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26 사탕, 그리고 (with. 그리젤다)
사탕은 언제나 달았다.
어른이 된 그가 어릴 때와는 입맛이 조금 달라졌어도 여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사탕이, 언제나 달다는 점이었다. 작은 사탕. 하나같이 어린 소년의 입 안에 쏙 들어가는 크기였다. 그렇지만 맛은 저마다 달랐다. 사과 내음이 나는 것, 딸기 내음이 나는 것, 가끔은 포도 내음이 나는 것― 소년은 그녀가 입 안에 넣어주는 사탕을 기다렸다. 상처가 별 탈 없이 잘 여문 입술을 벌리면 미소가 어여쁜 어린 선생님은 어린 자신의 학생에게 상을 주곤 했다. 으레 문장을 틀리지 않고 잘 읽었다거나, 가르쳐 주지 않은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썼다거나, 글씨를 예쁘게 썼을 때, 혹은, 그녀를 보고 웃을 때. 소년은 절로 웃으려다가도 금세 표정을 황급히 감추었기 때문에 그것이 안타까웠던 그녀는 그녀의 소망을 사탕에 궁굴려 묻혀 소년의 입에 물려주었다.
―있잖아. 이게 맞지, 선생님? 아니에요?
덜 자란 소년은 경어가 마음대로 뒤섞인 어설픈 화법을 구사했다. 그를 고쳐주는 것 또한 그녀의, 그리젤다의 일이었다. 칭찬해주세요. 소년은, 제이드는, 둥근 사탕을 좋아했지만 아마 그보다 선생님이 해주는 칭찬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선생님. 칭찬해주세요. 그녀는 소년에게 말했다. 잘했어, 제스. 소녀의 것 치고는 단단한 손이 알록달록한 사탕이 든 유리병을 열어 사탕을 집는다. 사탕은 소년의 그을린 뺨을 부풀게 만들었다. 소년은 풀밭 위에 엎드린 채 다리를 한가롭게 흔들었다. 힘을 주어 하얀 종이 위에 차근차근 글씨를 써내려갔다. 어디보자― 벌써 다 썼네. 잘했어, 제스. 끊어지는 글씨들로 빼곡한 종이를 훑어 본, 별빛을 담은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소년은 키가 훌쩍 자라있었다. 마레 가를 떠나기 직전 누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그리젤다를 폭 껴안았던 소년의 머리는 그녀의 어깨에 못 미쳤으나 어느덧 어엿한 청년이 된 소년은 웬만한 장정보다 눈높이가 위에 있었고, 얼굴에도 쉽게 미소를 걸고는 했다. 세상에나. 제스. 그리젤다는 반가움에 그를 끌어안았었다. 그랬더니 손등에 다소 뻔뻔스레 키스를 했었던가. 이곳에 계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레 경. 다 자라버린 그는 그녀를 마레 경, 이라고 불렀다. 가끔은 선생님, 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그녀도 이따금 사탕을 운운하며 웃었다. 좋아. 칭찬해줄게. 대신 사탕은 딱 하나만입니다, 라누아 경. 그녀가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함께 춤을 추었을 때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오래 전의 달디 단 사탕을 떠올렸다.
―선생님, 잘 해냈으니 칭찬해 주십시오.
그러나 다음으로 떠오르는 기억에서는 어떠했던가. 아픔이 있었다. 일말의 죄책감도 있었다. 그리젤다는 벼랑 끝으로 몰려 떨어지는 안타까움에 제 입술을 꾹꾹 짓이겼던 통증을 선연하게 떠올렸다. 그는 얼굴의 반에 흰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저렇게 자주 웃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탕으로 달래놓지 않으면 저렇게 쉽게 웃지 않았던 것 같은데, 웃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잘했어. 라고 숨을 토하고는 꾹꾹 눌러두었던 맑은 눈물을 떨구자 울지 마세요, 라며 위로까지 한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친 것은 제 실수인걸요.
그리젤다는 분수대 옆에 앉아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가 폈다. 간만의 휴일이었다. 아직 별은 뜨지 않았으나 별빛을 닮은 머리카락이 고개를 숙인 그녀의 뺨 위로 몇 가닥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귀 뒤로 머리를 넘겼다. 그 새 가을이 깊어져 날이 선선했다. 거의 떠맡듯이 얻은 휴일은 이대로 혼자 보낼 생각이었다. 보통 이런 날에는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곤 했다. 역사서도 좋았고 이론서도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분수대에 나와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어디선가 주운 단풍을 맞대며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구경하고 싶은 기분이다. 휑하게 공기가 비워진 날씨 탓이라고나 할까.
문득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보았다. 마침 그녀에게도 익숙한 긴 검은 머리의 남자가 붉은 머리의 다른 남자와 함께 걷고 있었다. 자연히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양해를 구하고 다가왔다. 선생님. 그가 그녀의 위에 그늘을 드리우자 오늘은 데이트? 짓궂게 물음을 던졌다. 네에. 뭐. 그는 싱긋, 웃었다. 아. 선생님께 드릴 것이 있었는데 잘되었네요. 그리젤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게 뭐니? 그가 내밀기에 받아 든 투명한 유리병 안에는 알록달록한 사탕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동안,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것들입니다. 뒤로 빠끔히 보이는 까만 까마귀 깃털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그리젤다는 유리병을 손에 꼭 쥐었다. 제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떼었다.
어디 가? 어쩌다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왠지, 그렇게 묻고 싶었다. 채도가 달라져버린 금빛 눈한쌍이 크게 뜨였다가 장난스레 가늘어진다. 글쎄요. 비밀입니다. 그는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그 때도 지금도, 너는 숨기는 게 많구나. 그리젤다는 옅게 웃었다. 서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것이 바뀌었을지언정 무언가는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랬다. 또한 그녀는 제이드에게 있어 정말 드물게 몇 되지 않은 별 같은 기억을 상징했다. 늘.
“사탕, 고마워.”
사탕이 든 병은 차가웠다. 그래서 더 보듬어 안게 된다.
“주신 게 더 많아서 아마 직접 세 보시면 모자를 겁니다.”
“그건 나중에 청구해도 되는 거지? 라누아 경.”
물론이죠. 그는 웃었다. 따라 웃던 그리젤다가 운을 띄운다.
다녀와. 제스.
너무 멀리 가버리면 선생님이 걱정하니까, 편지는 꼭 하고.
제이드는 그녀의 말에 예, 하고 대답했다.
착한 학생이군요. 제이드 라누아.
그녀는 어린 날의 기억처럼 제 앞에 몸을 숙여 앉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을 뿜어내던 분수대가 조금 잦아들었다. 짧은 이별은, 곧이다.
'커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이드] Acta est Fabula (0) | 2018.01.28 |
---|---|
[제이드] 자각 (0) | 2018.01.28 |
[제이드] 비하인드 (0) | 2018.01.28 |
[제이드] 서로의 애칭을 불러봅시다 (0) | 2018.01.28 |
[제이드] In Tenebris Lux (0) | 2018.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