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14 이 칼이 네 칼이냐 (with. 아일렉시온)
그의 일과는 참으로 간단명료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몸을 씻고, 머리를 빗고, 예의 그 까마귀 깃털이 늘어져 달린 장신구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반을 고정한 다음, 옷을 입고, 나가서, 식당에 내려가 식사를 하고, 연무장 뒤편 산책길을 어슬렁거리다가, 방에 들어와 낮잠을 잔다. 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몇 번 보지 못했다. 있지도 않은 온갖 병이나 각종 거짓 행태를 부리며 교묘하게 빠져나가곤 했던 것이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기가 막혔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따위 인물이 기사단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웠다. 아일렉시온은 불쾌한 실소를 내뱉었다.
낮잠을 잔 뒤엔 일어나 방에서 뭔가를 하는 모양이다. 방문 옆을 지나가는 척 엿들었을 적에는 사박사박, 하는 소리도 들었고 짤그랑짤그랑, 하는 소리도 들었으며 때로는 톡톡톡톡, 하는 소리도 들었다. 일정하지 않고 매일매일 다른 소리가 들렸다. 방문만은 늘 철저하게 걸어 잠그고 있었기에 정확히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림잡아 두세 시간 정도는 움직이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 그러고 나서 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복도에 누군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꼭 확인을 했다. 언제나 그가 나오기 직전 자리를 피했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방에서 나오는 그의 양 손에는 꼭 무엇인가 들려 있었다. 묵직하거나 가벼워보이는 등 무게감은 달랐지만 낡은 자루에 담겨진 것은 같았다. 그것을 들고 낮에도 어둑한 숙소 뒤편으로 돌아간다. 다음에 펼쳐질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아일렉시온은 제 눈을 의심했었다. 그는 줄 하나 없이 건물 외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랐다. 너무나 손쉽게 도착해 마법이라도 부린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확률은 몹시 희박했다. 이후 기사단저를 벗어나기 위해 거침없이 굴뚝을 뛰어넘고 좁은 난간을 건넜다. 손만 닿는 곳이 있으면 주춤거릴 필요도 없이 어디든 가능해 보였다. 서둘러 그 뒤를 계속 쫓았다.
이전까지는 몇 번인가 놓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이유로는 그의 이동 속도가 꽤 빨랐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로는 그가 전적으로 비정상적인 지름길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길을 고집하는 아일렉시온으로서는 당연히 한두 발이 아니라 서너 발 씩 늦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행히 뒤를 밟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뜻 건물 사이를 뛰어넘는 실루엣을 또다시 발견했다. 제대로 증거를 잡아 체포할 것이다. 어느 새 유력한 용의자에서 범죄자로 승급한 제이드 라누아였다. 아일렉시온은 여전히 지나치게 당당한 태도로 그의 뒤를 밟고 있었다.
아일렉시온이 멈춘 곳은 뒷골목의 한 작은 식당이었다. 상당히 높은 곳에서 훌쩍 뛰어내려 가뿐하게 착지해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제이드 라누아를 보았다. 잠시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던 아일렉시온은 붉은 빛이 새어나오는 식당 문을 향해 걸어갔다. 거리 하나만 덜 가도 그렇게 많았던 행인들이 이 근처에는 한 명도 없었다. 수상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가까이에서 본 식당의 간판은 뒤집어져 있었다. 이 식당의 주인은 간판을 새로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간판에 거미줄이 지저분하게 엉기었다. 문틈 밑으로 빛이 산만히 점멸했다.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을 두드렸다.
“어서오시우.”
들어서자마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가 지독했다. 양고기를 솜씨 없이 다루면 꼭 저런 냄새가 난다. 미간을 좁히고 창가에 있는 구석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온 주인장이 창문을 도로 닫았다. 이해해주시우. 다 알거 아는 사이에. 무엇을 안다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으나 일단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주인이 냉수가 가득 담긴 병을 내려놓고 낡디 낡은 메뉴판을 가리켰다. 도무지 시킬 욕구가 들지 않는 조잡한 메뉴들이었지만 아일렉시온은 그나마 괜찮게 느껴지는 안주용 모둠 과일과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자마자 주방으로 들어갔던 주인이 먼지가 낀 잔에 맥주를 담아 먼저 내주었다. 안주는 조금 기다리시오. 아일렉시온은 맥주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벽난로가 있는 주변은 몹시 시끌벅적했다.
“이것 봐 제스, 한 번만 봐주면 안 되나?”
