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쉬하이드] 행방
170116 행방
“날 믿어요.”
할 수 있어요. 세레나는 그의 손을 다부지게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연갈색 눈 한 쌍에 이채가 돌았다. 반면에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자신 없는 시선이 비스듬하게 낙하한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오른발을 굴렀다. 충분히 괜찮다니까요! 가브리엘, 난 당신이 조금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의 날씨는 쌀쌀하지만 매우 좋고, 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당신은 유달리 멋지고, 당신의 음악은 그것보다 아주 조금 더 멋져요. 알았죠? 아무 문제없어요. 모든 것이 완벽해요. 연신 당부한 붉은 입술이 그의 이마에 도장을 꾹 찍었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유쾌하게 웃어 보인 그녀는 사랑스러운 까치발을 내리고 그가 들고 있던 악보들을 재차 품에 팍, 소리 나게 안겼다.
“아, 아, 아무래도, 도, 돌아가는 게.”
“게이브,”
게이브. 그녀가 종종 부르는 그의 애칭이었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에 흔히 따라붙는,
“괜찮아요.”
그런 무난한 애칭愛稱.
“… 설마 이제 와서 돌아가진 않을 거죠? 잊었을까봐 말하지만― 두 시간 후엔 이 근처 식당에서 우리 둘 만의 환상적인 식사가 예정되어 있거든요. 그렇죠?”
그녀는 한쪽 눈썹을 느릿하게 추켜올렸다. 어쩔 줄 모르며 얼굴 가득 연신 난색을 표하던 그가 천천히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했다. 사랑해요. 그녀는 소리 없이 문장을 언급한다. 하지만 몹시 뚜렷하게 들려서, 그는 얼굴을 슬쩍 붉히며 뒷머리를 긁었다. 마디진 손가락은 그의 머리카락에 잠시 파묻혔다가 이윽고 진갈색 코트 주머니에 황급히 모습을 감춘다. 낡은 검은 부츠를 신은 발이 잰걸음으로 간밤에 온 비로 젖은 길을 건너 계단을 디뎠다. 또 한참을 머뭇거리고 나서야 가브리엘은 곤히 잠자는 갓난아이의 방문을 앞에 둔 사람처럼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무려 세 번의 시도 끝에, 갓난아이에 비하면 이미 심각하게 늦은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하인이 시큰둥하게 그를 맞았다.
“뭡니까.”
“주, 주인어른에게, 볼일이, 이―있어서, 야, 약속을, 말씀을, 드렸,”
아. 연락주신 그 양반이군. 하인은 그의 말을 생선 토막 내듯 자비 없이 자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들어오시오. 바로 안내를 해 드릴 테니. 말문이 막힌 그는 이제라도 구조 요청을 해야 할까 싶어 고개를 돌려 길 건너에 서 있는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행운을 빌어주는 그녀의 풍성하게 굴곡진 붉은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이끼색 눈동자가 그것을 담았다. 마치 흰 구름을 비추는 깊은 숲의 작은 샘처럼, 그렇게 비추었으니.
“주인님은 바쁜 분이시니 무슨 용건이든 얼른 끝장을 보고 오는 게 좋을 거요.”
하인의 퉁명스러운 조언에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동자가 아래위로 황망하게 방황하였다. 그 바람에 새어나온 악보의 낱장이 목조 바닥을 스쳐 떨어진다. 직접 공들여 그린 악보에 발자국이 찍혔다. 늙고 집요한 하인의 것은 아니다. 이거 댁에게 중요한 거 아니오. 나 참. 그는 하인이 불친절하게 건넨 종이를 떠안았다. 대충 수습한 종이뭉치를 고쳐 안은 그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재차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직 그곳에 서 있었다. 아마도 그가 대화를 다 마치고 나올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먼 공장의 굴뚝에서 잿빛 연기가 흐린 하늘에 녹아들었다. 그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하루에 열댓은 되는 객 중 하나를 들여보낸 하인이 문을 닫았다.
* * *
“어떻게 됐어요?”
