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22 낯섦 2 (with. 파렐)
생스턴에서만 40년을 넘게 거주했으나 줄리오 브뤼네를 아는 이는 적었다. 그 노인이 좀처럼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패기로 살았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어느덧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고 눈은 혼탁해졌다. 왼쪽 다리는 언제부터인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방에서 홀로 그림이나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 때쯤이었을까. 늙은 남자는 항상 짓눌린 빵처럼 생긴 자줏빛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모자를 쓰고 한 손에 붓이나 깃펜 따위를 쥔 채 구부정하게 앉아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그림들은 대충 둘둘 말려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창고 안으로 쑤셔 넣어졌다.
가끔씩 오래 전 일을 회상하며 그림을 그릴 때가 있다. 회상 속에서 줄리오 브뤼네는 젊었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건장한 말을 몰았다. 충성을 맹세한 영주도 옆에서 늘 함께였다. 영주는 줄리오를 매우 아꼈다. 아직 멋모르던 때에 줄리오를 직접 거두어 기른 장본인이다. 풍채 좋은 영주가 호탕하게 웃으며 첫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저를 칭찬하던 것을 떠올렸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 말에 자신은 무어라고 대답했었던가. 노인의 축 처진 입매가 꿈틀거렸다. 기억을 더듬어 영주를 그리던 펜촉이 멎었다. 누군가 대문을 두들겼다.
사각사각. 줄리오는 다시 손을 움직여 영주의 코 아래에 수염을 그려 넣었다. 게으른 하인이 늦게나마 저택의 주인을 대신해 방문자를 맞으러 나갈 것이다. 영주는 코가 크고 입술이 두꺼운 편이었다. 흔히 일러 미남형은 아니었지만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늙은 줄리오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쾅쾅쾅. 미간을 찌푸렸다. 쯧. 서둘러야 할 것 아니냐. 근처에 없는 하인을 향해 혀를 차고 혼잣말을 했다. 어차피 이 저택에 그럴듯한 볼 일이 있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물건을 팔아제끼려 애쓰는 잡상인이나, 어디 멀리서 잘못 찾아온 사람이거나 기껏해야 영주의 안부를 전하러 온 사람일 테지. 노인의 그림 속 영주는 여즉 젊었다.
바싹 마른 손을 뻗어 물감이 묻은 팔레트를 집었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미처 지워지지 않은 물감 얼룩이 짙었다. 조만간 딸을 시켜 새것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붓도 함께. 그건 그렇고 이놈의 팔레트 칼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인이나 딸은 노인의 방에 손대지 않으니 분명 줄리오 본인의 문제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 옆에 놓인 나무상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상자 안에서 오래된 기름 냄새가 났다. 쾅쾅쾅. 쾅쾅쾅. 휘어진 코를 찡긋거렸다. 하인도 새로 구해야겠군. 자그마치 30년을 함께한 자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중얼거리며 노인은 상자를 잠시 뒤적이다가 발끝으로 저만치 밀어버렸다. 색을 꼭 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다음으로 미룰 요량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조금 더 섬세한 작업을 추가하는 편이 좋을까. 허공에 뜬 펜촉이 머뭇거렸다. 영주의 눈가에 자잘한 주름을 추가했다. 눈 밑에 옅은 음영을 넣고 그 아래에 작은 흉터를 새겼다. 이로써 영주는 훨씬 더 지금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말을 타고 옆에 선 줄리오는 여전히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노인이 재차 잉크를 적셔 영주의, 쾅, 눈동자를, 쾅, 채워, 쾅, 넣, 쾅, 쾅쾅, 긴 커녕― 펜촉을 험악하게 내리꽂았다. 흡사 바젤 신이 분노의 벼락을 내리는 형세였다. 조금 전 까지 영주의 눈이 존재하던 자리에는 모난 구멍이 휑 뚫렸다. 제기랄! 홉킨스! 멀쩡한 발이 두 개나 있으면 나가서 문을 열어야 할 것 아닌가!
노인은 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자주색 베레모가 그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부지런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노인이 한쪽 다리를 저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속도였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홉킨스, 홉킨스! 하인을 재차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영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줄리오는 직접 현관 앞까지 나가 문을 때려 부술 듯 두들기는 이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잡상인이라면 목을 조를 것이다.
