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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당주, 일상.

IllillIll 2018. 1. 28. 20:36

171224 당주, 일상.



   하늘이 개어 해가 높이 떴다. 새가 날갯짓을 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노란 햇살이 이런저런 색을 입힌 유리병에 반사된다. 나뭇가지에 꼭 여럿씩, 조롱박처럼 매달린 그것은 새들을 위한 것으로 먹이나 물을 담아 걸어놓고는 했다. 새를 돌보는 일은 천조신을 모시는 아시라의 일족들이 미덕으로 생각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날개가 부러진 새, 어미를 잃고 둥지에 홀로 남겨진 어린 새, 배가 고파 고개를 끄덕이는 새를 못 본 척 지나치지 않았다.

 

   “도와드릴까요? 당주님.”

 

   올해로 열다섯을 넘긴 아랑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제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일각이 다 되어가도록 손을 꼬무락대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영 불경한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장 저것을 잡아채서 실수를 가장하여 떨어뜨리고 다른 유리병을 가져다준다든가.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짐짓 미간을 좁혀가면서까지 구멍에 실을 꿰고자 하였다. 애초에 그 구멍이란 게 워낙 작았다. 눈이 발바닥에 달리지 않은 이상 누구나 저 문제의 유리병을 보자마자 가치가 불량하다는 것을 인정하리라 단언할 수 있었다. 바늘귀에 범을 통과시키는 것이 최소한 같거나 심지어는 더 빠를 것이라 짐작했다. 아랑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남자의 근처에 놓인 다른 유리병들을 흘끗 보았다. 하필이면 골라도 저런 것을 골랐다.

 

   “당주님.”

 

   재차 그를 불렀다.

 

   “문흥 어르신의 말씀은 생각해보셨습니까?”

 

   당연히 그리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일단 예의를 차려 물었다. 내일 해가 서산에서 뜨는 것이 더 가능성 있는 일이다. 석류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실바람에 흔들렸다. 뒤늦게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간만에 햇살이 강한 날이라 홍채는 옅고, 동공은 더 진한 호박색의 눈동자가 제 앞에 선 아랑을 올려다보느라 잠시 삼백을 만들었다가 그놈의 망할 유리병에 시선을 다시 고정했다. 대체 누가 납품한 것인지 따지고 말 것이다.

 

   “‘서책을 앞에 두고 졸지 마라.’”

   “그건 어르신께서 늘 당주님께 올리는 말씀이 아닙니까. 제 말은,”

   “지난 관악제를 기억하느냐?”

 

   아랑은 저도 모르게 예에? 하고 답했다.

 

   “나보고 그리 말씀하셔놓고는 정작 본인은 내내 하품이나 하다가 눈에 그린 것이 전부 번져버리지 않았어. 그 땐 그것이 무엇을 닮았는지 몰랐는데, 이제 그 정금 같은 말씀을 떠올리다보니 알 것 같네. 꼭 저것을 닮았다.”

 

   남자는 아무런 적의가 없는 표정으로 벽화 한켠에 그려진 웅묘를 가리켰다. 그 불쌍한 웅묘는 너절한 우리 안에 갇혀 궁으로 가는 진상 행렬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랑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나 더는 좌시하지 못하고 침착하게 그의 손이 쥐고 있었던 자색 유리병을 앗아왔다. 이건 주셔요. 평소엔 관심도 없으시더니. 유리병에 담겨있던 건조된 새 모이가 맑은 소리를 냈다. 그것 말고, 바로 어제 당주님께 어르신이 직접 드린 말씀 말입니다. 아랑은 본당에 들어온 지 다섯 해였다. 곧 여섯 해가 되어간다. 이 정도 경력의 아랑에게 당혹스러운 상황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나 이런 종류는. 분명 알면서도 저러는 게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그 이상의 군말 없이 구겼던 몸을 일으키며 허전해진 손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손끝마다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아랑의 시선이 따라 올라갔다. 남자는 꽤나 장신이다.

 

   “왕께서 발라를 궁 안에 들인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얼른 전언을 주시어요. 이제 문흥 어르신이 아랑들마저 혼을 내려 하십니다.”