제스. 그 이름에 아일렉시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굵고 컸기에 바로 뒤에서 들리는 것 마냥 생생하다. 한 번만 봐주게. 재차 부탁하는 것과 별개로 마치 상대에게 재미없는 농담 따먹기라도 당한 듯한 태도였다. 남자가 두어 걸음 물러서 아일렉시온이 앉은 자리 근처에 섰다. 위협적인 거구의 사내였다. 당장의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는 만큼 여유롭게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형편없군. 끔찍하게 쓴 맛에 혀를 차며 잔을 내려놓았다.
“아아. 곤란합니다. 이미 세 번이나 봐드렸잖습니까.”
주위를 둘러싸고 우글거리는 인파를 제친 제이드가 마침내 등장했다. 세 번이나 봐주었으니 한 번 더 봐준다고 뭐가 달라지나.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킬킬 웃었다. 정말로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그는 부탁을 들어줄 것을 사실상 강요하는 험악한 인상의 남자와 마주섰다. 이것 보십시오. 약속은 약속입니다. 딱 잘라 말하며 검지를 세우는 그의 손 안에는 반짝이는 패물들이 가득했다. 원래는 그 남자의 것이었을 보석 몇 개와 장신구가. 존재를 확인한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좋게 말할 때― 남자가 어깨를 부풀렸다. 아일렉시온은 흥미롭게 그 장면을 관망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모둠 과일이 가득 담긴 접시를 내려둔 주인장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외쳤다. 거기 당신, 졌으면 조용히 나가. 내 식당에서 소란을 피우면 곤란해.
“들으셨죠?”
“이……!”
그가 싱긋 웃었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악스럽게 패물을 쥐고 있는 손목을 잡아챘다. 어엇. 이번에는 그도 당황한 것 같았다. 봐주지 않을 거면 내 놔. 씨근덕거리는 호흡이 거칠었다. 어어, 그게 무슨 궤변입니까. 이것들은 제가 당신과의 ‘내기’ 에서 딴 상품들입니다만. 제 거예요.
그리고 한 번 더 봐 주기를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영 불량하군요. 손목을 잡힌 채 그는 한가로이 대꾸했다. ‘내기’ 라 함은 도박을 의미하는 게 분명하다. 적어도 도박판에 출몰한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나. 이 자식, 몰래 밑장 뺀 걸 모를 줄 알아! 다 봤다고! 남자가 대번에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글쎄요, 무엇을 보셨습니까? 라고 묘하게 말을 흘리는 제이드를 보며 뭔가 있긴 있었군, 하고 짐작하였다. 아일렉시온의 관심은 이제 저 남자가 그의 손목을 반으로 부러뜨리느냐 마냐에 쏠려 있었다. 물론 그들을 둘러싼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도 그러했다.
“슬슬 아파오는데, 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지금 쥐고 있는 걸 내게 넘기면 그렇게 해 주지.”
흐음. 그의 눈썹이 팔자로 처졌다. 순간, 그의 발이 남자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갑작스런 고통에 깜짝 놀란 남자가 반사적으로 손을 뗐다. 즉시 역으로 손을 붙잡아 넘겨 거한을 바닥에 매우 손쉽게 내동댕이친 뒤― 제이드는 태연히 패물들을 세다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구경꾼들은 이 예상외의 전개에 숨만 급히 들이킬 뿐 더 말이 없었다.
음…… 주신 제안을 숙고해 보았습니다만, 역시 싫습니다. 한참이나 늦은 대꾸였다. 하필 넘어진 남자가 허우적거리며 술통을 엎어 식당에 중대한 2차 손실을 냈다. 격노한 주인장이 냄비로 남자의 얼굴을 내리쳤다. 얼굴 형태의 요철에 따라 찌그러진 냄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이드와 아일렉시온은 동일한 표정으로 냄비를 한동안 응시했다.
“그럼 다음에, 또.”
그는 뒤돌아볼 것도 없다는 듯 손을 흔들며 식당을 떠났다. 막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으려던 아일렉시온은 대충 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또 어디로 갈 생각인지, 아직은 추측에 불과해 알 수 없다. 워낙 ‘제스’ 라는 이름 아래 주렁주렁 매달린 추문들이 많았다. 로열 글라디우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한 것인지.
식당 안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들을 제외하면 거리는 조용했다.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따라 나섰는데 설마 그 사이에 없어진 것인가. 괘씸한 페이퍼 나이프의 전말을 알 수 있었던 기회를 허무하게 놓쳤다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검집에 손을 올렸다가 손가락으로 폼멜을 톡톡 두들겼다.