조금 다행스럽게도― 또한 매우 불행히도, 브뤼네 저택의 불청객은 잡상인 따위가 아니었다. 노인은 현관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한 쪽은 허여멀건 스프처럼, 다른 한 쪽은 시커먼 목탄처럼 생겼다. 두 사람이 고급 재질의 청색 제복을 입고 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불에 타고 남은 무엇과 불에 타들어가는 중인 무엇이랄까. 어쨌든 노인은 그 옷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야아. 안녕하십니까. 검은 머리 남자가 눈을 빛내며 먼저 운을 뗐다. 매우 경박한 어조였다. 줄리오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 왕실의 나팔수가 무슨 일이오.”
“오, 왕실의 나팔수이니 나팔을 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분이 상할 말을 듣고도 역으로 나팔수를 자처할 줄은 몰랐다. 노인은 볼 일 없소, 라고 말하며 문을 닫았다. 닫으려고 했다. 어. 어어. 아직 악보의 첫 마디도 연주하지 못했습니다만. 사람 좋게 싱긋 웃어 보인 검은 머리 남자가 문을 단단히 붙잡고 버텼다. 무표정한 옅은 잿빛 머리 남자는 아까부터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꽤 바쁘신거같아 그냥 본론부터 불겠습니다. 돈 내시죠.”
“나는 할 말 없네.”
“어, 국왕 폐하께서는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 합니다.”
그가 글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팔락팔락 흔들었다. 끝에 왕실 인장이 찍혀있었다.
“미납된 세금이 올해까지 자그마치 2만 셀입니다. 맙소사. 납세의 의무를 매우 불성실하게 이행하시는군요!”
각종 기타 불법행각을 날마다 밥 먹듯이 저지르는 어디의 누가 할 말은 아니었다.
“…경은 누구요?”
“제이드 라누아라고 합니다. 저 쪽은 파래 사트레즈 경. 돈 내시죠.”
멀쩡하다기엔 다소 미끈거리고 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다. 의아하게 여겨 흘끗 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항변이 뒤따른다거나 별다른 조치가 취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력이 젊은 날의 날카로운 그것과 같았었더라면 파렐 사트레즈의 연회색 눈동자가 살짝 옆을 굴렀다가 돌아왔음을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노인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괴상한 이름을 수긍했다.
“아무튼 나는―”
“돈 내시죠.”
이런 식의 뻔한 대화는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돈. 세금. 돈. 내시죠. 재촉하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저 기사의 얼굴에 마음 같아서는,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인의 표정이 구겨졌다. 몇 번인가 말을 할 듯 말 듯 달싹이던 주름진 입술이 뜸을 들이다가 열렸다. 지금은 사정이 있네. 좀 봐주게. 그러자 기사가 명랑하게 말했다. 사정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지나가던 똥강아지에게도 사정은 있습니다. 발끈한 노인이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그 사정이 뭡니까. 진작 이럴 거였으면 앞의 말은 빼는 것이 나았다.
“딸아이가 아프다네.”
이번에는 제이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혹시 따님의 치료비가 연간 2만 셀씩 듭니까?”
“… 그게 아니라 당장 그 일을 해결하기에는 사정이 곤란하다는 말일세.”
사정은 저희도 곤란합니다. 국가도 곤란하고요. 제이드가 노인을 위해 다시 공문을 흔들어 주었다. 그 때 파렐의 기념비적인 첫 움직임이 있었다. 늘어져라 하품을 했던 것이다.
“자네는 자식이 없어서 내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인지 모르겠지만―”
“자식이 왜 없습니까? 여기 있는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하게 서 있는 파렐을 제 쪽으로 덥석 끌어당겨 어깨를 안았다.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자식 같은 후배랍니다. 오, 지금 기사 서임을 받고 첫 임무를 수행 중인데 어찌나 기특하고 사랑스러운지.”
보란 듯이 파렐의 뺨을 죽 늘린다. 그렇죠?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 ‘자식 같은’ 후배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몹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파. 뒤늦게 나직한 항의가 들어왔다. 노인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간다. 쾅. 막무가내로 문이 닫혔다. 아아. 어쩐다. 혼잣말에 이어 난감한 미소가 떠올랐다. 선배님 때문입니다. 파렐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런. 그렇게 콕 집어 말하면 아빠가 슬프잖아요.
