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로그

[이환] 조우遭遇.

IllillIll 2018. 1. 28. 20:39

171231 조우遭遇. (with. 무현)


 

 

   동궁 근처 맑은 연못에는 무량에서 기른 잉어가 퍽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잉어는 다 자라봐야 몸통이 어른의 손바닥 크기만 하였는데, 꼬리는 그보다 족히 두 배는 길게 자랐다. 헤엄을 칠 때마다 치마폭처럼 살랑거리는 그 꼬리가 몹시 아름다워 연못 위로 세워진 누각을 거쳐 간 객들이 한 번씩은 감탄하는 모양이다. 대부분은 적색과 금색이었으며, 간혹 백색이나 흑색, 얼룩이 곱게 진 녀석도 보였다. 그곳을 옆으로 지나야 본당이었다.

 

   무현은 튼튼하게 잘 짜인 교각을 지나던 중 잠시 멈추어 그 아래를 보았다. 아무리 궁이라지만 흙이 제법 올라올 만도 하건만, 깊은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었다. 덕분에 물을 노니는 것들이 물의 흐름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멀리서 수면이 찰박였다. 가끔은 저리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한적했다.

 

   마침 쉬러 나온 어린 아랑들도 근처에 모인 잉어를 구경하며 무어라 속삭였다. 그것을 건너에서 본 무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저들끼리 내기라도 한 것인지 무엇인가 한아름 떠맡은 한 아랑의 고개가 곤란한 듯 숙여지고, 나머지 두 아랑이 누가 부를세라 까르르 웃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종종걸음을해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은 아랑은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무현은 아랑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랑은 그의 큰 키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무현이 신관복을 입고 있음을 눈치 챘는지 얼른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작은 품에는 모래알 같은 것이 가득 담긴 도기가 들려있었다. 그게 무엇인가요? 아랑은 무현에게 그것을 내밀어보였다. 무현이 워낙 큰 탓에 아랑의 팔이 수평이 아닌 위로 들렸다. 잉어에게 줄 먹이입니다. 그는 아랑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기꺼이 낮추었다. 팔이 내리고,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다정한 신관님이었다.

 

   “그렇군요. 어여쁜 잉어들이 기다리겠어요. .”

 

   아이는 대개 잉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좋아한다. 무현은 제가 혹 방해를 한 것인가 싶어 웃으며 재촉했다. 그것이, 아랑의 눈이 굴렀다. 저는 물을 가까이하는 것이 무섭습니다. 다른 아랑들이 그것을 알고 짓궂게 군 것입니다. 이번에는 무현의 눈이 크게 뜨인다. 저런. 그런 줄도 모르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떼었다.

 

   “천백에서 금방 내려와 마침 궁에 사는 잉어들을 꽤 오랜만에 보는데, 괜찮다면 대신해도 될까요?”

 

   예에. 아랑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현의 손에 작은 손이 닿는다. 따뜻한 온기가 서린 도기가 옮겨갔다. 낮추었던 몸을 펴고 물가로 다가갔다. 물가가 무섭다던 아랑은, 과연 교각의 난간을 손끝이 희게 될 정도로 꼭 붙잡고 무현을 보았다. 이러면 빠지지 않겠지요, 신관님. 아랑에게 걱정 말라는 듯 웃어 보인 무현이 잉어의 먹이를 조금 쥐고 연못 위로 뿌렸다. 비가 내리는 것보다 무겁게 진동하는 수면이 근처를 맴돌던 잉어들을 불러들였다. 파다닥. 수면이 튀었다. 그래도 궁에서 사는지라 제법 풍족하게 사는 것들이어서인지, 금세 배가 부른 잉어들은 미련을 갖지 않고 저마다 무리를 지어 흩어졌다.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아랑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물은 무서울지언정 잉어가 만들어내는 색색의 잔물결이 어여삐 보이는 것일까.

 

   “내가 잉어의 먹이를 주었다는 것을 다른 아랑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신관도 나름대로 체통을 지켜야 하거든요. 어흠. 짐짓 진중한 척을 하느라 헛기침까지 해보이는 무현의 장난스러운 넉살에 아랑이 고개를 푹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반드시 비밀로 해드릴게요. 걱정마세요. 그 뒤로 몇 번인가 더 그의 손짓에 의해 수면에 파가 일었다. 손짓 한 번에 금빛 물결이, 손짓 한 번에 붉은 물결이위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여명이 반짝거리며 부서졌다. 눈이 부실만큼.

 

   “감사합니다.”

   “덕분에요. 돌아와서 잉어에게 첫 인사를 할 수 있었어요.”

 

   빈 도기를 건네받은 아랑이 생긋 웃으며 무현에게 인사를 했다. 아랑은 소중한 것을 안아든 것처럼 도기를 끌어안고 저와 같은 아랑들이 들어간 문으로 재게 걸었다. 감사합니다. 부족했는지 또 인사를 한다. 무현은 손을 흔들었고, 아랑은 마침내 문 안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은 그가 머리를 긁적인다. 손에 잉어 먹이의 구수한 냄새가 밴 듯 했다. 아랑이 아무나 붙잡고 말을 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의 곁에 선다면 누구나 알 법 했다.

 

   “이거, 도착하자마자 당주님께 인사를 올리려 했는데 늦어졌구나.”

