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스이브] 무제

조각로그 2016. 12. 28. 18:45

*

밤은 짧을 것이다. 예리하게 다듬은 금속의 끝처럼 차갑고 얇은 바람이 패인 미간을 찰나에 스쳤다. 때문에 에브닉은 눈을 떴다. 피로감에 절어 명도가 떨어진 호박색 시선이 검은 창살 틈을 지나 멀디 먼 창문 언저리에 가 닿았다. 은빛 별들이 먹색 하늘에 총총히도 박혀 있었다. 자연스럽게, 불어 온 바람은 저쯤에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몸을 조심히 움직이자 어지러이 흐트러져있었던 고운 붉은 머리카락들이 물길처럼 모여 따라 움직였다. 손을 얹은 아랫배와 허리 주변에 적잖은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 샌가 눈을 감기 전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으니 꽤 길게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에브닉은 침묵과 선율이 일치하는 숨결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심장은 곧 적당한 간격으로 박동한다.

 

지금은, 그 남자도 없었다.

 

남자가 없는 누적된 밤의 수는 제법 많다. 남자는 에브닉의 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이상하게도 태양이 사라지면 언질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렇기에 흰 달이 떠오른 밤은 에브닉에게 안식과 외로움을 동시에 주었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굳이 물어볼 만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브닉은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관계의 흐름은, 언제나 지나치게 일방적이었다. 그는 유일한 광원인 달빛을 받으며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만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에브닉, 하고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 다정하고, 상냥하지만, 진심은 단연코 담겨있지 않은, , 목소리. 에브닉은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 때, 준비되지 않은 숨을 급히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시선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검고 둥근 형태의 그것은 에브닉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다. 그는 그것의 존재 이유를 안다. 본상을 알고 있다.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뜻 무어라 반응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의문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짓눌렀다. 남아 있을 리가 없을 것이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어째서. 그 남자의 손에 들려 알지 못하는 어느어느 도처에선가 얄팍한 존재감이 영영 지워졌을 그것이.

 

망설이던 에브닉은 마침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간극을 좁히기에 역부족이었다. 창살에 맥없이 기대고 있었던 상체를 떼어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아픔에 세운 무릎을 손끝으로 깊게 긁었다. 허벅지 안쪽을 타고 불투명한 점액이 느릿하게 떨어져내린다. 조금은 간지러웠다. 덜컥 겁이 나 좀처럼 숙여지지 않는 고개를 숙여보니 온통 엉망인 꼴이었다. 그가 인간이었다면 새장 안의 온 바닥을 혈흔으로 울긋불긋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에브닉은 떨리는 손가락을 뿌연 흔적에 가져다대었다. 미처 굳지 못한 것이 엉겨 붙었다. 모두 저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목이 메어 침을 삼켰다.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신기하네요. 기억 속에서 불쑥 치민 남자의 들뜬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아냐. 보지 마. 절박하게 중얼거린 그가 검고 둥근 그것을 향해 더듬더듬 기어나갔다. 제발 보지 마. 그것에 닿는 것은 몹시 쉬웠다. 허탈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지저분하고 끈적한 표면을 얼른 손등으로 깨끗이 훔치고 그것을 품에 안았다. 그러자 분리되어 있던 그것은 곧 손으로 감싼 이것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품 안에 적당히 자리 잡은 은 별들이 드리운 먹색 밤하늘을 닮았다. 그 남자의 머리카락 빛깔을 연상케도 했다. 달빛에 비추자 불그스레한 기운이 감돈다.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딱딱하지 않았다. 만지면 금세 허물어질 것만 같이 부드럽다. 어린 것, 약한 것, 누군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으레 몸을 욱여 말고 숨어있을 수 있는 곳이다. 에브닉은 이것을 한동안 내려놓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에브닉은 보금자리 한켠에 그것을 감춰두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숨어들 수 있도록. 그렇게 이것은 다시 한 번 그것이 되었다.

 

 


*

밤은 턱없이 짧았으므로 솟은 태양은 금방 빛을 발했다.

 

정적이 깨졌다. 무겁고 느린 발소리가 가라앉은 공기를 덧없이 흩어놓았다. 새를 가둔 새장은 새의 주인이 들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지나간 밤하늘을 잔뜩 뒤집어 쓴 남자가 희고 보드랍고 두터운 천들을 뭉친, 그 앞에 섰다. 굳이 들이킬 까닭이 없는 숨을 마신다. 에브닉. 엉망이 된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는 눈을 감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스레 끈적이는 뺨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냈다. 주인을 잃은 붉은 핏덩이가 밀려 떨어진다. 새장 안으로 들어온 남자의 발자취 또한 그처럼 검붉다. 지나온 길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역한 비린내가 났다. 에브닉. 일어나세요. 여느 때보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남자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내버리듯 던졌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일갈했다. 천더미가 꿈틀거린다. 가늘고 흰 손가락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그것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숨어든 동안 따뜻하게 데워진 코끝이 움찔거렸다. 고개를 들어 진한 호박색 눈 한 쌍이 남자를 담는다. 제이드. 에브닉은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제이드. 언제 왔어. 나 많이 기다렸,

 

엎드리세요. 남자는 가치 없는 말을 쳐냈다. 에브닉은 주눅 든 어깨를 움츠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처 어떠한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남자가 짜증스레 팔을 움켜쥐고 제 쪽으로 억세게 당겼다. 머리가 강제로 눌려 파묻히기 직전, 남자의 팔에 본 적 없었던 커다란 상처가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사냥을 한다. 그것이 언질도 없이 밤마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진짜 이유였다. 까마귀의 깃을 머리에 단 그 남자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동시에, 증오하고 있었다. 에브닉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나면 모든 것을 모른 체 해도 되었다. 심지어 자신마저도.