*
“이거 놀랍군요.”
제이드는 엄지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생각할 거리가 있으면 나오는 버릇이다.
“확실히 치료비가 연간 2만 셀씩 드는 쪽은 아닌 듯 합니다.”
늦은 시각, 거하게 퇴짜를 사서 맞은 뒤 별달리 고려하지 않고 들어간 여관에서 식사를 마친 두 기사를 몰래 방문한 손님이 있었다. 그녀는 수줍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한 번 더 살피고 얼굴을 좀처럼 알아볼 수 없게 가린 답답한 후드를 걷었다. 윤기 흐르는 붉은 머리가 풍성하게 굽이치는 미인이다. 파렐의 건조한 눈길이 그녀를 꿰뚫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브뤼네 영애는 의자를 당겨 두 기사가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테이블에 합석했다. 하얀 도자기 같은 뺨에 건강한 홍조가 감돌았다.
“… 어떻게 아셨어요?”
“생스턴에서 저희와 아는 사이인 분이 브뤼네 님 밖에 없어서 말이죠.”
질이 괜찮은 과실주를 잔에 담아 권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저, 저는 세라 브뤼네라고 해요.”
기사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아버지 일로요. 영애는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제이드가 다정하게 눈을 마주치며 경청하는 데 반면 파렐은 그녀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지루하다. 그리고 피곤해. 귀찮아. 머지않아 곧 다가올 겨울을 닮은 눈동자가 반쯤 감겼다. 아무 것도 비추고 있지 않아 공허하다. 남들이 아는 파렐의 세계란 그랬다. 그곳에는 가끔씩 오래된 벽난로가 타닥거리는 소리만 쓸쓸히 존재했다. 뿌연 안개에 둘러싸인 채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정작 세계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는, 당연하지만 파렐 본인만이 알고 있었다.
저 쪽, 저 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보나마나 부단히 시끄러울 것이다. 눈부시게 밝고, 경쾌하고,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겠다. 아니면, 따로 중심이 숨겨져 있을까. 문득 생각을 바꾸자 어쩐지 축축한 진흙으로 잔뜩 메워진 무언가가 떠올랐다. 발을 들이면 걸음을 뗄 때마다 계속 빠질 수 밖에 없는 그런 것. 결국은, 방문자를 집어삼켜 잠식할 것이다. 유사와는 조금 달라서 어쩌다 간신히 발을 빼도 다리가 온통 진흙투성이일 것 같았다. 한참을 씻고 닦아야 할 만큼 질척거리는. 파렐은 무의미하게 손을 쥐었다가 폈다. 벌써 뭔가 묻은 느낌이다.
“브뤼네 님이 비밀리에 사병을 모으신단 말씀이십니까?”
제이드의 말에 파렐의 고개가 약간 돌아갔다. 어느 샌가 영애는 울먹이고 있었다.
“네…… 아버지께서 모시던 이전 영주님께서 아직까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아버지를 겁박하고 계세요. 최근에는… 저를 부인으로 맞으시겠다며 일방적으로 혼인 요구를…….”
“오. 저런.”
눈썹이 들렸다.
“…… 아버지가 세금을 못내시는 것도 비밀리에 사병들을 기르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영주님께 맞서기 위해서요. 저, 저는 너무 무서워요…… 어떡하지요?”
그렇군요. 그가 경쾌하게 긍정했다. 어쨌거나 진정한 목적을 떠나 반란이 아닙니까. 그런 식의 모병은. 영애의 안색이 대번에 새파랗게 질렸다. 파렐은 아직까지 말없이 가만히 그를 응시한다. 무심한 듯 가라앉은 시선이었다. 안에 담긴 저의를 알 수 없는, 다른 한 쌍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그래서 영애가 저희에게 부탁하실 일이란.
“저어… 아버지를 설득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파렐은 뜻밖의 문장에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제이드가 단어를 고르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까마귀 깃털이 흔들렸다. 죄송하지만 영애, 저희가 ‘설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답니다. 퍼뜩 의미를 알아차린 그녀의 뺨이 더 발갛게 물든다. 앗. 하얗고 고운 손은 서둘러 부끄러움을 못 이기고 입술을 깨문 얼굴을 덮었다. 죄송해요. 생각이 짧았어요. 저희 집안일인데 괜히 두 분께 폐를 끼치려고.
