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17 붉은 것 (with. 에브닉)
“제이드 라누아.”
에브닉이 건조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팔자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종이에 연신 무언가를 써내려가던 제이드가 부름에 응답하듯 뒤를 돌았다. 그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어 풀밭에 앉아있었다. 다물린 입술이 벌어지고, 야아. 공자님. 에브닉을 반긴다. 눈이 호선으로 슬며시 접혔다. 어떻게, 또 찾아오셨네요. 이 붉은 머리의 귀공자는 조금 신기하게도, 아무 곳에나 날아든 자신을 어떻게서든 쉽게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찾아내기 위해 찾아낸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멀리 쫓아내기 위해 저를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했다. 제이드의 손이 악기의 선율을 타는 것처럼 풀밭을 훑는다. 파스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동요가 일어 어지러운 마음을 채운다.
까마귀의 시선이 에브닉의 손에 먼저 가 닿았다. 흠 한 점 없는 루비 반지가 검지에 매여 있다. 셀레비스. 공자는 그 이름을 등에 이고 오래 전, 남쪽에서부터 왔다. 셀레비스는 붉다. 루비도 붉지. 새삼 저 루비가 세상을 앞에 두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 같아 그는 웃었다. 상대는 제 미소를 보고 그저 탐을 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터무니없이 욕심을 낸다고 생각하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제이드 라누아는 터무니없이 욕심이 많았다. 가지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다. 아주, 많다. 혹자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제법 점잖게 칭했다. 검고 더럽고 질척이는 무엇이 자꾸만 사람을 꾸역꾸역 삼켜가는 게 탐욕이라며 겁을 주었다. 제이드는 오래 전, 저를 삼켜버린 그것을 단 한 번도 부정해본 적이 없었다. 공자는 오래 전, 남쪽에서 왔으며 까마귀는 오래 전, 삼켜졌고―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팔짱을 끼고 나무에 한 쪽 어깨를 붙인 에브닉이 침묵을 지키자 그는 또 웃었다. 웃는 눈은 둘이었으나 공자를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외눈이었다. 나머지는 어둠이나 빛이 뭉쳐진 형상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낮게 가라앉아 있는 짙은 금색의 눈 한 쌍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가 문득 손을 들어 보이지 않는 눈을 스스로 덮는다. 내린 빛이 에브닉의 어깨 위로 부서진다. 아. 죄송합니다. 에브닉 경이 준 거, 깜박 잊고 안 가져왔어요. 멋대로 뱉는 말과는 다르게 전혀 죄송한 어투가 아니었다. 눈이 가늘어지고 곧게 뻗은 눈썹이 비스듬히 치켜 올라간다. 그러나 여전히 입은 굳게 닫혀있다. 뭡니까. 불안하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하세요. 결국 제이드가 먼저 얼굴을 구기고 툴툴거렸다. 없으면, 전 갑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툭툭 두들기고 기지개를 쭉 켰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그 말이 허공에 손이 뻗던 것을 멈추게 했다. 제이드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다음 장면까지는 간극이 꽤 길었다. 햇빛이 시릴지언정 눈이 감기지 않는다. 시선이 어떤 한 방향으로 자연스레 고정된다. 그렇게 응시한다. 왜요, 라고,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지를 묻는 대신― 대뜸, 너무 많아서 큰일이지요. 하고, 입이 절로 움직였다. 먼저 움직여버린 탓에 입꼬리는 뒤늦게 따라 올라갔다. 기묘하게 보였을 것이다. 금세 흉터가 아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떨구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상태가 진정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을 더 잇는다. 그거요. 공자님이 지금 끼고 계신 루비 반지가 가지고 싶습니다. 에브닉의 손을 넉살좋게 가리켰다. 제이드 라누아의 행태란 과연 뻔뻔하기까지 했다. 에브닉은 턱을 내려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붉은 것만 보면 연신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던 것이 기억났다. 반쯤은 장난이었겠지만, 에브닉 역시 그 황당한 사태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었다.
“이게 갖고 싶다고?”
에브닉이 괜한 것을 본 것 마냥 몸을 뒤로 빼고 반지를 멀찍이 살피며 되물었다.
“네. 너무 가지고 싶어서 곧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이드는 빙긋 웃었다.
“―그래. 맘대로 해라.”
일말의 고민도 없이, 에브닉은 손에서 반지를 빼냈다. 너 가져. 예? 그리고 손바닥에 반지를 얹고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막상 반지를 앞에 둔 그는 즉시 손을 뻗지 않았다. 붉은 반지와 호박색으로 고여 있는 에브닉의 눈동자를 번갈아 가늠한다. 본인 외에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상념에 사로잡혀 떠올랐던 미소마저 일시에 가라앉았다. 그보다 조금 더디게, 팔이 올라갔다. 그의 손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잡는다. 어, 하고 멈칫한 순간에 민망한 웃음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직 가깝고 먼 것이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던 탓이다.
“쯧. 이제는 줘도 못받는거냐.”
에브닉은 지극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손목을 불친절하게 잡아끌었다. 줘 봐. 에브닉은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그의 검지에 밀어 넣었다―제이드가 에브닉의 행동에 잠시 당황한 것은 일단 제쳐두고―아니, 밀어 넣으려고 했다. 반지는 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차마 꾸역꾸역 넘지 못하고 걸리고 말았다. 괜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하다못해 내가 이 자식보다 손도 작단 말인가. 결국 차선책은 그나마 가장 가는 편인 소지였다. 다행히 반지는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마지막 손가락에서 불타오르는 듯한 광영이 모였다. 가치가 드높고 아름다웠다. 멋지네요. 제이드는 에브닉을 향해 픽, 웃었다.
“공자님.”
에브닉 경. 그는 보석에 시선을 두고 입을 열었다. 에브닉은 뭐야, 하고 퉁명스레 답한다. 혹시 제게 빚을 지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빚. 네. 빚이요. 내가 네놈에게 질만한 빚이 뭐가 있어. 날카로운 문장이 선득하다. 어느 선 이상의 침입을 굳게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눈을 불시에 맞춰왔다. 그러고는 또 웃는다.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푸스스, 하고 문득 무언가가 스러진다. 어설피 쌓아 올린 모래성 같은 것이었다. 혹시, 나중에라도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그건 그것대로 소름 돋으니까. 미간을 찌푸린 에브닉이 건방진 까마귀의 정강이를 걷어차주기 위해 다리를 뺐으나 제이드는 용케 피했다.
“―반지는 잘 모셔두겠습니다.”
선물 감사합니다. 까마귀는 반지가 족쇄처럼 채워진 손을 흔들었다.
붉은 것이 연신 빛났다. 가시에 찔렸다. 아마 장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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