묵하신 분이신 것 같았어요. 오, 더 이상의 말씀은 없으셨지만 다행히 그 머저리 같은 건달 자식들도 눈치는 있었겠죠. 건달들은 꼴사납게 뒷걸음질을 몇 번 하다가 곧 꽁무니를 빼고 도망쳤습니다. 흥. 속이 다 후련했어요.
어쨌든 저는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이게 다 그 기사님 덕분이에요. 그 분이 저를 외면하셨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지도 몰라요. 물론 위험에 처한 여성을 외면하실 분이 아니겠죠… 따뜻하신 분… 네. 확신해요. 틀림없어요. 그 분은 세상에서 가장 기사다운 기사님이에요. 마치 달빛 아래에 선 고고한 늑대 한 마리… 태초의 바젤께서 직접 서임하신 기사… 보혈을 상징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붉은 제복이 잘 어울리고, 그리고― 그런데… 전 보았어요… 보고 말았어요. 혹여 그것만으로도 저를 도와주신 그 기사님께 무례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 걱정했어요. 아아, 이해하시겠어요? 마음이 너무 아팠는데… 그게, 그 분의 손가락이…… 제스, 듣고 있어요?
“예?”
“듣고 있냐구욧!”
다이애나는 눈을 부릅뜨며 양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아가씨의 양 갈래로 땋은 검은 머리가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쌓인 상자 위에 편히 걸터앉은 제이드는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손등으로 훔쳤다. 유명한 제빵사인 원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요깃거리로 챙겨온 것이라 맛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로 맛이 없었다.
“뭐가 말입니까?”
그녀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우두둑 꺾자 아직 삶에 못 다한 미련이 남아있던 제이드는 급히 대답을 정정했다.
“오, 정말 멋진 기사님이군요. 하마터면 저도 반할 뻔 했습니다.”
다시 정정했다.
“저보다는 다이애나 양과 훨씬 어울리시겠지만.”
그가 생긋 웃었다. 다이애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않았어도 저 번들번들하고 곱상한 상판을 사포로 백 번쯤 갈아버렸을 것이다. 소녀의 순정은 상황을 불문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한 감정이다. 그녀의 극단적인 주장에 의하면 백합처럼 순수한 그 마음을 무시하는 자들은 모두 불한당들이었다. 제이드 라누아는 한참 전에 불한당 명단에 올라온 상태였다. 그녀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씩씩한 보폭으로 다가와 널브러진 상자 중 하나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가씨. 살갑고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달랬다. 새카만 까마귀 깃털을 머리 뒤에 늘어뜨린 그는 턱을 괴고 좀 더 높이 쌓인 상자 위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생각에 잠겨 다리를 흔들다가 그를 쏘아보았다.
“그 기사님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안됩니다.”
예상 밖으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왜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발끈해 소리를 질렀다. 흐음, 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팔짱을 낀 그는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금빛 눈동자가 무언가를 회상하듯 북동쪽을 향했다. 이유를 재차 캐물으며 펄펄 뛸 줄 알았던 다이애나는 잔뜩 불만어린 표정을 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제법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답변을 기다렸다.
“일단 다이애나 양이 만났다는 그 기사분이 누군지는 알 것 같습니다.”
“…… 진짜요? 그 분을 아세요?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죠? 성함은요? 어디 출신이세요? 취미는요? 특기는요? 좋아하는 음식은? 이상형은요?”
“어, 그 정도로 절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제이드는 말을 아꼈다.
“지난번 경합에서, 저의 상대이기도 하셨습니다. 그 기사님의 성함은 에곤 르웰린 아르망. 클로비스 왕자 전하가 기사단장으로 계시는 에피니치움의 기사입니다.”
에곤, 르웰린, 아르망. 조심스럽게 입 안에서 되뇌어보던 다이애나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어쩜― 이름까지도 신사적으로 완벽하시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손을 모으고 꺄야, 작게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왕자 전하가 기사단장으로 계시는 기사단의 기사님이라니!
“그런데 왜 안된다는 거예요?”
“불가능하니까요.”
“네? 불가능하다구요?”
“어…… 그러니까― 일종의… 정상적인… 어떤… 대화와 만남이요.”