그렇게 더듬거리는 그녀는 나머지 가능성― 그러니까, 두 사람이 당장 왕궁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버젓이 고할 가능성은 추호도 고려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랬더라면 말이 끝나자마자 목에 칼 정도는 들이밀었을 테니. 파렐과 제이드의 시선이 생스턴에 도착한 직후 처음으로 공중에서 맞물린다. 제이드가 먼저 어깨를 으쓱였다. 파렐은 잠자코 다시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영애께서 설득해보면 어떠실지.”
그녀는 고개를 침울하게 저었다. 파렐은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댔다. 의도치 않았으나 이미 위법행위에 대한 명백한 증언을 확보한 마당에 설득이고 뭐고, 무슨 의의가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혹시.
“워낙 강경하세요.”
이렇게 저 혼자 두 분을 만나러 오는 것 조차도 너무나 힘들었답니다. 제이드는 영애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레이디. 부디 아버님을 위하여 용기를 내십시오. 두려움과 막막한 감정이 섞여 북받친 그녀가 테이블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 재밌어?”
파렐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아스라이 퍼졌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본디 말투였으나 아무도 중요하게 따지지 않았다. 제이드가 돌아본다. 또 눈이 마주쳤다. 그는 빙긋 웃었다. 그럴 리가요. 소리 없이 입모양이 얄밉게 벙긋대고 있다.
“…… …….”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영애가 침착하게 감정을 추스를 무렵, 여관 주인이 내려와 빈 그릇을 말린 과일로 채워주었다. 어렴풋이 창문을 바라보던 파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바로 옆에 세워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그 쪽을 향했다. 누가 따라왔어. 그 말을 듣고 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정황을 모르는 영애는 불안하게 눈치를 보았다. 영애를 따라오신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깜짝 놀란 그녀가 작게 한탄했다. 죄송해요. 그녀의 어깨가 주눅이 들어 축 처진다.
“영애께서 죄송하실 일은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가 그녀를 조심히 달랬다.
“어떡하지.”
그러나 제이드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여관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일부는 무기를 든 병사들이었다. 선두에는 예상대로 줄리오 브뤼네가 서 있었다. 노인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여관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딸을 발견하자 세라! 하고 호통을 쳤다. 겁을 먹은 영애가 파렐의 뒤로 몸을 숨겼다. 파렐은 딱히 이렇다 할 움직임 없이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리 오거라! 노인이 영애를 재촉했다. 영애는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고 사태를 잠시 관망하던 제이드가 한 걸음 나섰다.
“어, 일단은 서로 대화를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먼저 저 놈들을 쳐라!”
기껏 평화로운 제안을 했더니 협상은 결렬되었고, 되돌아온 것은 흉흉하기 짝이 없는 쇠붙이들이었다. 노인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검을 뽑아 일제히 달려들었다. 지극히 짧은 순간, 두 사람의 판단과 행방은 각각 달랐다. 제이드는 영애의 옆으로 재빨리 움직여 바짝 붙었고 파렐은 놀라우리만큼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 주저 없이 검을 뽑았다. 기세에 눌린 병사들이 주춤한 사이 신속한 검세가 파고들었다. 꽝. 첫 합에 망치로 금속을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여차 할 시엔 영애를 붙들고 일종의 ‘협상’을 하려고 했던 제이드는, 애초에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우리 어린 신참의 검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했다.
파렐은 능숙하게 찌르는 검을 피하고 허우적거리는 병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곧바로 쇄도하는 다른 검을 쳐냈다. 역으로 검을 빼앗아 멀리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나머지 병사들이 쉽지 않음을 감지하고 움찔거린다. 귀찮게. 웅얼대는 소리가 여관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렸다. 참지 못한 병사 하나가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덤볐다. 그러나 검에게 검이 부러지는 절망적인 수모를 겪어야 했다. 파렐의 의욕 저하된 멍한 눈길이 병사들을 훑었다. 노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오. 역시 우리 아들이 최고라니까. 보셨죠? 물러서 있던 제이드는 정적이 만든 틈을 놓치지 않고 뻔뻔스레 코멘트를 달았다.
