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22 런던 미식회 (with. 디트리히)
런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것과, 저마다 지향하고자하는 궁극점이 다르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비슷한 자들끼리 모이게 된다. 자신과 빛깔이 비슷한 사람과 있기를 원한다.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혹은 무작정 안정을 찾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러한 방식으로 덩이를 짓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런던에는 셋째 주 월요일에 모임을 갖는 딱정벌레 동호회가 탄생하였으며, 토요일마다 성당 소유의 무덤에서 무언가를 소환하고자 하는 수상한 집단이 존재하고, 지난 주 성황리에 창단식을 치른 평균 연령대 80세 이상 라마 연구자 클럽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밑에서 매달 말일에 즉흥연주를 하는 아마추어 악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매주 수요일마다 런던의 레스토랑을 순회하는 [런던 미식회] 또한 그와 같은 속성을 가졌다. 그 집단이, 정확히는 회장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로는 런던의 대-진미와 대-풍미를 즐기기 위한 지극히 건전한 식도락회라는 데에 모임의 의의와 정체성이 있는 듯 했다.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런던 미식회]는 실제로 꾸준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몇 안 되는 집단 중 하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회장은 좋아하는 것은 많으나 지루한 것만큼은 싫은 자였고, 하나 뿐인 회원은 딱히 주도적일 이유가 없는, 자신의 수동적인 태도에 어느 정도 긍정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또다시 수요일을 맞이하여─ 그들은 오늘도 제법 정확한 시각에 테이블 앞에 착실히 마주 앉아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오늘의 테마는 프랑스 식 요리였다.
식당에 오기 전,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런던 미식회]의 회원을 기다리며 크렘 브륄레와 잘린 키슈 한 조각을 먹고 난 터라 배가 썩 고프진 않았지만 디트리히는 착실하게 메뉴판을 받아들었다. 우아한 손짓으로 제 입술을 슬쩍 쓸어 여유 있게 선택을 잠시 미루던 끝에─라따뚜이 3인분을 가차 없이 무시하고─솔 뫼니에르와 프랑스식 소안심 스테이크가 각각 포함된 약식 코스들을 주문하였다. 그와 어울리는 와인들도 빠질 수 없었다. 후식은 소르베나, 달콤한 수플레가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디트리히는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겨울 동백이 개화하는 듯한 모습에 건너편 앉은 수줍은 부인이 그를 흘끔 훔쳐보았다. 그것이 싫지 않았기에 그는 방금 생긴 자신의 팬에게 가벼이 눈인사를 건네고 허리를 바로 세워 고쳐 앉는다. 금일 동석한 라이칸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궁색하게만 보였다. 그가 걸친 의상 수준 따위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태도가 그러했다. 흐음. 의미모를 소리를 낸 디트리히가 테이블 위에 전채로 막 내어진 에스카르고의 매끄러운 살점을 포크로 꿰뚫었다. 그 불쌍한 녀석은 꽤나 통통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었다. 살아생전 집이 비좁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육즙에서는 고소한 버터와 약간의 짭조름한 소금의 맛이 느껴졌다.
"다음부터 일품요리는 지양하도록 합시다."
키가 큰 남자의 진녹색 눈동자 한 쌍이 옆으로 굴러갔다. 벌써 오백 번쯤 본 행동양식이었으므로, 디트리히는 익숙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쉬 씨도 가급적 저희가 이리 모이는 의의를 존중해주시면,"
칵. 포크가 식기를 할퀴는 소리가 났다. 서툴고, 쓸데없이 센 힘에 의해 억지로 벗겨진 에스카르고의 껍질이 위협적으로 치솟아 허공을 갈랐다. 당사자인 이쉬는 크게 당황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디트리히는 자신이 방금 본 장면을 자신의 일생에 있어서 앞으로도 영원히 못 본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렇게 정하자니 기억속에서도 완전히 삭제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많이 드세요. 완벽한 식사예절을 구사하는 은발의 청년은 친절하고 나긋하게 말했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이쉬는 부서진 껍질의 파편이 붙은 살점을 슬며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디트리히가 그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면 크게 통탄할 일이었다. 식용 달팽이 껍데기까지 음미하라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테니.
"이쉬 씨도 아시다시피 저희 [런던 미식회] 는 다양한 평을 중시합니다."
뫼니에르와 코트 디 뵈프가 나오자 정체불명의 수요모임을 주도하는 회장은 더욱 활짝 웃으며 유일한 회원인 그의 앞으로 식기를 손수 밀어주었다. 가자미와 소고기 안심이 먹음직스럽게 요리되어 담긴 접시들을 혼란스럽게 번갈아 바라보던 이쉬의 손이 마침내 움직였다. 아무리 그래도 생선과 고기의 차이점 정도는 알겠지. 디트리히는 내심 기대했다. 그러니까─
"…이, 이게 더 양이 많, 고,"
이쉬는 최고급 올리브유가 발렸을 스테이크에 시선을 주었다. 사실 회장은 그의 가엾은 회원이 음식의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안타까움에 못 이겨 회원이 소속된 직장 처에 익명으로 저주의 편지를 마구 발송하고 싶은 깊은 충동을 느끼고는 했다. 그 가죽신 뺨치는 식감의 빵을 판매하는 어딘가의 빵집은 진작에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예. 그렇죠. 그리고요?"
