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629 까마귀
라누아 저택 주변에는 까마귀가 많이 있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는 늙은 여인은 원래 터 주인이 따로 있었다고 했다. 더 작고, 높은 소리로 예쁘게 지저귀는 새였다고.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까마귀 한 쌍이 불쑥 날아들어 왔고 지금은 저택 주변에 둥지를 트는 새가 오직 까마귀들뿐이게 되었다.
까악. 까각깍깍깍. 늙은 여인은 까마귀를 몹시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의 뜰에 앉기라도 하면 벌떡 일어나 지팡이를 마구 휘둘러 쫓아냈다. 불편한 티타임에 초대된 소년은 날카롭게 울며 날아가는 까마귀를 차마 보지 못하고 찻잔을 꾹 쥐었다. 힘을 준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어디까지 했더라. 인자한 모습으로 소년의 앞에 앉은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괘씸한 놈아. 할미와 눈을 마주쳐야지. 어딜…… 이 더러운 까마귀 같은 자식이. 내 말을 무시하고― 소년은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육중한 몸을 세우고 천천히 일어났다. 기류가 급격히 헝클어졌다. 갑자기 무수히 쏟아지는 소리들. 그것은 한계의 한계의 아주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지다가 어느 순간, 팩, 하고 맥없이 끊어지는. 그리고―
― 아니요, 할머니. 여기 듣고 있습니다.
소리가 멎었다. 나긋하게 대답한 소년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느리게 의자에 앉는다. 그 과정은 매우 더뎠다.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허리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걸치고. 소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착하구나. 우리 손자. 제스. 까마귀를 내쫓은 늙은 여인의 지팡이가 풀이 쓰러진 바닥을 굴렀다.
세세토록 광영무쌍하고 유서 깊은 라누아의 이름으로 이르되 소년도, 까마귀도, 불청객이었다. 이를테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들. 우연찮게 소년의 머리는 까마귀의 깃털처럼 검었고, 그을린 피부도 까마귀의 부리나 다리처럼 어두웠으며, 눈은 까마귀가 훔쳐 물어다 놓은 금화처럼 빛났다. 까마귀 도련님. 시종들은 들으라는 듯 조소했다. 소년도 알고 있었다.
가주의 마차가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소년을 붙잡아 태웠을 때에, 소년은 두렵지 않았다. 값을 치르지도 못하는 주제 술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풀썩 쓰러진 그대로 죽어버린 어미나 수많은 타액과 눈물로 젖어 더럽고 질척이며 상스러운 거리에 가질 미련은 없었다. 저택으로 가는 내내 가주는 소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소년은 가주를 줄곧 바라보았다. 너, 이름이 뭐냐. 제이드에요. 제스라고 불러주셔도 돼요. 그건 애칭이니까요. 지극히 짧은 대화가 오갔다. 여태껏 만져보지 못한 감촉의 쿠션을 품에 껴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그 푹신함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늙은 여인의 품에도 스스럼없이 안겼다. 품에서 지독한 고양이 냄새를 맡은 순간 정확한 명칭도 모르는 가지고 싶은 것들이 앞 다투어 마구 떠올랐다. 하고 싶은 것들도. 품지 못했던 감정들도. 소년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탐욕이라는 씨앗이 심어졌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황량한 소년의 안에 굵은 덩굴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자라났다. 그리고 소년을 단단히 옭아매 삼켰다.
소년은 살아남기 위해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덩굴은 습하고 침침한 그늘에서도 끊임없이 몸을 불렸다. 갖고 싶은 것들, 하고 싶은 것들, 혹은 피어오른 감정들을 까마귀처럼 물어다 그곳에 숨겼다.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 때마다 소년은 새카만 까마귀였다. 어쩌면 늘.
*
“아름다운 레이디. 부디 당신의 고결하고 순결한 손등에 입을 맞추고 미천한 저에게 그대의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이것 봐요, 기사님. 작업 방식이 너무 구식 아닌가요?”
저쪽 자리에서부터 성큼성큼 다가와 앞에서 허리에 손을 얹자 그를 중심으로 양 옆에 앉은 여성들이 신이 나 웃는다. 그는 흠, 하고 능청스레 눈을 깜박이다가 잠시 기다려 달라는 듯 검지를 세웠다. 테이블 위에 색을 입힌 작은 도기가 셋 놓인다. 이내 가운데 그릇을 살짝 들어 작은 금반지를 감췄다.
“어머! 내 반지가 언제……”
“잠시 빌리겠습니다. 레이디.”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없어진 반지가 끼워져 있었던 손가락을 가늠하는 여자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모습이 영 뻔뻔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는 그녀에게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고 세 개의 그릇을 천천히 섞었다.