“이……!”
워워. 진정하시죠. 지팡이를 쥐고 휘적거리며 다가온 노인이 격분해 영애의 뺨을 내리치려던 손목을 급히 잡아챘다. 노인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몸을 떨다 거칠게 내뱉었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손목을 놓아준 제이드가 유유히 덧붙였다. 따님도 브뤼네 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이러신 것 아닙니까. 진정하시죠. 영애는 목이 메어 야윈 노인을 끌어안았다. 마침내 노인은 허공에 뜬 손을 떨구었다.
스르릉. 그 모습을 본 파렐이 검집에 검을 집어넣는다. 제이드는 뻔뻔하게 파렐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물었다. 자아. 이제 어떡할까요. 첫 임무를 무사히 수행한 파래 경의 생각은? 씩 웃는 얼굴은 마냥 신이 난 것 같았다.
*
돌아오는 마차에서 파렐은 대략 닷새 만에 처음으로 평화롭게 꾸벅꾸벅 졸 수 있었다. 다만 어깨가 자꾸 눌려 무거웠다. 마음 같아서는 어깨에 기댄 이 검은 머리를 반대쪽으로 아주 치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되찾는 데 성공한 조용한 휴식을 스스로 박살내는 셈이 될 것 같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지난 닷새는 꽤 소란하였다. 무거워. 이번에도 파렐의 항의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곧 묻혔다.
일은 대부분 마무리가 되었다. 브뤼네가 자진하여 영주에게 맞서기 위해 모았던 불법 사병들을 해산시키고 자수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기사로서 정확한 보고는 해야겠기에 보고서는 여태까지의 사실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그대로 적긴 했다. 따라서 영주의 횡포를 감안하더라도 줄리오 브뤼네가 처벌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생각보다 무거운 형량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파렐이나 제이드가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그저 지나간 임무일 뿐이다.
잠결 몽롱한 기분으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나저나 뭐랄까― 여전히 시끄럽고, 이상한 사람이다. 겪어본 결과 훨씬 이상했다. 파렐으로서는 드물게 부단장이 새삼 야속하게 느껴졌다. 무거워. 잠에 취해 옆에 기댄 이가 마음대로 붙인 이마를 문질렀다. 어깨가 뻐근했다. 설마 일부러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큭큭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건지, 힘이 빠진 파렐이 그를 가벼이 밀어냈다. 손이 붙잡힌다. 뺨에 멋대로 대어진 손등이 불 피운 난로에 올린 듯 따끈하다. 음. 파래 경은 저보다 시원하네요. 그래서 자는 동안 기분이 좋았나 봅니다. 손은 다시금 쿠션 위에 얌전히 놓여졌다. 쉬이 물러난 제이드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창밖으로는 낙엽이 바람에 구르고 있었다. 고작 닷새 사이에 가을이 훨씬 깊어진 느낌이었다. 풍경을 감상하던 제이드는 작년 가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또 한바탕 떠들 생각으로 파렐을 향해 돌아앉았다. 맞다. 파렐 경― 처음으로 제대로 부른 순간이었다. 그러나 파렐은, 졸고 있었기 때문에 듣지 못했다.
밝은 잿빛 머리카락이 마차가 흔들리는 대로 춤췄다. 언뜻 잠든 파렐이 왼쪽 귀에 찬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원통 모양의 액체를 담을 수 있는 특이한 구조였다. 제이드는 그것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딱딱한 의자에 풀썩 기대어 앉았다. 있잖아요. 파렐 경. 으응. 아빠. 적당히 발음이 무너진 대답이 돌아왔다. 등꽃을 좋아합니까? 한참 만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눈을 뜬 파렐이 옆을 흘깃 바라보았다. 시선이 얽혔다. 얽혔으나 맺어지지 않았다. 으으응. 길게 늘어뜨린 대꾸였다. 마구 늘려 색이 희미하다. 눈이 도로 소륵 감겼다.
그렇군요. 제이드는 가만히 웃었다. 저도 좋아합니다.
잘 자요. 파렐 경. 수고했어요.
파렐이 다시 눈을 뜰 때까지 마차 안은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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