에곤 경은 인간초월적인 의욕수준을 자랑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뒤의 일은 다이애나에게 모두 떠넘기는 셈 치고 차치하고서라도, 두 사람의 만남을 정상적으로 주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보였다. 실 사례를 하나 들려드리죠. 그는 며칠 전 기사들끼리 했던 10셀 짜리 내기를 떠올렸다. 일명 ‘에곤 경과 저녁 산책하기’. 겨우 저녁 산책으로 기사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 내기가 걸릴 만큼 에곤 경의 명성은 드높았다. 그 명성이란 게 당최 무엇인고 하니, ‘아무 것도 없기로’. 매사 말수도, 행동도, 감정도, 반응도 이렇다 할 게 없었다. 늘 가라앉아 있는 사내. 겪어본 바로는 모든 자극을 공허하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누군가 비유하기를 들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는 늙은 개라고 했던가. 참 멋스런 비유다. 또한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가슴 깊이 동의하는 바이다. 없는 사돈의 팔촌까지 부지런히 팔아가며 어떻게든 10셀 짜리 산책을 위해 부단히도 애썼건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제 조모님께서는 산책이라면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 정원으로 헐레벌떡 나가셨답니다. 그 때마다 따라 나가 신발을 신겨드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하하. 짓궂으신 노인네 같으니라고. 에곤은 끝내 ‘그렇습니까’ 단 한마디만 남기고 매정히 떠나갔다. 확인사살마저 당한 기분이었다. 비교적 자신만만하게 도전에 응한 그는 명성대로 썰렁한 반응만 얻고 자식 같은 돈 10셀을 술값에 보태도록 내놓아야만 했다. 무작정 덤볐다가 뼈저리게 치른 대가였다. 아무래도 그 기사의 정신은 육체와 분리되어 저 아래 지옥 무저갱 어딘가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짧은 회상을 마친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 어떻습니까.
“좋아요.”
“뭐가 말입니까?”
“맙소사. 생각보다 훨씬 점잖고 올곧으신 분이셨군요. 정말 멋져……”
“…… 어떻게 하면 그렇게 결론이 납니까?”
다이애나의 뺨이 발갛게 물드는 것을 본 제이드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아직도 날린 10셀만 생각하면 아까워 죽겠다. 그 10셀 짜리에 이름도 붙여줬는데 말이지, 세바스찬이라고. 아아 세바스찬. 너는 지금쯤 술집 주인장 금고 안을 마음껏 굴러다니고 있겠지. 아빠는 네가 너무 그립단다. 우리의 생이별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어. 그렇지? 음, 잠깐. 세바스찬이 아니라 피터였나.
“제스. 부탁이 있어요.”
불안감이 엄습했다. 제이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음 주 토요일이 라슬로에서 있는 저의 마지막 공연이에요. 딱 일 주일 남았죠. 그 분이 제 공연을 보러 오게 해주세요.”
그건 너무 경이로운 난이도잖아. 제이드는 딱 잘라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100셀.”
아까 10셀을 잃었다고 하셨죠? 다이애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 아가씨는 아주 잘나가는 상단 주인의 외동딸이다. 서민 한 달 생활비 정도는 하루 안에 용돈이라는 자잘한 명분으로 별다른 가책 없이 해치울 도량이 되는 아가씨였다. 아까 본인의 입으로 과소비나 충동소비는 안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은데 뭐 어떠랴. 사람의 마음이란 게 때론 바뀔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소비패턴이 조금 바뀐다고 하여 누가 죽고 사는 일은 아니다. 100셀이 부족한가요? 그럼 200셀. 판돈이 두 배로 불었다. 어, 생각해보니까 에곤 경도 사람인 것 같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고개를 불쑥 쳐들었다. 여차하면 기절시켜서라도 데리고 오면 된다. 알 게 뭐람.
“아가씨를 위한 백마 탄 기사님을 성심을 다해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딜이 성립했다.
*
첫째 날.
“에곤 경.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늦은 식사 중이던 에곤의 앞에 나타난 제이드는 의자를 좀 더 당겨 앉았다.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에곤은 그를 기억했다. 대뜸 다가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검은 머리의 남자. 일전에 경합에서 상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교류는 없었다. 아마 이 남자는 내기에 돈을 걸었을 것이다. 기사들이 요즘 저를 두고 내기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뭐라더라, 자신과 저녁 산책을 하는 데 거는 내기였던가. 썩 달갑지 못한 관심에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굳이 소란을 피우거나 따지거나 하여 그 이상의 불필요한 관심을 끄는 일은 더 사양이다. 어차피 금방 시들해지면 끝날 일이었다. 다시 혼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그 날도 그렇게 넘겼다. 하지만 그 남자는, 또 한 번 자신의 앞에 앉았다. 에곤은 예상치 못한 재회에 침묵했다.
