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23 친절한 미스터 귤상자 (with. 람페티에)

 

 

   그거 아세요? 유명한 괴담이잖아요. 가면무도회가 치러지는 날이면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 온다는 거. 다들 가면을 쓰고 있으니 누가 초대를 받지 않은 손님인지 알아볼 수 없지만 사람 수를 세어보면 꼭, 딱 한 명이 더 많다고 해요.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은 무도회를 즐기러 온 사람들 틈에 섞여 밤새 함께 춤추다가 새벽녘에 홀연히 사라진다고 하지요. 들어본 적 있어요? 자기.

 

   붉은 가면을 쓴 여인이 연인에게 속삭인다. 교교한 달빛이 그들을 밝게 비추는 조명처럼 쏟아졌다. 사랑스러운 여인의 연인은 허리를 껴안고 살며시 입을 맞춘다. 아니요. 처음 듣는 걸요. 그는 자색 가면을 썼다. 두 사람은 함께 차차 대리석 계단을 오른다. 살롱 안에서 현을 긋는 멜로디가 아름답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색으로 찬란히 부서지는 샹들리에의 불빛이 화사하다.

 

   그녀는 홀로, 은쟁반 앞에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입을 다문 것은 아니다. 붉은 꿀이 발린 붉은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빠끔히 나왔다가 들어갔다. 입가에 묻은 버터 쿠키의 부스러기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마저 감겼다. 따뜻하며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고소하다. 얇은 장갑에 싸인 손이 하나를 더 집어 가져갔다. , 하고 베어 문 쿠키가 반으로 부러진다. 절반은 그녀의 작은 입 안으로 사라진다. 복숭아처럼 도톰하고 둥근 뺨이 우물우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람페티에 힐더는 얼굴에 드리운 베일 안에서 지켜보는 쪽을 선호했다. 직접 발을 떼어 움직이는 것 보다 그저 이렇게, 소소한 것들을 즐기면서.

 

   무도회는 그녀를 완벽하게 떼어놓았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감춘 채로 불규칙한 흐름을 따라 부지런히 섞이는 데 바빴으나 그녀는 지금, 온전히 분리되기를 자처하여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해 이곳에 있는 셈이다. 시간과 소리마저 숨을 죽이고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람페티에는 자연스레 마지막 남은 버터 쿠키에 손을 뻗었다. 언뜻 귓가에 잊고 있었던 노래가 들렸다.

 

   한 발 먼저 공간을 멋대로 깨고 들어온 침입자가 있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조금 더 일찍 그녀의 버터 쿠키를 소유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텅 빈 은쟁반을 내려다보았다. 잘 닦아 빛나는 쟁반이 그녀를 거울처럼 비추었다. 느릿하게 돌아본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남부 산 맛 좋은 귤이라고 쓰인 상자를 뒤집어 쓴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상자 밑으로 사라지는 버터 쿠키. 람페티에는 마침 볼 일을 끝내고 뒤돌아 가려던 남자의 긴 머리카락을 별다른 계산 없이 확 잡아당겼다. 반대편에는 당도가 아주 높은!’ 이라는 저렴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번에 목이 뒤로 꺾인다.

 

   “…… …….”

 

   귤 상자는 엉거주춤 뒤를 돌아보았다. 가면은 상당히 조악스러웠다. 뒤집어 쓴 상자에 대충 숨구멍을 몇 개 뚫어 낸 것이었다. 가면이란 게 으레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하지만 익명의 남자가 쓴 가면은 단지 성의가 없어 보일 뿐이다. 게다가 질 낮게 수상하다. 어떻게 무도회에 제지를 당하지 않고 입장할 수 있었는지 온통 의문이었다. 하지만 람페티에의 관심은 그 쪽에 있지 않았다. 쿠키. 버터 쿠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귤 상자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의 손 위에 손이 겹쳐진다. 람페티에는 몇 걸음 휩쓸리듯 끌려갔다. 춤을 추는 인파가 파도처럼 눈앞에 몰려왔다가 잔잔해진 음악을 따라 멀어진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춤은, 추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향락의 경계선에 멈춰 서서 발끝에 힘을 준다. 앞서가던 귤 상자가 따라 멈췄다.

 

   어지러이 음악이 흐른다. 람페티에는 그 속에서 현기증을 느꼈다. 돌아갈게요. 손을 놓고 다시 빈 은쟁반 앞에 앉았다. 속히 비어버린 은쟁반을 채워 줄 이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멀리서 접시들을 수거하는 메이드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언젠가 오겠지. 그러나 메이드는 그대로 퇴장해버렸다. 시간이 더 흘러도, 그녀는 여전히 빈 은쟁반 앞에 앉아 있다. 붉은 머리카락 덕분에 쟁반에도 붉은 얼룩이 진다. 다른 곳으로 갈까. 슬슬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그녀의 곁에 떠났던 귤 상자가 돌아왔다.

 

   맛 좋은 남부의 귤 상자를 뒤집어 쓴 남자는 그녀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알록달록, 무스 케이크가 가득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새 테이블에서 통째로 옮겨 온 모양이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진다. 이건. 귤 상자는 대답이 없다. 대신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정중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었다. 금세 알아차렸다. 버터 쿠키의 답례였다. 그녀는 귤 상자를 향해 목례를 했다. 이상한 광경이다. 귤 상자는 얌전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얼핏 세간의 괴담이 떠올랐다.

 

   “초대를 받으셨나요.”

 

   팔락팔락. 보란 듯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 흔들린다. 속눈썹이 맑게 빛나는 주홍의 눈 위에 옅은 그늘을 만든다. 왕실은 이 귤 상자를 뒤집어 쓴 남자도 초대한 것 같았다. 그렇군요. 당신이 새벽녘에 사라질 일은 없겠네요. 숨결에 검은 베일이 흔들린다. 산딸기가 얹어진 무스 케이크를 선택했다.

 

   “. 새벽은 돌아가기에 너무 이른 시각이 아닙니까.”

 

   갑작스러운 대답에 무스 케이크를 둥글게 깎던 스푼이 멈추었다. 귤 상자에 그려진 귤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귤은 눈이 없으니 그런 느낌이다. 람페티에는 낡고 구겨진 상자가 마침내 벗겨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귤 상자로부터 해방된 남자가 머리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한다. 길게 길러 검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까마귀 깃털이 매달려있다.

 

   “재미있는 날인데, 조금 더 즐기다 가는 것이 좋겠지요.”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은 검은 가면으로 절반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쟁반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푼이 재차 서서히 움직인다. 이윽고 산딸기 크림과 산딸기를 완벽히 담는 데 성공한다. 힐더 경은, 남자가 가면무도회의 불문율을 깨고 그녀를 불렀다. 케이크의 달콤한 향과 맛을 음미하고 난 뒤늦게 답이 돌아왔다.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렇군요. 다들 즐기는 방법은 다른 법이니까. 제이드 라누아는 웃었다.

   아직 무도회는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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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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