다시 문이 열렸을 무렵, 세레나는 참지 못하고 길을 건너와 그의 앞에 섰다. 그는 그녀를 마주하고 말없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의 손에 악보가 그대로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어깨가 들릴 만큼 숨을 잔뜩 들이킨 그녀가 둥근 숨을 한꺼번에 뱉어내고는,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분이네요! 하고 입 안에서 모래처럼 바스러진 말들을 얼기설기 이어 붙였다. 미처 가브리엘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세레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공통점 없이 짝지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여러 번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잠시나마 전경을 마다하고, 런던 거리의 배경이 되어 걸었다. 당신이 얼마나 공들여 쓴 작품인데, 어떻게 그, 딱 한 번을 몰라 줘. 그는 투덜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리 공들여 쓴 작품이라 할진들 그것이 당연하게 좋은, 이라거나 혹은 잘, 이라는 수식어가 제멋대로 붙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가 쓴 리트Lied들은 그녀가 생각하기에, 어느 관점에서 보건 정말로 좋은 작품들이었다! 몇 달 전, 시인들의 시를 빌려다 그저 취미로 쓴다는 악보들을 받아 읽었을 때 그녀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작고한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유명한 음악가였으므로 그녀가 정식으로 음악의 길을 걷지 아니했다고 하여 관련 지식이 없지는 않았다. 그에게 이것들을 시인들에게 허락을 구해 정식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몹시 당황한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녀는 기나긴 설득을 한 끝에 이 수줍음 많은 연인을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역시 본고장으로 가야할까요. 그녀는 턱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독일은 영국보다 안전하다고 들었어요. 길게 처진 눈매가 들렸다가 도로 내려앉는다. 동시에 영원할 것만 같던 걸음이 멎는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로서는 잔뜩 속이 상한 모양이다. 그녀의 속눈썹이 얼마나 길고 풍성한지 볼 수 있는 간극의 끝에서 그는 먼저 운을 뗐다. 세레나. 연인의 이름은 언제고 완성되어져 있었다. 흠없이 아름답게. 그 자체로.
“얼른 마, 맛있는 거 머, 머, 먹으러 가요.”
굳게 닫혀있던 그녀의 산호색 입술에 틈이 생겼다. 저녁. 짧게 단어를 언급하며 장난스레 스프를 뜨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그제야 그녀가 푸스스 웃어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녀리고 따뜻한 팔이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게이브, 고마워요. 사실은 필요 이상으로 억지로 끌고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감사인사다. 눈을 내리깐 그녀에게선 재스민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가브리엘은 잠시 끌어안겨있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좋아해요. 당신을 좋아해요, 가브리엘. 좋아한다는 것은 뭘까요. 당신은 그 답을 알고 있나요. 좋아한다는 것은―
“오, 오늘 밤, 당신과, 내, 내가 함께, 거- 걷고 시, 싶은 것.”
오늘 밤, 달빛 아래에서, 숲을 거니는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걷는 것.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죠.
그는 그렇게 고백했다.
* * *
웬 꽃이에요. 예뻐라. 선물인가요. 그녀가 웃었다.
그는 웃었다. 나는 당신이 그 흰 장미 앞에서 가장 오래토록 떠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해요.
* * *
창백한 달빛을 받은 그녀의 으깨진 얼굴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저를 들여다보는 심연이 그곳에 있다.
아마 그녀는 과거에 붉은 머리를 자랑처럼 여겼을 것이다. 한때는 현명한 연갈색 눈을 가졌었으며, 침대 위로 누운 나체에서는 향기로운 재스민을 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극독과 같이 혈관을 타고 퍼지는 역겨운 비린내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짐승을 모질게 끌어다 처분하는 후미진 외곽의 뒷골목에서나 맡을 수 있는 냄새. 그러하다. 타닥, 타닥, 종이가 마른 나뭇가지와 함께 타들어갔다. 심장이 뛰는 소리는 이미 잦아들었다. 불씨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였다. 오래지않아 그마저 잿더미 아래로 영영 묻혔다. 빛을 머금은 달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 정적. 그 자체다.
그는 무음을 가장 완벽한 상태라고 여겼다. 그에게 소리란, 일종의 시끄러운 균열이었으며 불필요하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불균형이었다. 이쉬하이드. 늑대의 강인한 발이 눈밭이나 웅덩이, 혹은 모래나 자갈을 밟을 때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남겨진 족적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네 발보다 두 발은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그를 불안케 한다. 온전할 수 없었다.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음악가이자 인간이 아닌 것을 혐오하는 자였다. 정체모를 두려움에 휩싸여 철저한 사냥을 부르짖었다. 현명한 그녀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다. 동시에 아버지를 위협한 것들을 증오했다.
그는 그것을 노리고 거리를 좁혔다.
결국 그는 그녀를 죽였다. 왜냐하면, 세레나. 가브리엘. 세레나와 게이브. 그녀는 진심이었고, 그는 늘 그랬듯이 처음부터 거짓으로 시작해 거짓과, 거짓과, 거짓과, 거짓과―
―그리고 최종장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아주 약간의 권태감. 일정이 예상보다 길어지면 누구나 그렇듯이.
가엾은 그녀가 사랑한 가브리엘, 이라는 이름도 사실은 어디서 훔쳐다 쓴 것이었다. 과거의 저편에서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이름을 대충 풀을 발라 붙였다. 엉성했지만, 충분했다. 으스러진 그녀의 턱과 늘어진 검푸른 혀가 건조하게 그것을 넌지시 말해주었다.