“저와 연극을 보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 …….”
식은 스튜를 뜨던 손이 공중에 멈췄다. 침착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통상의 식사시간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이라 꿍꿍이를 숨기고 뭉친 무리들이라든가, 이쪽을 보며 킬킬 웃는 자들은 없었다. 뭐랄까, 내기의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에곤은 이 남자의 괴상한 제안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 싫습니다.”
물론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이드는 예상했다는 듯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둘째 날.
“에곤 경. 훈련 일과 끝나고 시간 되십니까?”
“…… 무슨 일로…?”
제이드는 간이 탈의실에서 환복을 막 마치고 나온 에곤을 찾아갔다. 마침 뙤약볕이 무척이나 뜨겁고 강한 날이었다. 수도시설이 마련된 한 쪽에서는 서로에게 시원한 물을 끼얹는 기사들이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고된 훈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에곤은 기사들이 튀긴 물로 젖어버린 머리를 천으로 대충 문지르며 대꾸했다. 하필 푸른 제복을 입은 이방인의 등장에 검붉은 제복을 입은 이들이 일제히 그 쪽을 바라보았다. 저 자는 나름 유명인사가 아니던가. 로열 글라디우스의 제이드 라누아를 알아본 에피니치움 기사 몇 명이 웃었다. 볼수록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저와 연극을 보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 …….”
순식간에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왁자지껄하던 연무장에서는 졸졸졸, 물이 흘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에곤은 머리를 문지르고 있던 천을 내려놓았다. 제이드의 황금빛 두 눈은 쓸데없이 의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200셀을 향한, 과다한 의욕 말이다. 물욕에 의한 의욕. 으흠. 연무장을 누비던 나머지 기사들이 목을 가다듬으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주었다. 에곤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 저는 어제 분명히 거절했을 텐데요.”
“아! 그러지 말고― 에곤 경!”
“…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번에도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제이드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괜찮아. 이 정도는 예상했다. 세 번까지는 괜찮다. 지나가던 에피니치움 기사들이 그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뭐야, 뭔데? 텅 빈 연무장에 혼자 남겨진 그는 영문을 몰라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 잠깐, 그런 거 아닙니다만!!”
뒤늦게 외쳐봤으나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셋째 날.
“에곤 경!”
“…… …….”
에곤은 슬슬 피곤해지고 있었다. 저 사람, 대체 목적이 뭘까. 설마 오늘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느릿하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에곤 경.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돌리는 손길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스물아홉 시간 만이지요. 뻔뻔스럽게 운을 떼며 호선을 그리는 눈은 제 시선보다 약간 위에 위치하고 있다.
“연극 보러갑시다.”
“싫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일관된 제안이었다. 다만 시도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엄청나게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수식어들을 모두 제한 뒤 담백하게 도전해보겠다 마음먹은 것은 제이드 본인의 의지였다. 10셀 짜리 경험이 가져다 준 교훈이었다. 이 사람을 공략하기에는 그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괜히 입을 촉새처럼 나불거렸다간 입만 피곤하고 다 튕겨져 나올 테니 차라리 거대한 몽둥이 하나로 꾸준히 두들겨 패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에곤은 생각해볼 일말의 여지조차 없다는 듯 그의 제안을 깔끔하게 거절했다.
넷째 날.
“에곤 경!!”
이 날은 아예 무시당했다. 제이드는 에곤의 걷는 속도가 의외로 빠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섯째 날.
“에곤 경! 거기 멈춰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아직도 제게 연극 보자고 하시는 겁니까?”
“예!”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곤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남자가 자신을 붙잡고 도대체 왜, 굳이, 무슨 까닭으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불쑥 들었으나 애써 부정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는 속을 알 길 없이 싱긋 웃었다. 에곤은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절합니다.”
여섯 째 날.