그나저나, 여태껏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제이드 라누아라는 자는 다분히 수상한 자였다. 오늘은 사기도박판 현장에 출몰하는 것 또한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아일렉시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렇게 되면 용의선상에 오른 이름과 외양, 마지막으로 행동반경까지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불량 페이퍼 나이프에 관한 일은?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경?”
“……!”
아일렉시온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워워, 진정하십시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하자 반쯤 뽑았던 검을 집어넣었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 했을 만큼 어느새 바짝 다가와 있었던 제이드가 눈을 꿈벅였다. 무례하군요. 자연스레 그 말부터 나갔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 씩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말씀 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듣기 좋은 목소리다. 제이드는 내심 감탄했다.
“아아, 그게 아니고― 제가 궁금한 것은,”
말이 잠시 끊겼다. 아일렉시온의 눈이 가늘어진다.
“혹시 제 팬이십니까?”
철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집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검이 들리는 소리가 났다. 겨울 고드름도 부숴버릴 것 같은 반응에 머쓱해진 제이드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건 아니신가봅니다. 엄청나게 당연한 소리였다. 아일렉시온은 평정을 되찾고 그를 무표정하게 주시했다.
“아니면 스토커?”
“… 정확히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니, 그게. 제이드는 답지 않게 말을 골랐다. 대뜸 오명을 썼다는 생각에 아일렉시온의 기분은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음― 요즘 계속 저를 따라다니시는 것 같아서요.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아닙니다.”
다소 이상한 대답을 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누가 경을 따라다닌단 말입니까. 아무리 할 일 없는 자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겁니다. 미행이라면, 모르지만. 굉장히 날이 서 있는 어조였으나 그는 아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 뒤를 밟은 자가 경은 아니신 듯 합니다. 아일렉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양 손을 가벼이 들고 뒷걸음질을 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식사라도 대접하지요. 태평한 소리였다. 머뭇거리던 아일렉시온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제이드는 그대로 멈추었다. 충분히 경청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 불량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행위는… 옳지 못합니다.”
“예?”
느릿하게 들어오는 문장은 금시초문이었다. 아니, 이것저것 해왔던 일이 있으니 금시초문은 아니었으나― 제이드는 최근 제가 극비리에 추진했던 일련의 ‘사업’ 들을 떠올렸다. 개중에 정교한 모조품 따위를 제작해 비싼 가격에 넘긴 적은 있어도 ‘불량품’ 자체를 생산한 적은 없었다. 나름대로 일종의 사업 철칙이었다. 소비자판매가격과 원가의 아득한 괴리에서 등쳐먹을지언정 품질은 언제나 그럭저럭 봐줄 만한 정도를 유지했다. 먼 옛날 옛적이면 몰라도 지금은 대놓고 불량품을 팔았다가 소문이라도 잘못 난다면 당장에 거래처가 끊기는, 그런 아주 야박한 세상이다. 최근엔 그것과 관련한 사건도 있었으므로 더욱 주의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불량품이라니, 맙소사 이게 무슨 말이람.
“특히나 페이퍼 나이프 같은 건!!”
“무, 무슨 나이프요?”
버럭 소리 지르는 듯한 말에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왠지 기시감을 느꼈으나 애써 무시했다.
“…로열 글라디우스의 제이드 라누아 경. 부디 귀족으로서의 체통과 위엄을 지켜주십시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필요하다면 기사단장님께 말씀드리는 것도 고려할 것입니다.”
미처 오해를 풀기도 전에 상대는 최종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사실 아일렉시온은 실제 범인이 누구이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저 자도 만만치 않은 자가 아닌가. 게다가 행동양식으로 유추하건대 정말 범인일 확률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단호하게 그를 향해 일갈 대성할 수 있었다.
“아니― 저기, 아일렉시온 경!”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예? 또 뭡니까?”
하아. 하고 적나라하게 한 박자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훈련에도 좀 꼬박꼬박 참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저께는 근육 저림, 어제는 있지도 않은 복통이었고, 오늘은 가족이 위독하단 핑계였으니, 내일은 뭡니까, 불의의 사고를 당하실 생각입니까? 솔직히 한심합니다.”
그리고 아일렉시온은 영영 가버렸다. 마지막은 어딘가 후련한 얼굴이었다.
남겨진 제이드는 한동안 멍청한 얼굴을 했다.
거 봐요. 역시 따라다녔잖습니까. 지볼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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