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20 밤거리의 님프 (with. 아넬로)

 

 


   요즘 거리에 유령이 나타난다는데, 들었어? 남자는 몸을 한껏 낮추며 바람을 잡았다. 그 주위로 흥미를 느낀 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뜸을 들이는 그를 사람 몇이 재촉했다. , 자정 즈음에 나타는 그것 말이야. 벌써 본 사람이 수두룩하다지. 기절한 자도 여럿이야.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척 귀를 기울이는 자들도 있었다. 아 글쎄, 노래를 부른다더군. 노래를? 여자가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가사가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거리를 배회한다고 하네. 유령 주제에. 웃긴 일이야. 웃긴 일. 요즘 유령은 노래도 다 할 줄 아는 겐가. 밴시라면 또 모르지. 사람이 죽기 전에 구슬피 통곡한다는 요정이 있지 않나. 에이. 세상에 그런 것이 진짜로 있겠어. 또 다른 남자는 늘어진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담 유령을 봤다는 사람들은 뭐야. 눈부신 금발의 여인은 말했다. 다아 허풍이지요, .

 

   이쉬는 입도 대지 않은 맥주를 두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간만의 비번이었다.

 

   수면 저 밑에서 바라본 수면은 놀랍도록 고요하다. 그에게는 밤이 그런 존재였다. 별 하나 없이 새카맣게 탄 밤은 금방이라도 땅과 뒤집어질듯이 쏠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으면 금방 천장을 더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끝에 제일 먼저 닿는 얇은 유리처럼 연약한 것을 깨뜨리고 나면 검고 숨 막히는 무언가를, 이 런던이 한꺼번에 뒤집어 쓸 것 같았다. 추악함도 선량함도, 진실도 거짓도 공평하게 파묻히는 것이 밤이다. 소리 하나 없는 밤은 누구에게나 자애롭다. 이쉬는 그 무조, 무성, 무음의 밤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걷고 또 걸었다. 자신이 걷는 만큼 밤이 길어진다면, 영원히 걷는 것을 택할 터다. 밤이 지속되는 지상을 끝없이 밟아 나갈 것이다.

 

   거리를 밝히는 불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안온을 얻기를 원하며 어둠 안에 숨은 시각이었다. 런던의 거리에는 이 시간만 되면 움직이는 자들, 인간이 아닌 인외의 존재도 분명 스며들어있었으나 이쉬는 그들을 이유 없이 필요 이상으로 적대하거나 경계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딘가의 집단은 언젠가 부딪힐 일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그에게 있어 일종의 방해꾼이었다. 위선이니 뭐니, 솔직히 그는 그렇게까지 깊이 고찰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다. 근처를 지나가며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화려한 불빛을 매달고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천막은 그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보였다. 그가 알고 있는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벗어나 홀로 동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알지 못하는 것과는 달랐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린 형제는 저와 조금은 달랐을까.

 

   이쉬는 달빛이 매끄럽게 덧씌워진 길 위를 얼마간 걸었다. 그 때, 정적을 조심스레 깨고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슬쩍 들어 근원을 추측했다. 노랫소리는 이상할 만큼 모호하게 들려왔다. 실마리를 잡지 못한 녹색의 눈빛이 침잠했다. . 혹시 유령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설령 맞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반기지 않을지언정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유령이란 보통은 인간의 영혼이 흘러온 게 아니던가. 쓸데없이. 이쉬는 미미하게 한숨을 쉬었다.

 

   블록을 하나 더 지나칠 무렵, 이쉬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그것은, 유령이라기보다는, 굳이 비유하자면 님프였다. 아름답고, 예술에 능한 옛 이야기 속의 요정을 연상케 했다. 머리가 짓궂은 소년처럼 짧은 소녀는 아무도 없는 거리를 무대삼아 세상에 없을 가벼운 몸짓으로 느릿하게 돌았다. 소녀의 우아한 손짓은 곡선을 그리며 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뭇가지를 밟는 작은 새와 같이 발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몇 걸음을 더 다가온 소녀는 그녀를 발견하고 길 끝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쉬와 눈이 마주치자 무릎을 슬쩍 굽히고는, 어여쁜 호를 그리며 웃었다. 그는 눈을 끔벅였다. 음폭이 좁은 단선율의 멜로디가 소녀의 입술에서 끊어짐 없이 흘렀다. 가십을 나누던 인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깊은 눈매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는 선연한 붉은 빛의 열매다. 조금씩 간극을 좁혀오는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소녀의 발걸음은 춤을 추듯 이어졌다. 소녀가 몸을 회전시킬 때면 어둑한 밤도, 붉게 물든 은색의 달빛도 함께 회전했다.

 

   그의 누이는 무용에 소질이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그런 것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지나치게 가까운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순간, 소녀가 양 손을 예고 없이 잡아챘다.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녀의 천진한 행보에 그대로 휘말렸다. 어어. 몇 박자 늦게 엉성한 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그녀는 빙글빙글 원을 돌았다. 손을 붙잡힌 그도 소녀를 따라 엉거주춤 움직였다. 본의 아니게 꽤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높고 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 선득하게 차고 부드러운 무엇인가가 핏줄이 도드라진 그의 손등에 닿았다가 물러났다. 그는 비명이든 뭐든, 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빼냈다. 소녀는 그것을 보고 또 환히 웃었다. 빙글빙글. 소녀가 몸을 돌렸다. 오르골. 태엽을 감고 상자를 열면 어딘가 서글프게 느껴지는 음악과 함께 작은 판 위에서 춤을 추는 사기인형처럼 그렇게 춤을 추었다. 한동안 춤을 추다가,

 

   "안녕,"

 

   인사를 건네고는, 이윽고 그림자가 여실히 드리운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그가 몸을 움직인 시점은 한참이나 뒤였다.

 

   그는 다음날, 반복되는 유령 이야기에 시들해진 사람들에게 유령을 보았다고 말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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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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