다행히 한동안 꾸준하던 불청객은 늦은 밤이 다 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에곤은 모처럼 숙소에 딸린 방에서 촛불 하나를 켜 놓고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 점심에 있었던 수도 정비 탓인지 몰려오는 피로감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방 안은 아늑하고 고요하다. 이따금 과거를 회상하며 무의식에 잠기기도 적합했다. 언제부턴가 창밖으로 여름 벌레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눈을 감았다가 뜬 후유증으로 양초의 불빛이 부산하게 어른거린다. 에곤은 작은 컵을 들어 양초를 덮었다. 이내 한 줄기 연기를 뱉으며 주홍색 불이 꺼졌다. 자신도 언젠가 저렇게 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끝은 공평하게 도래한다. 시기만 다를 뿐.
가만히 나무 책상에 난 흠집을 만졌다. 자연스레 시선이 간 손에는 남들보다 빈 곳이 많았다. 에곤은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 또한 사치였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흘려보내는 것이 맞다. 결국엔 텅 비어버려 껍데기만 남을지라도 흙바람을 타고 황무지를 건널 것이다. 에곤은 책을 덮었다. 해가 진 뒤의 어둠에 잠식되어버린 시야가 흐릿했다. 여름이니 창문을 열고 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간단한 패턴이 수놓아진 커튼을 걷었다. 그리고 커튼을 걷자마자 거꾸로 매달린 남자를 목격했을 때는, 진짜로 껍데기만 남기고 영혼이 하늘로 치솟을 뻔 했다.
“대체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참다못한 에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가에 축축함마저 어리자 먼저 움찔거린 쪽은 제이드였다. 어― 하하. 좋은 밤이죠? 그는 단지 환풍구 난간에 다리를 걸고 매달려 커튼이 드리워졌던 에곤의 방을 살피려고 했을 뿐이었다. 방 주인 입장에서는 빌어처먹을 그 놈의 이유가 무엇이든 기절초풍할 노릇인 게 당연했지만 말이다. 에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선한 충격에 손으로 이마를 싸맸다. 머쓱해진 그는 능숙하게 재차 난간에 올라가 비교적 멀쩡한 방식으로 창틀에 발을 딛고 내려왔다. 엇차. 이야― 이거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에곤 경. 굉장히 단출한 사과였다.
“저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연극 보자는 이야기면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 …….”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지어냈으면 싶었다.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 사람에게 뭔가 엄청난 실례를 저지른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에곤으로서는 6일 연속으로 연극을 보자고 달려드는 저 엄청난 집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거절했다. 벌써 다섯 번이나. 또 거절 할 예정이니 다 해서 여섯 번이다. 자그마치 여섯 번이나 면전에서 거절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똑같은 일을 여섯 번 씩이나 거절할 필요가 없다. 혹시 포기라는 개념을 모르는 것인가. 에피니치움에는 이미 수습이 불가능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로열 글라디우스 기사 하나가 얼마 전부터 짝사랑하는 에피니치움의 기사에게 열렬히 구애 중이라는. 그 미친 소리에 근거란 존재하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면서도―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이제 이 자가 연극을 같이 보러가자는 이유가 뭐던간에, 아무튼 싫었다. 싫다고.
“그렇지만 내일이 공연 날짜란 말입니다.”
“어쩌라는 겁니까. 거절합니다.”
“이봐요, 경. 소녀의 순정을 무시하실 겁니까?”
저 ‘소녀’ 라는 게 본인을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겠지. ‘순정’ 은 또 뭐야. 끔찍한 상상에 에곤이 멈칫 섰다. 불편한 자세로 창틀 위에 쭈그려 앉아 있다가 틈을 타 방 안으로 들어온 제이드는 창틀에 편히 걸터앉아 옅게 웃었다. 경을 기다리고 있는 숙녀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두어 걸음 물러나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나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열린 창밖으로 둥근 달이 떴다.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 머리 뒤에 늘어뜨린 까마귀 깃털이 작게 흔들린다.
“오, 드디어 제 말을 들어주시는 거군요!”
“… 묻는 말에나 대답해주십시오.”
착즙기에 쥐어짠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 그대로입니다. 경을 기다리는 숙녀 분이 계십니다. 그 숙녀 분께서는 일흔 여섯 번이나 공연을 치른 대 배우로, 내일 멋진 공연을 앞두고 있죠.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주신 멋진 기사님을 위한.”
“예……?”
“기억 안 나십니까? 얼마 전에 건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여성 한 분을 도와주셨다면서요.”