짙은 이끼색 초점이 흐려져 침잠한다. 몸을 일으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새벽, 그곳을 더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처음부터 거창한 서사로 운을 뗄 필요는 없다. 이제는 어디서나 흔한 이야기가 되었으니 이처럼 아무데서건 이야기를 시작해도 무방하겠다. 어린 형제를 잃었다. 어리석은 늑대는 뒤늦게 사냥꾼을 쫓았고, 실패했다. 아델. 아델. 잊지 않기 위해 허공을 향해 소리를 내었다. 도려진 정적의 파편은 팔락거리며 맴을 돌다 발등을 아프게 찔렀다. 아델. 아델의 이름을 딴 별은 이제 북방에서만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먼 북방의 숲에서 지내는 배다른 누이가 말하기를 저더러 미친 것이라 하였다. 기어이 눈이 멀어버렸다 한다. 그는 햇빛보다 눈부신 달빛을 여전히 볼 수 있었건만 무엇이 눈이 멀게 했다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외면하여 고개를 돌리면 정말로 볼 수 없게 된다. 그는 스스로 균열로 가득한 곳에 몸을 거세게 부딪혔다. 소란한 두 발로, 미완성된 길을 걸었다. 계속해서 걸었다.
쌀쌀한 가을비가 내리는 런던의 뒷골목은 어두컴컴했다. 우연히 사냥꾼을 찾아낸 날도 이런 날씨였다. 부츠가 축축하게 젖어 몹시 불쾌한 기분이었다. 취객이 소변을 갈긴 담벼락 옆에서 사냥꾼은 좁은 어깨를 웅크리고 있었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사냥꾼의 환영을 무심히 지나쳤다. 조심스럽지 않은 인기척에 몸을 돌리자 근처를 서성이던 매춘부가 멀리서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아아, 이쉬. 늦었네요. 얼른 들어가요. 무거운 향수 냄새가 훅 끼치는 손이 뻗어오더니 그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그는 감사인사 대신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은 잘 끝났나요. 며칠 보이는 게 드물던데. 자기가 낮에 무슨 일을 하는지 까진, 난 잘 모르겠지만. 매춘부의 속눈썹은 빽빽하게 메꿔져 있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가드로 돌아오는 거지요? 럭스 씨를 통해 그렇게 들었어요. 잘 부탁해. 애살스레 웃어 보인 이름 모를 매춘부는 서둘러 안으로 몸을 들였다. ‘데네브’ 의 문이 그것을 덜컥 집어삼켰다. 미소도 촛불처럼 훅, 꺼졌다.
데네브.
새의 꼬리. 백조자리에서 가장 하얗고 밝은 별. 그러나 이름만을 빌려왔을 뿐이고, 실상은 매춘이 이루어지는 창관을 지칭한 것이다. 사냥꾼을 쫓아 스스로 숲을 떠나기를 택한 뒤로 머물 수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사냥꾼과 관련한 인간들을 하나 둘 처참하게 몰아넣는 데 열중하였다. 지금까지 도합 넷이었다. 조금씩, 사냥꾼의 숨을 틀어막았다. 언젠가 뛰쳐나오겠지. 바로 그 날처럼. 늑대는, 그는, 보금자리 그 자체에 대한 열망은 크지 않았으나 그들의 방식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때때로 무작정 파묻힐 장소가 필요했다. 숨을 참고 아래로 가라앉을, 그런 곳은 어디라도 좋았다. 새벽이 푸른빛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이고 나면 출렁이는 수면 밖으로 밀쳐져 떠오른 기분이었다. 가시덩굴처럼 따갑게 목을 옥죄인다. 그것이 싫었다. 저는 피를 갈구하는 자가 아니기에 저를 직접 해하진 못할지언정 기억을 끊임없이 잘라내 함부로 더듬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델,
아델. 나의 형제. 광원을 전부 치워버려 불빛 하나 없는 방으로 며칠 만에 귀환해 푹신하지만은 않은 침대에 엎드러졌다. 어디선가 대화를 나누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썹이 눈매를 따라 처진다. 우울한 눈동자가 굴러 벽에 기댄 낡고 볼품없는 피아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따금 의도적으로 잊기 위해 저것을 이용한다. 불균형이며 균열을 부러 초래해 그것에 집중을 할 수만 있다면. 그래. 그는 눈을 스륵 감았다. 밝은 잿빛이 섞인 머리카락이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숨었다. 비겁했다. 벌써 여기까지 걸어왔다. 그는. 숲에서 멀었다.
너무나 멀어서, 그곳의 바람이 이곳까지 불어오기란 어려웠던 것 같다.
* * *
다음 날 그는 늦잠을 잤다.
무엇인가 꿈을 꾸었는데, 모두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쉬. 누군가 꿈속에서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을 제외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