“엘리즈에요. 좋아요. 하. 맞춰볼까요. 갈고 닦았던 저의 예지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군요. 반지는 셋 중에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을 거예요. 아까부터 주욱 봤지만― 자아. 그 쪽은 기사가 아니라 사기꾼에 더 가까워요.”
매력적인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그녀는 한껏 비꼬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적극 나설 일은 아니었다. 술집에서 여성에게 수작을 거는 자들은 많았다. 오는 목적 자체가 그것인 경우도 많지 않던가. 하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결혼 날짜만을 고대하던 약혼이 깨질 위기에 처해서, 아니, 조금 우울해서 홧김에 들이킨 술 두 모금이 괜히 열이 났기 때문이다. 아직 왁자지껄해지기에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술집은 시끄러웠다. 원인은 한 사내가 벌린 내기였다.
그는 상대가 구슬을 찾는다면 이 술집에서 제일 비싼 술을 원하는 만큼 사줄 것이고, 찾지 못한다면 동행한 여성이 자신의 옆에 앉을 것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호승심에 많은 남자들이 도전했다. 단순히 으스댈 거리를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겨우 세 개의 그릇 중에 구슬을 숨긴 그릇을 고르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녀가 첫 잔을 비웠을 때는 자그마치 열네 명의 여성이 그와 합석한 상태였다. 이건 말도 안 돼. 절대로― 내기에 응했던 남자가 콧김을 뿜었다. 여성 분 대신 당신이 와서 앉아도 괜찮습니다. 그 말은 어쩐지 진심으로 들렸으나 남자는 참지 못해 술집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보나마나 사기꾼이군.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일어나 그에게 온 것이다.
“제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들, 진실과 열정, 지혜의 루비처럼 황홀히 빛나는 그대의 두 눈은 속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레이디께선 부디 저의 진심을 시험해보시길.”
그는 우아한 손짓으로 선택을 권했다.
“날 바보로 알아요? 어디서도 나오지 않을 거라니까― 누가 보아도 이 그릇이었지만……”
그녀는 속이 울렁거리는 구닥다리 문장에 투덜거리며 오른쪽 그릇을 짚었다. 누구나 눈으로 쉽게 따라갈 수 있을 만큼 느릿하게 섞은 그릇들이었다. 주변에 앉은 모든 여성들이 그녀가 지적하기 전부터 그 그릇에 주목하고 있었다. 왠지 바보짓에 휘말린 것 같아 거칠게 팔짱을 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웃는다. 그녀는 고개를 팩 돌렸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레이디.”
여성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가 들어 올린 그릇 안에는 반지와 함께 은은한 향이 감도는 아름다운 색색의 꽃송이들이 들어 있었다. 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마침내 저의 진심을 꿰뚫어보셨군요.”
“…… …….”
사실 반지의 존재 여부와 관련된 상황만을 예상했지 무언가가 더해질 줄은 몰랐다. 이런 요란한 상황도.
“그대의 신비로운 예지력을 소개할 무대는 아쉽게 다음으로 미뤄야겠습니다. 대신, 오늘의 유일한 승리의 붉은 여신을 위해 제가 한 잔 대접할 수 있게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놀리는 거야 뭐야. 속으로 생각하거나 말거나, 그는 다른 여성들을 떠나보내며 일일이 작별 인사를 했다. 짧은 시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내기를 건 무례는 부디 용서해주시길. 빌린 반지의 주인인 여성에게는 직접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꽉 찼던 좌석은 빠르게 비워졌다. 어색하게 다가가 건너편에 앉았지만 경계는 풀지 않았다. 그가 직접 잔과 병을 들고 와 그녀의 앞에 잔 하나를 내려두었다. 개봉과 동시에 향긋한 포물선을 그리며 고급스런 보랏빛으로 잔이 채워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가녀린 손가락들은 이내 잔을 들었다.
“생각해봤는데, 처음부터 저에게 불리한 내기였어요. 당신은 어느 쪽이든 잡아떼면 그만이니까.”
“아직도 저를 믿어주시지 않으시는군요. 슬플 따름입니다.”
“그런가요. 그 쪽 기사님은 성함이―”
“제이드 라누아.”
라고 합니다, 레이디. 잔에 든 술을 회전시키며 그가 덧붙였다. 검은 머리카락, 태운 피부, 금색 눈. 다소 이국적인 인상이다. 굳이 따지면 남부 지방 출신 같기도 하고.
“저, 아까 뒤돌아서서 인사하실 때 봤는데… 머리에 그건, 진짜 깃털인가요?”
“어렸을 때 집 주변에 까마귀가 많이 살았습니다. 흠, 할머니께서 반대하긴 하셨으나 몰래 기른 적도 있죠. 이름은 스튜어트였습니다. 꽤 사랑스러웠는데.”