…… 아. 기억을 더듬던 에곤은 소녀 하나를 떠올렸다. 충동적으로 발휘한 선의에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하던 그 소녀는 에곤의 빈 손가락을 보고 몹시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날 자리를 먼저 피한 쪽은 에곤이었다. 잠시 스쳐간 인연의 그 소녀가 저를 찾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숙녀 분에게 부탁을 받았습니다. 라슬로에서의 마지막 공연인데, 경을 꼭 모시고 와달라더군요. 하하. 들어드리기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알았지만 저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습니다.”
200셀이 걸렸다는 말만 정확히 제하고, 넉살 좋게 말했다.
“에곤 경. 저와 연극을 보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
어쩐지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기분이다. 그것도 괜히. 제이드 라누아는 VIP석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며 내심 후회하는 중이었다. 진작 묶어놓고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늘어놓았다면 달라졌을까. 그는 손 안의 100셀 은화 두 개를 만지작거렸다. 아니지. 이것은 순전히 의외성이 부른 결과다. 당황스러움을 쉴 새 없이 유발한 뒤 마지막에 첨가하는 의외성의 힘은 ‘의외로’ 대단하다. 그의 두 눈이 천천히 감겼다. 이거 조금 지루하군. 바로 옆 자리에 앉은 기사는 매우 뻣뻣한 자세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러다가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지 걱정될 지경이다. 그는 씩 웃으며 에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경, 편히 앉으십시오. 공연은 꽤 깁니다.”
“…… 예.”
사실 제이드도 다이애나의 공연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흔 여섯 번이나 공연을 했다길래 막연히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쩌다 만난 소녀였다. 공연에 쓸 가짜 왕관을 급히 구한다기에 심심한 김에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끊어졌을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 인연이 불러온 200셀만 아니었어도 이런 종류의 고생은 하지 않았겠지.
막은 금세 올랐다. 연극의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재산이 많은 미망인이 새 애인을 찾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동들을 담은 흔한 희극이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여배우는 매우 매력적인 인상의 소유자였다. 대사가 끝날 때마다 여기저기서 작은 환호성이 들리는 것을 보아 지지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제이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관심이 가는 사안이란 1막이 다 끝나가도록 다이애나가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꿈에 그리던 기사님을 모셔왔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에곤을 자리에 앉혀두고 잠시 만난 다이애나는 상당히 요란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 갈색 칠을 하고 몸에는 의상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갈색 천을 두르고 있었다. 그 정도의 복장이면 무대에 올라왔을 때 존재감이 엄청날 것이다. 설마 지나갔나. 어쨌거나 그녀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200셀도 그 때 받았다.
“…… 다이애나 양이라고 했습니까.”
“예? 예. 곧 나올 겁니다. 1막부터 끝까지 나온다고 했으니까… 아까 공연 전에 만나러 갔을 때는 분장실에서 분장을 하고 있었거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색으로 막 칠하고요. 굉장했는데. 하하. 어, 그 정도의 분장이라면 아마도 몹시 중요한 배역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저 나무처럼요―”
나무처럼요. 거기서 그의 목소리가 갈 데 없이 흩어졌다. 그는 무대 한 쪽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는 거대한 나무 하나를 보았다. 명백하게 무대 장치 겸 배경으로 세워 둔 나무였다. 당연히 나무이므로 대사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었다. 나무를 그린 판자에 얼굴만 내밀어 끼운 후 여주인공이 숲을 헤매는 동안 무대 한 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그 나무의 의무였다. 일흔 여섯 번이나 공연을 마친 대 여배우 다이애나가 연기하는 ‘나무’를 목격한 제이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심지어 눈이 마주치자 나무의 본분을 잊고 해맑게 웃었다. 이봐요. 그렇게 하면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저는 지금 적어도 당신이 혼신을 다해 나무를 연기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다고요. 에곤 경에게.
“어…….”
“…… …….”
그녀의 연기 퍼레이드는 앞서 예고했듯이 정말 3막 끝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다만 그녀가 맡은 그 배역이라는 것이, 원래 이래도 되는 건가 의심될 정도로 가지각색이었다. 1막에서 ‘나무’를 연기한 그녀는 2막에서 돌연 분장을 새로 하고 키가 작은 동네 청년이 되어 나타났다. ‘동네 청년2’는 격분한 여주인공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도망가는 것이 역할의 끝이었다. 이대로 ‘동네 청년2’ 로서 퇴장하는가 했는데 무대 뒤에서 꾸역꾸역 옷을 입고 다시 등장했을 때는 외눈박이 인형을 안은 ‘여자아이4’가 되어 있었다. 역시나 대사는 한 줄도 없었다. 3막에서는 그나마 나은 ‘바다의 요정’ 역할이었다. 그 때 다이애나의 첫 대사가 기적처럼 터졌다. “힘을 내세요!” 물론 여주인공의 배가 즉시 파도에 전복되었으므로 곧바로 퇴장을 해야만 했다. 다음은 다시 ‘나무’ 였으며 피날레 무대에서는 ‘마을에 세워진 오래된 동상’이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막이 내려가는 순간 까지도.