 

   하지만 그는 그런 일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모든 생명이 그러했으나 특히 어린 것을 따스하게 지켜보고, 돌보아주는 것이 좋았다. 그러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평안해졌다. 굳이 그것을 스스로 나쁘다 할 의향은 없었으니 대신 옷매무새나 조금 다듬고 말았다. 그는 본당 안으로 들기 전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내쉬었다. 조금 전의 아랑을 따라 들면 되는 것이었다. 본당의 구조와 당주가 머무는 곳을 대강 떠올렸다. 다시 뵙게 되면 먼저 무어라 인사를 올려야 할까. 오랜만이어서인지, 별 것도 아닌 것에 긴장이 되려고 하여 부러 더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떨어지는 보폭이 어색하다. 그런데,

 

   “허면 아직 늦지 않은 듯 한데.”

 

   뒤를 도니 당주가 있었다.

 

 

 

 

* * *

 

 

 

 

 

   “다리가 완전히 부러진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무현은 삐빗, 애처롭게 우는 새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네 상처를 자세히 살피느라 손속이 좋지 못했다. 새는 흡사 그렇다는 것을 안다는 양 그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는 저를 이곳까지 불러 온 이를 돌아보았다. 무현의 것보다 어두운 빛을 띠는 붉은 머리카락이 그늘에 잠식되어 더욱 짙었다. 다만 느릿하게 그를 향하는 시선은 마찬가지로 밝았다. 어느 곳에 앉아, 음지에서 양지를 보고 있는가, 양지에서 음지를 보고 있는가는 확연히 달랐으나그러니 어딘가에서 조금 쉬면 나아질 겁니다. 당주는 무현이 새의 상태를 고할 적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한참동안 서산에 뿌리를 내린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건 다행이네.”

 

   어디 보자. 무현은 새를 조금 더 살피다 천을 다리에 감아주었다.

 

   “너는 늘 누군가를 돌보는 것에 익숙한 것 같구나.”

   “, 그저 그런 것을 지나치지 못할 뿐입니다.”

   “허어.”

 

   이환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상냥하고 다정한 게지.”

 

   그리고는 무현을 보며 웃었다.

 

   “것보다 나는 소질이 없어서 말이야. 돌아가신 누님께서 새를 돌보는 것 또한 아시라의 일족이 마땅히 베풀어야 할 덕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잘 되지 않는다.”

   “그렇습니까.”

 

   의미를 알지 못할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흩어내고 싶었으나 무어라 운을 떼야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굴리다 괜히 새의 깃털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새는 또 한 번 삐빗, 하고 울더니 퍼드득 작은 날갯짓을 하여 이환의 손에 앉았다. 당주가 돌보는 새이던가. 하지만 무현이 알기로, 당주 이환은 새를 기르거나 돌보는 일에는 잘 관여하지 않는다. 현대의 아시라의 일족이라면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과연, 새가 손에 앉으면 무어라 반응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환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것 외에 별다른 감흥이 없어보였다. 결국 새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리다 다시 무현에게로 돌아가 그의 어깨 위로 내렸다. 이어지는 높은 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웠다. 삐빗, .

 

   “다친 새는 어디서 발견하신 것입니까?”

   “이보다 큰 새가 이 새를 구박하는 것을 보고 아랑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더구나.”

 

   나를 잡고 사정하기에 데려왔지. 마침 적임자인 네가 근처에 있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밝았다. 어차피 내게 인사를 할 생각이 아니었느냐. 좋은 게 겸사겸사지. 무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하는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무현은 얼떨결에 그렇지요,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

 

   그는 당주가 제게 던지는 무엇인가를 받아냈다. 그것을 싼 종이를 걷어보니 옥수수로 만든 엿이었다. . 맛깔스러운 황적색이었다. 그나저나 엿이라니. 잠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불경하다 여겨 고개를 붕붕 저었다. 무현의 표정을 본 이환이 크게 웃었다. 이것 보게. 영 순진한 자이지 않은가. 적어도 당주로서 제가 아는 무현은 그랬다. 언제나.

 

   “너를 놀리는 것은 아니고, 답례를 할 것이 당장은 이 뿐이니까.”

   “, 제가 한 것은 딱히

   “내가 한 것이라 생각 말고 네 어깨 위에 앉은 그 녀석이 한 것이라 여기거라.”

 

   삐빗. 새가 저를 긍정이라도 하듯 지저귄다. 새가 문질러대는 목이 따뜻했다.

 

   “영리하네. 회복이 되면 알아서 하늘로 돌아가겠지.”

 

   이환이 그늘이 깊숙하게 밀려들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현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금빛 햇살이 무현의 옆얼굴을 덮는 것을 보았다. 곧 찾아올 어둠이 깃들 줄을 모를 만큼, 지기 전의 가장 밝은 여명이었다. 당주의 입매가 올라갔다. 당주는, 무현의 어깨로 손을 뻗어 새의 머리를 굳은살이 박인 손끝으로 만져주었다.

 

   “, 당주님.”

   “.”

 

   “오랜만에 뵙습니다.”

 

   상대가 곧장 새를 드미는 통에 미처 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래. 오기까지 고생이 많았어. 나중에 차라도 같이 들자꾸나.”

 

   이환은 떠나기 전, 뒤를 돌았다.

 

   “고마워.”

 

   무현은 목례를 했다.

   새가 삣, 하고 마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