 

섹스는 힘겨웠지만 달았다. 남자가 그렇게 저를 다뤄서인지, 제가 본성부터 음욕을 탐하는 악이라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자를 받아내고 나면 배가 몹시 불렀다. 다만 공포감과 쾌감이 한꺼번에 작용하는 감정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생경한 것이었다. 에브닉은 남자에게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아흐으, , - 잘못, 잘못했, , 제이드, 아응, , 그만. 젖은 살끼리 일정한 간격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제발. 굳은살이 박힌 거친 손가락이 상체를 멋대로 더듬으며 예민한 곳을 연신 지분거리고 비틀어댔다. 그만, , 으응, , , 그만할래- 무서워, . 손끝으로 무용한 천 조각 신세가 된 제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몇 번이고 짓이겨진 입술은 빨갛게 달아올라 불어 터질 듯 했고 달큰한 향이 나는 살결 위로 도드라진 쇄골 밑으로는 온통 순흔이 낙인마냥 무수히 찍혀 있었다. 싫어. 그만. 한계에 다다른 순간, 에브닉은 헐떡이며 다급히 앞으로 기어나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여전히 피로 얼룩져있는 커다란 손이 검은 깃털을 새긴 발목을 우악스레 붙잡았다. 새된 비명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되풀이되는 악몽이었다.

 

 


*

제이드 라누아는 발밑에서 제 것을 흠뻑 뒤집어쓰고 죽은 듯이 늘어져 가늘게 호흡하는 붉은 머리채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루비빛은 손가락들 틈으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바보 같으시긴. 가엾게도. 측은하게 바라보는 시선과는 달리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초점을 잃은 호박색 눈동자가 거울이 되어 의미 없이 상을 비춘다. 제이드는 그 눈동자를 사랑했다.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도 사랑했다. 옅게 단내가 나는 우유색 살결도 사랑했고, 흐느끼는 목소리도 사랑했으며, 손을 모아 절박하게 비는 손목 또한, 으스러뜨리고 싶을 만큼 사랑했다.

 

그건 욕심이지. 네 음습하고 질척이는 소유욕이라고, 하나 뿐인 친우가 말한 적이 있다. 뭐가 다르지요. 그는 순수한 의문이 들어 물었다. 안고 싶고, 바라보고 싶고, 오직 제 손 안에서만 얌전히 있기를 바라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닌가요. 친우는 어리석긴,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만약 그게 없으면 죽을 것 같아? 친우의 물음에 그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왜 죽어야 합니까. 제 것을 없애버린 것을 찾아 죽여야 하는데. 그의 대답에 친우는 비웃듯이 술잔을 들어올렸다. 멍청한 제이드. 이제 보니 네 날개가 검게 타버린 것이 너무 늦은 일이 아니었던가 싶구나. 그 조차 나의 기억으로는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말이야.

 

제이드는 새장 한켠에 뒤엉킨 두터운 천더미들로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권태롭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절대적인 신성을 자진하여 짓밟은 구둣발이다. 의지라고는 없이 엎드러져있던 에브닉이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제이드. 그는 그 애처로운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나 가볍게 무시하고 엉성한 보금자리를 헤집었다. 제이드. 자신을 무력하게 하는 탈력감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 마. 이리 와. 그의 손이 무언가를 기어코 찾아 들었다. , 나 아직 괜찮아. 더 하자. ? 검고 둥근, 그것. 나 또 배고파. 우리 또 하자. ? 그러니까

 

제발.

 

눈이 마주친 까마귀는 웃고 있었다. 그는 타락한 천사였다. 신을 증오하고, 제 것을 마음껏 탐하고 소유하는. 에브닉은 일전에 그가 그처럼 아름답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을린 손으로, 알을, 단 한 번의 외력으로 힘주어 부수었다. 으적, 하는 흉한 소리가 났다. 알이 처참하게 깨지는 소리였다. 안에 들어있던 따뜻한 액체가 느릿하게 흘러나와 바닥에 뭉쳐 떨어졌다. 시간도 그렇게 뭉쳐 뚝 뚝, 떨어졌다.

 

그는 다시 그가 사랑하는 작은 악마에게로 돌아와 그를 조심스레 보듬어 안고, 이마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대로 당신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당신을 내가 감히 모르고 지내왔던 시간을 더해서. 그러니, 앞으로도 부디 저만 바라보며 제 손 안에만 머물러 주세요. 달래는 손길에 묻은 얼룩진 피가 둥근 눈물이 굴러 떨어지는 뺨에 붉은 칠을 남겼다


에브닉은 이내 온기가 깃든 넓은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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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llill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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