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628 회고 (신청미션)
그의 아버지는 남부와 인접한 중앙 지방의 귀족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났을 당시, 그의 어머니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유흥업을 하며 근근이 먹고 사는 처지였다. 축제물이 빠지고 돈벌이도 영 시원치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간만에 시찰을 왔다는 귀족 나리의 돈 몇 푼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돈 몇 푼을 위해 직접 몸까지 던져가며 애썼던 것 같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것은 썩 생산적이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배가 달이 찰수록 조금씩 불러왔다. 일을 할 수 없어 다시 돈 몇 푼이 귀한 시기를 겪으며 어머니는 고민했다. 이제라도 약을 먹어 태중 아이를 지울 것인지, 어떻게든 참고 낳아 하루 한 번 밥만 먹여주면 평생 따로 삯을 줄 필요 없는 종놈이나 종년으로 쓸 것인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어머니는 후자를 택했다. 그 해 여름나기가 쉬워 만삭의 산모가 버티기 수월했던 것도 한 몫 했다.
소낙비가 무수히 쏟아져 내린 날 태어나 걸음을 뗄 수 있게 된 순간부터 그는 어머니가 작정한대로 온갖 심부름을 도맡았다. 주로 호객이나 고급 복식을 입은 사람들의 뒷주머니에서 이런 저런 것들을 슬쩍 하는 일이다. 조금 더 자라자 뒷골목 야바위꾼들에게 어린 녀석이 손재주가 좋다며 몇 가지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더 있다면 정오부터 술이 들어간 밀수꾼들은 어떻게 하면 나리들에게서 들키기 않고 멀리 도망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었고 사냥꾼들은 짐승을 추적할 수 있는 비법을 떠벌렸다. 그런 비슷한 것들이 모여 그럭저럭 교육 환경을 조성했다.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어머니는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에 술병으로 죽었다. 그는 조금 침울해져있었다. 그래서 커다란 마차가 바로 앞에서 멈추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나 싶다. 마차에서 내린 중년 신사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중년 신사에게 팔을 단단히 붙잡혀 마차에 탔다. 하루를 꼬박 달려 도착한 저택은 그가 타고 온 커다란 마차가 작게 보일 만큼 대 저택이었다. 두리번거리며 그가 내리자 줄곧 기다리고 있던 늙은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를 껴안으며 오열했다. 그 동안 어디 있었니. 고생이 많았다. 여자의 품에서는 고양이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어쨌든 그의 운명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바뀐 셈이었다. 그는 일개 마담의 사생아에서 새로이 일명 ‘줄’을 대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가까스로 거듭난 전前 몰락 귀족 라누아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결국 충격으로 망령이 들어버린 늙은 여인의 고집이 빚어낸 일이었다. 일찍 병사한 정실부인의 핏줄이며 가문의 하나 뿐인 아이가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전염병으로 죽은 탓이다. 정처 없이 흘러가는 말싸움에 지친 가주가 늙은 어머니에게 ‘그렇게 손자를 원하시면 천것의 아들이라도 데려오리다’ 라고 한 것은 무심코 던진 소리였으나 그녀는 가주를 저주하며 네가 가족을, 불쌍한 것을 버려두었다하여 고함을 질렀다. 매일 같이 가솔들에게 손찌검을 하고 매일 아침 저택 대문 앞에서 재산을 마구 뿌려대는 통에 더 이상 가주는 버티지 못하고 그를 찾아 데리고 온 것이다.
이후 생부이자 라누아 가문의 가주는 그를 철저하게 방임했다. 애초에 망령이 든 그의 조모가 난데없이 날뛰어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온 것이니 당연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데리고 올 것을 강요한 조모가 그에게 친절하고 잘 돌보아주었느냐 하면, 그것은 더욱 아니었다. 이미 사리가 몹시 어두운 조모는 그를 철저하게 구속했다. 밖에 나가면 몹쓸 병에 걸린다는 이유다. 한 번은 방에 가두고 잊어버려 꼼짝없이 며칠을 굶은 적도 있었다. 별안간 이성을 놓치고 감히 너 따위 것이 기어 들어와 손자 노릇을 하려 든다며 지팡이를 마구 휘둘러 온 몸에 멍이 드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조모가 실컷 학대를 일삼고나서 갑자기 오열하며 그를 다정하게 안아주면 그는 어쩔 줄을 모르며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 아직 어린 소년에게 정상적인 범주를 훨씬 넘긴 이러한 행동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아무 것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멀쩡한 티타임 뒤에 예상치 못한 무자비한 폭행이 자행되기를 여러 번― 그리고 다시 눈물의 사과와 함께 애원하는 가엾은 늙은 여인. 그가 혹시나 저택을 벗어날까봐 무장된 하인을 시켜 감시하게 둔 것으로 모자라 잠든 밤에 그의 방을 급습한 적도 여러 번. 거대한 무력감을 느낀 만큼 그의 내면은 빠르게 지쳐갔다.
마침내 조모가 사망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도 라누아 가문의 장자로서 예복을 입고 늙은 여인이 담긴 검은 관을 내려다보았다. 저택에 온 지 몇 해 만에 그는 키가 훌쩍 컸다. 아직 열 일곱, 여덟 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마 앞으로도 더 클 것이다. 장례식은 몹시 단출했다. 재산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가주가 나서서 식의 진행을 재촉하였고 의식을 도우러 온 사람들도 쫓겨나다시피 돌아갔다. 주변엔 알리지 않아 당연히 조문객은 없었다. 그는 이름도 모르는 들꽃 한 송이를 꺾어 아무 것도 없는 마른 비석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현재.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가주님.”
그는 씨익 웃었다.