“그래서…… 그… 스튜어트의 깃털?”
“예. 뜰에 떨어진 걸 주워다 장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아아. 그녀는 대단히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그는 친절하게 웃었다.
“레이디께서는 기다리시던 분이 계시던 것 같은데.”
“스튜어트는 어떻게 됐나요? 제 말은, 잘 살고 있나요?”
그녀의 시선이 다급히 흔들렸다. 제일 피하고 싶은 화제다. 뭐라고 하든 이대로 아무런 말이나 붙잡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오늘 처음 보는 사내에게 곧 약혼을 파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떼었다. 일부러 모른 척 해주는 것 같았지만 어떠랴. 그녀는 스튜어트의 안부라는 게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화제라는 듯 애써 웃으며 당겨 앉기까지 했다. 마침 까마귀는 일반 새 치고 수명이 긴 편이었다.
“죽었습니다.”
“… 아. 유감―”
“데리고 온 다음 날 할머니께서 벽난로 안으로 집어 던지셨거든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가벼운 그의 어투에서 선득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이웃의 안부라도 전하는 태도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아 음, 같은 소리를 내며 말끝을 흐렸다.
본의 아닌 불편한 침묵이 길어졌다. 그는 여전히 이리저리 잔을 기울여가며 술의 색을 감상하는 데 열중했다. 아까 그 많은 여자들과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었던 걸까. 그 때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던 것 같은데. 가장 비싼 술이라더니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판이다.
참다못한 그녀가 채 꺼낼 말이 준비가 되기도 전에 입을 열었을 때,
“엘리즈!”
기적처럼 그녀의 약혼자가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진심으로 환호성을 지를 뻔 했다.
“로빈. 와 주어서 고마워.”
“내 사랑, 좋은 소식이 있어. 약혼은 깨지지 않을 거야. 어머님께서 마침내 허락하셨어.”
“정말이야? 세상에. 로빈― 나 너무 기뻐!”
그는 상석에 앉아 감격에 겨워 얼싸안는 두 남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눈물을 흘리고 웃으며 저들끼리의 대화를 나누는, 이 황당할 정도로 갑작스럽기 그지없는 장면은 흡사 희극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오, 세상에. 정말 감동적이야. 일말의 동정과 감흥조차 없는 어조로 평했다. 그러나 눈에 눈물이 가득 담긴 그녀가 달려와 와락 안길 때에는 정말로, 조금 놀랐다. 하마터면 아까운 술이 넘쳐 쏟아질 뻔 했으므로.
“고마워요, 라누아 경! 오늘 즐거웠어요.”
“…… 즐거우셨다니 더할 나위 없는 저의 기쁨입니다.”
“다음에 또 뵀으면 좋겠어요.”
그는 방금까지 그녀가 이 자리를 몹시 불편해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빙긋 웃었다.
“재회의 때까지 레이디에게 평화와 행운이, 그리고 바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술집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병에 든 술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거나하게 취하는 것에 익숙할 만큼 술을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제법 맛이 괜찮은 편이었다. 그냥 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발밑에 병을 내려두었다. 그는 느슨하게 앉아 배 위에 양 손을 포개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확인하듯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뭔가가 가득 잡힌다. 손에 푸른 보석이 박힌 팔찌가 감겨 나온다. 태연하게 자세를 고치자 희미하게 동전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흐음. 이 허리 장신구는 초록색 최고급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의 것이고, 이 반지는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고 낭랑했던 레이디의 것. 문양을 수놓은 동전 주머니는 제법 묵직하다. 왕녀님 만세. 이별의 때에 슬쩍 뽑은 머리핀은 안타깝게도 진품이 아닌 것 같았다. 또… 이것은… 또… 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승리의 붉은 여신의, 쯧. 이제 보니 이거― 약혼 반지였나. 난감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가부간 그는 오늘도 성공적으로 온 세상에 흩어진 그의 재물을 그러모았다.
그 있지 않은가, 까마귀가 반짝이는 물건들을 물어다 모아놓는 것처럼. 아마도.
고결하고 격조 높은 로열 글라디우스 기사단 소속 기사 제이드 라누아는 술집에 이제 막 들어오는 이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아, 그 쪽의 신사 숙녀 분. 저와 내기 한 번 하시겠습니까?”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이드] 랑시 (0) | 2018.01.28 |
---|---|
[제이드] 계약할 때는 특약조항을 꼭 확인해 (0) | 2018.01.28 |
[제이드] 어느 비 오던 날에 (0) | 2018.01.28 |
[제이드] 회고 (0) | 2018.01.28 |
[채민윤환] La foi. (0) | 2017.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