다행히 회장은 인내심이 투철하고 관대한 뱀파이어였다.
"… 이건, 새, 생선이고,"
"…… ……."
허여멀건한 라이칸은 자신보다 실상 나이가 열 배쯤 많은 젊은 뱀파이어의 표정이 갈수록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것을 알아채고 얼른 덧붙였다. 마, 맛있어요.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디트리히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오늘의 [런던 미식회] 모임 역시 아껴마지않는 회원님의 지나친 미각평등주의로 인해 공중분해가 된 것 같았다. 세상은 그렇지 않아도 공평한 것보다 불공평한 것이 많았다. 그렇다면 맛도 좀 불공평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우울한 손길이 가자미의 속살을 찢었다. 셰프에 의해 멀쩡한 머리와 꼬리가 휑하니 잘려나간 가자미조차 슬퍼할만한 쓰디쓴 현실이었다. 익힌 가자미는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다. 상냥하신 분. 제 한 몸 기꺼이 희생한 위대한 가자미에게 하는 말인지 그것을 솜씨 좋게 요리한 충직한 셰프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여하간 디트리히의 입매가 다시 둥 떠올랐다. 참으로 행복한 맛이었다. 제 앞에 앉은 이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듯 했지만. 적어도 오늘 안으로는 말이다.
* * *
이 편지는 로마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이 세계를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당신이 행운을 얻기 전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을 친절하게 알려줄 것입니다. 왜, 인지는 묻지 마세요.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부터 총 일곱 명의 맛있는 음식이 필요한 누군가, 특히 당신네 직원들에게 음식을 사주셔야 합니다. 요리에 자신이 있다면 직접 요리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영국에서 멜─이라고 썼다가 지운 석연찮은 흔적이 보였다─ 제임스라는 사람은 1730년에 영리한 까마귀를 통해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집사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었습니다. 며칠 뒤에 기적처럼 금광을 발견하게 되어 200억 파운드에 달하는─너무 지나친 수치였다─재산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어이쿠, 어쩜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떤 이는 이 편지를 받았으나 누군가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금방 잊었습니다. 그는 곧 사악한 흡혈귀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가까운 친척들에게 음식을 보냈는데 그는 다시 좋은 직장을 얻었습니다─필자는 직전 문장에서 이 무명의 사람에게 이미 비극적인 운명을 고했다는 것을 잊은 듯 했다─프랑스의 레이디 주느비에브는 이 편지를 받았지만 그냥 버렸습니다. 결국 9일 후 그녀는 흉악한 산도적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답니다.
기억해 주세요. 이 편지가 말하는 대로 행하면 7년의 행운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3000년의 불행이─역시나 너무 지나친 수치였다─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맛이 없는 음식은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당신이 최선을 다해 음식을 대접해야 할 직원은 총 일곱 명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모쪼록 행운이 깃들 것입니다. 힘들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7년의 행운을 빌면서…
─까지 쓴 편지를 정성스레 봉했다. 디트리히는 마지막으로 받는 이의 이름을 적는 곳에 멋들어진 필체로 휘갈겼다. Deneb.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적체되다시피 한 시간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뱀파이어와 달리 라이칸은, 그렇지 못했다. 허락된 깊이는 얕고, 때문에 무언가에 떠밀려서라도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뭔가에 목줄이 매여 어리석어보일만큼 앞으로 걷는 것을 잊고 제자리를 돌았던가.
그럼 참 재미없지 않겠어요. 내가 도와줄게요. 도전을 선언한 디트리히는 콧노래를 부르며 완성한 편지를 앞뒤로 감상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런던 미식회]의 회장님은 그처럼 더없이 다정하고 인자한 뱀파이어였다. 지독한 권태를 깨뜨리는 것은 자극이었다. 가장 본능에 가까운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극에 가까운 자극. 디트리히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혀끝은 솔직하다. 균열은 훌륭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 끝이 어디에 닿아있든지.
* * *
익일 점심, 누군가 자신있게 내놓은 스튜로 인해 데네브의 직원 몇이 병동으로 급히 실려가야만 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행운은 그런 식으로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쉬하이드] 나비 (0) | 2018.01.28 |
---|---|
[이쉬하이드] 소동 (0) | 2018.01.28 |
[이쉬하이드] 밤거리의 님프 (0) | 2018.01.28 |
[이쉬하이드] 멸실환 (0) | 2018.01.28 |
[이쉬하이드] Greeting (0) | 2018.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