 

   남자는 그 말을 듣고 대번에 질린 얼굴을 했다.

 

   “저희도 궁인들과 합심하여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어- 혹시 무엇을 하면 됩니까? 높으신 객을 맞아본 적은 있으나 발라를 맞이한 적은 없는지라. 아랑은 그리 말미를 흐리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당주, 이환은 잠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먼 자리를 보며 홀로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가볍게 웃었다. 언뜻 비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괜찮아.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따스하고 단단한 손이 아랑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 온기는 불에서 태어난 천조신의 일족이기에 그리한 것일까. 아랑에게는 시덥잖은 궁금증이 생겼다. 호박색 눈이 가늘게 호를 그린다. 아랑은 멀어지는 그를 따를 생각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작은 머리가 뒤늦게 꼬박 숙여진다. 그럼에도 어찌 알았는지 돌아보지 않는 이환의 손이 흔들렸다. 긴 소매가 춤추는 것이 마치 새의 날갯짓이었다.

 

 

 

* * *

 

 

 

 

   “.”

 

   본당과 동궁 연화전을 잇는 교각에 떨어진 낙엽들을 신발코로 밞으며 걷던 이환은 짐짓 반가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막 입구로 나온 남자에게 경아, 라며 살갑게 아는 체를 했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대번에 인상을 그었다. 대체 당주께서는 호위인 저를 두고 어딜 그렇게 함부로 쏘다니다 오시는지요. 당장 날카롭게 추궁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도리가 없었다. 대신 저의 손목을 대뜸 붙잡고 있는 손을 단호히 떼어 냈다. 뒤이어 작은 한숨이 일었다.

 

   “어서 드시지요, 당주. 안에서 문흥 어르신이 기다리십니다.”

   “뭐어?”

 

   어째서. 이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 분명 엊그제만 해도 어르신께 먼 온천이나 한 번 다녀오시며 섭생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 권하였는데. 경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태연히 답했다.

 

   “그야 당주가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서신으로나마 진작 답을 했더라면 그 분도 직접 걸음을 하시진 않으셨을 겁니다. 말씀처럼 온천으로 향하셨겠지요. 아무리 이런 시기라지만. 이환을 본당 내부로 안내하며 지나가듯이 덧붙였다. 인간의 시간에 비하면 지나치리만큼 오래된 목조 건물은 언제나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이환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그동안 바빴어. 경아, 너도 알지만 내가-”

   “당주님 드십니다.”

 

   객실 앞에 선 경은 이환의 말을 건조하게 자르고 고했다.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안에 있던 아랑이 문을 열어주었다. 굳은 얼굴의 노인이 이환을 향해 목례를 하였다. 이환은 답하지 않고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어 노인이 자리를 권했으나 역시 앉지 않았다. 주름진 얄팍한 입술로 굳게 닫혀있던 노인의 입이 결국 열렸다. 성대가 잘 붙지 않아 질이 나쁜 목소리였다.

 

   “공식 서신이 여섯 통이나 갔을 겁니다.”

 

   당주는 여태 그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굳이 그러한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으나 노인의 미간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좁아졌다. 으음. 중간을 채우는 침음에 걸쳐두었던 세필을 위한 붓이 굴러 떨어졌다. 채 마르지 않은 먹물이 튀어 흰 종이에 점을 두어 개 더했다. 이환은 미동조차 없는 시선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마디진 손이 의자의 등 위을 느릿하게 잡았다. 섬세하게 조각된 양각 장식이 차가웠다. 그리로 막 젊은 당주의 시선이 향할 기색이자 노인, 문흥은 제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왜 여태 아무런 대책을 내놓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 …….”

   “이 정도의 일도 소홀히 하신다면, 당주. 이것은 화로의 불을 뒤적이거나 글을 읽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미봉책이라도이것은,”

   “그것 참.”

 

   이환이 웃었다.

 

   “누가 들으면 날로 먹고 있는 줄 알겠습니다.”

 

   어깨가 으쓱인다.

 

   “여태 도와주신 것도 없으면서 그리 말씀하시면 섭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 그리고,

 

   “제가 근래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파악이 전혀 안되셨다니, 이거 어르신들도 한 물 가신 것 아닙니까. 아쉽네요. 제가 생도를 끝낸 지 고작 500년 밖에 더 되었습니까.”