제이드는 솔직히 이렇게까지 말할 거리가 없는 공연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옆을 돌아보자 에곤은 여태껏 처음의 불편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좌우지간 ‘힘을 내세요’ 라는 대사 한 줄로 먹고 살기에는 삶이 너무 각박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마을에 세워진 오래된 동상’ 의 자세가 너무 힘들어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는 마침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자잘한 생각들을 전부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고양이마냥 기지개를 쭉 폈다. 에곤이 어느 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곤 경. 다이애나 양을 만나러 갑시다. 아마 건물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어둑한 건물에서 나와 외벽을 따라 돌았다. 다소 좁은 통로를 지나 도착한 배우 대기실 뒷문 앞에서,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분장은 나오느라 급히 지운 듯, 얼굴 군데군데가 미처 지우지 못한 물감들로 하얗게 얼룩이 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름답게 웃었다. 기사님! 그녀가 한 걸음 씩 뗄 때마다 수수한 드레스 자락이 물결치며 흔들렸다. 제이드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제스. 그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오늘 공연은 어떠셨어요?”
그녀는 에곤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잠시 말이 없던 에곤이 입을 떼었다. 좋았습니다. 그 한마디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다행이에요.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쑥스러운 표정이다. 에곤은 더 무어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듯 보였다. 회녹빛 시선이 잘 땋아 내린 검은 고수머리를 발견했다. 끝에는 앙증맞은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 두 번의 ‘나무’ 도 멋졌고, ‘동네 청년’도, ‘여자아이’도… ‘바다의 요정’도, ‘오래된 동상’도 모두 좋았습니다. 도움을 드릴 때는 레이디께서 배우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이렇게 좋은 공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느릿하고 지쳐있었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이애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 기억해주시는 건가요? 친절하셔라. 놀라움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맡은 역할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되게 몹시 비중이 작았기 때문에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러 번 접해 본 공연이 아닌 오늘이 처음이었을 공연이었다. 그러나 기사는 놀랍게도 이 악조건 속에서 그녀가 맡은 작은 배역들을 모두 기억했다. 연푸른 눈동자가 감동에 겨워 울렁거렸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그녀는 치맛자락을 잡고 감사를 표하곤 생긋 웃었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어요. 따뜻하신 분이군요.”
“…… …….”
에곤은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옆에서 그가 킥킥 웃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생긴 노을이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코끝과 양 뺨을 붉게 물들였다.
“제스, 또 연락할게요. 기사님도 다음에 다시 꼭 놀러 오셔야 해요.”
그녀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볍게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수줍게 볼우물이 움푹 팬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어울리지 않게 힘찬 하이파이브가 이어졌다. 오늘 공연, 멋졌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에 까르르 웃었다. 그럼요. 저는 일흔 일곱 번이나 공연을 한 대 배우인걸요. 다음엔 대사도 몇 개 생길 거라구요. 어깨가 으쓱인다. 영원히 표정이 없을 것 같았던 에곤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대기실로 돌아가는 고작 몇 걸음 내내 두 사람을 향해 손을 계속 흔들었다. 덕분에 제이드는 팔이 빠져라 마주 손을 흔들어 주어야 했다.
“힘들진 않으셨습니까?”
길게 늘어진 노을을 따라 함께 걷는 길에 제이드가 물었다.
“… 괜찮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몇 걸음 앞서 걸어갔다. 에곤은 점점 멀어지는 제이드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키다가 산 뒤로 서서히 지는 태양을 마주 보았다. 태양은 석류석처럼 붉었다. 고개를 돌리자 앞으로 키가 말쑥한 자신의 그림자가 있었다. 한동안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아무리 밟아도 그림자는 검었다. 에곤은 숙소에 다와서야 고개를 들었다. 아직 남은 하루가 너무나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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