“그 때도 말했지만, 신세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거든 왕녀의 치맛자락이라도 잡으며 버텨라. 우리 가문이 몇 십 년 전처럼 다시 광영할 수 있는 일이야. 지금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혼란기라 처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네까짓 것이 운 좋게 양자로 들어와 나와 우리 가문에게 감사할 줄 안다면―”
“그 때도 말씀드렸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잘 해낼 것입니다. 가문에 누를 끼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가주는 그의 코앞에서 위협적으로 굵은 손가락을 흔들다가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것도 재차 말하는 거지만, 물론 재산은 네 앞으로 한 푼도 남겨줄 수 없다. 꿈도 꾸지 말거라.”
그는 어깨를 으쓱, 싱긋 웃고 허리를 정중히 숙였다. 능구렁이처럼 유려한 손짓마저 잊지 않는다. 가주는 무어라 투덜거리며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사람들 틈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가주를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광장에 한동안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묵묵히 흔들렸다. 햇살을 받아 너울거리던 금빛 눈동자는 금세 침잠했다.
가주는 조모가 사망하자 기다렸다는 듯 그를 웃돈까지 주어가며 기사단에 입단시켰다. 곧 다른 기회가 생기자 강제로 탈단시키긴 했지만─ 허나 그 때는 확실히 달랐다. 답지 않게 그를 위해 다 낡은 가문의 이름마저 들먹이는 수고까지 들이며 쑤셔 넣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외로, 아무튼 그가 집 안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몸서리치던 자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라누아 저택에 이대로 다시 남느니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을지언정 거지 소굴에라도 자진해 들어가는 것이 나았다. 그는 가만히 손목을 매만졌다. 뒤로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났으나 라누아 가문은 여전히 비슷하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제 늙은 가주는 그토록 좇던 광영과 영락을 누리기에 남은 시간이 적다.
2년 전, 철혈의 왕녀가 그가 속한 로열 글라디우스의 기사단장이 되었다. 감히 그는 현재의 이 판도와 판세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가 속한 또 하나의 군체, 라누아 가문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딱히 진심으로 가주의 신신당부가 와 닿아서는 아니다. 다만 그가 세운 놀라운 계획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왕좌의 행방이다.
또한 오늘 광장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선언이 있었다. 그것도 아스트리드와 셀레비스와 마레의 왕, 루 페리와 라슬로의 대영주, 이 땅을 수호하는 바젤 신의 첫 번째 기사, 그리하여 백합 왕좌의 지고하며 정당한 주인이신 버미어 가의 듀란드 폐하의 이름으로.
그는 언젠가 라누아 가문을 직접 이끌 것이다. 생부이자 현재 가주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이고, 정식으로 입적한 이상 자격도 충분하다. 미치광이 조모의 품에 안길 때부터 정당하게 누릴 권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천한 어미를 둔 어린 소년의 발칙한 꿈은 보기 좋게 산산조각이 났다. 그 동안 저택의 무게에 짓눌리며 꿋꿋하게 버틴 대신이라고 해도 좋다. 시작 시기가 많이 늦어졌을 뿐, 아직 완전히 늦지 않았다. 창고에 쌓인 도자기나 금괴, 고급 옷감, 장신구,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들이 그의 것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스러져버린 명예, 몇 십 년 전 몰락해버린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가 광적으로 집착하는 그것에도 조금 욕심이 났다. 또한 명예에는 응당 부수적인 것들이 따르는 법.
신중해야했다. 세 분파로 나누어진 세력들은 각기 저마다의 명분이 있다. 기사단장께서 왕좌에 오를 확률은 얼마나 될 것인가. 길거리 야바위에는 자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런 것은 통하지 않는 도박판에, 그는 서 있었다. 단순히 재밌겠다고 재며 덥석 덤벼드는 행위는 뒷골목에서도 하수나 부리는 수다. 위태로운 현실에는 반드시 위험한 구석이 존재한다. 지금은 그 장단이 너무나 확연해서 문제이지. 붙잡지 못하면 도태된다.
그는 높은 구조물에 걸터앉아 까마득히 아래로 펼쳐진 훈련장을 바라보았다. 달이 밝지 않아 어둡다. 두꺼운 베일이 드리운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형형히 빛났다. 기사들의 투지로 가득 찬 걸음으로 인해 몹쓸 토양은 군데군데 푹 패여 있었다. 가시덩굴과 푸른 장미와 검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인다. 생각에 깊게 잠길 때마다 아랫입술을 매만지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잔잔히 깔리는 초여름 밤벌레 울음소리가 흔들리는 방울 소리를 닮았다.
“…… 왕국을 다스릴 왕재(王才)는 어느 누구보다 강하며 지혜롭고 또한 사려 깊은 자로 됨이 마땅하리니…… 너무 조건이 까다로운 거 아닙니까? 쉽지 않은데요.”
하지만 그는 금세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모시는 기사단장을 떠올렸다. 강인하고 영리하며, 왕재에 걸맞게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녀는 존경스러운 야심가이며 로열 글라디우스를 선도하는 기사다. 당장은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의 일은 조금 다르겠지만. 그는 높은 곳에서 훌쩍 뛰어내려 별다른 소음이나 어려움 없이 가볍게 착지했다. 곧 불시에 점호가 있을 것이므로 슬슬 숙소로 돌아가는 편이 좋았다.
“백합의 주인께 영광 있으라.”
더불어 라누아 가문에게도.
난간을 넘어 커튼마저 치자 그 자리에는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이 되었다.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이드] 랑시 (0) | 2018.01.28 |
---|---|
[제이드] 계약할 때는 특약조항을 꼭 확인해 (0) | 2018.01.28 |
[제이드] 어느 비 오던 날에 (0) | 2018.01.28 |
[제이드] 까마귀 (0) | 2018.01.28 |
[채민윤환] La foi. (0) | 2017.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