   “……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환은 다시 웃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각 신당으로 서신이 도착했을 것입니다.”

 

   다 같이 모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또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요.”

 

   이후 일삽시의 침묵. 잠시 굳어있던 노인이 무어라 대답하려 급히 입을 열었으나 당주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객실을 성큼 벗어났다. 지난 몇 백 년 간 그래왔던 것처럼 의무적으로 그를 따르려던 경이 몸을 돌려 문흥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였다. 객실에 홀로 남게 된 노인은 뒤늦게야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털썩. 방석이 깔린 고급스러운 의자 위로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기묘한 창살 문양을 따라 서책들이 놓인 나무 책상에 해가 그늘을 만들어냈다.

 

   엄연히 말해 당주는 무능한 자는 아니었다. 매일 탄원을 하긴 하지만 글 몇 자 틀리는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이냐. 머리가 좋아 일부러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 누가 보아도 뻔했다. 그를 향한 아시라의 가호는 유달리 견고했다. 누이의 일이 있었음에도 일족에 대한 나름의 애착 또한 보였다. 그러나 제멋대로였다. 지극히 제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망아지마냥 날뛰는 것이 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었다. 아시라의 불이, 계시가, 최후에 그를 택하지만 않았어도. 당주는커녕

 

   그래. 그리 길게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인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 * *

 

 

 

 

   “경아.”

 

   당주의 부름에 차분히 가라앉은 검은 눈 한 쌍이 들렸다. 당주를 따르는 남자는 아시라의 일족에 속해있으면서도 본질이 달라 붉은 옷을 걸치고 있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이환은 꾸밈없이 씩 웃으며 말했다. 간만에 궁 밖으로 외출하지 않을래. 물감 몇 개가 모자라서. 그 말에 알겠습니다, 하는 단정한 답이 돌아왔다. 좋아. 알겠지만, 너도 가끔은 다른 공기를 마셔야 한다고. 조가(弔 歌)의 가락을 다소 경박하게 몇 소절 흥얼거리던 머리 붉은 이가 앞서 걸었다.

 

   “너는 내가 무엇을 하든 잘 된 것이냐 묻지를 않네.”

   “여쭐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시는 곳이 어디든 그 곁을 지켜야 하기에. 짤막하지만 깊은 대답에 이환이 오히려 머쓱한 얼굴을 했다. 그거 대단한데. 몇 걸음을 걷는 동안 짐작키 힘든 생각에 잠겨있던 경이 멈추며 물었다.

 

   “하여, 잘 될 것이라 보십니까.”

 

   웃음을 터뜨린 이환은 흔쾌히 답했다.

 

   “괜찮아. 나쁘지 않은 걸.”

 

   무엇이든 괜찮다 이르는 긍정은, 사실상 말버릇이었다. , 그러고 보니 청색 물감도 좋겠지만 적색 물감이 더 좋을 것 같구나. 적색을 더 사야겠다. 그렇지. 볼품없는 회갈색 가지에는 화려한 붉은 꽃이 피는 것이 어울릴 것 같지 않느냐. 술은 황색이 좋겠고. 혼잣말인지, 누군가 듣고 맞장구라도 쳐 달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말하며 갈색으로 말라붙은 덩굴이 담벼락을 따라 길게 움켜 쥔 옆을 지난다. 어렴풋이 찬 공기의 냄새가 났다. 경은 또 한 번 서서히 그의 뒤를 좇는다. 그림 탓에 내실에 틀어박혀 계시면 어르신들께서 다시 찾아오실 겁니다. 이환이 움찔거리며 황급히 뒤를 돌았다. 그건 싫은데. 경은 넌지시 말했다. 그러니 적당히 하시지요. 그 분들이 단지 당주께서 그림 그리는 취미가 있다는 이유로 언짢아하시는 게 아니라는 건 익히 아시지 않습니까. 평범한 이야기가 오가는 소리는 문을 한 번 넘자 이내 목소리와 함께 잦아들었다.

 

 

   해가 퀭한 한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