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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 Acta est Fabula

IllillIll 2018. 1. 28. 20:02

160902 Acta est Fabula

 

 


   아버지.

 

   그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 자리한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부친을 바라보며 웃었다. 구겨진 베갯잇과 눌은 이불에 모든 것을 맡긴 남자에게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의 눈빛이 초점 없이 흐리다. 누구보다도 풍채가 좋았던 몸집은 겨우 반 년 사이에 절반으로 줄어 바람이 급히 빠진 종이 공처럼 상당히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아버지. 그가 먼저 운을 띄우고 남자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마디를 따라 갈라진 손등을 제 뺨에 대고 속삭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가주님. 남자는 라누아라는, 아무도 찾지 않는 가문의 가주였다. 제가 격조했지요. 마르고 뻣뻣한 손바닥에 무의식을 담아 입술을 맞추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에야말로 정말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고 하여 다른 일들을 전부 물리고서라도 아니 찾아 뵐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굳어버린 손은 차게 식은 뒤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제 마음을 당연히 알아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입술이 한가로이 움직이며 남자의 얼굴 위에 말을 씹어 뱉었다. 남자는 눈을 홉뜨고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밝은 금빛 눈동자 하나가 형형하게 번뜩인다. 나머지 하나는 검은 가죽 안대가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제이드 라누아는 죽어가는 부친의 앞에서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득한 광경이다. 하지만 그 기이한 풍경을 지적할 이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이 짓무르고 썩은 저택에, 더 이상 누군가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까아악. 창틀에 앉아있던 커다란 까마귀가 날개를 펼치며 시끄럽게 울었다.

 

   아버지.

   당신이 저를 데려오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당신은 그 날 저와 함께 참 많은 것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아마 현명하신 조모님께서는 그것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그는 홀연히 말을 멈추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겹쳐 있지 않았다. 길고 검은 머리 뒤로 까마귀 깃털이 흔들린다. 불에 덴 듯한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오래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결국은,

 

   그는 웃었다. 입매가 비뚜름히 올라간다. 그의 손이 허리께에 덮인 이불에 닿았다. 이만 안녕히 주무십시오. 순간, 어둠 속에서 검은 것이 불쑥 솟아올라 그와 남자를 덮쳤다. 삼켰다. 그대로 뚝, 하고 무엇이 끊어졌다. 소스라치게 허무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후 부친을, 망가진 남자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 참 허탈하기 그지없는 감흥이었다. 진짜로 주무시러 가셨네요. 그는 붉은 벨벳을 씌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지친 눈길을 먼지가 낀 허공에 주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오래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한숨을 섞어 재차 읊조렸다. 애꿎은 탓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쳐들렸던 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리를 찾았다. 넓은 방 안에 홀로 남은 제이드 라누아는 늘 짓던 웃음을 지우고 싸늘한 시선으로 어둠을 노려보았다. 눈동자를 채운 밝은 빛이 조금은, 아래로, 저 아래를 향해 심연의 무저로 가라앉는다.

 

   아버지.

   결국은 모든 것이 다 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는 얼굴을 황급히 감추고 웃었다. 병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듣는 이가 없을 거라 또 한 번 확신한 뒤로는,

   사방을 향해 화려하게 튀는 불꽃처럼 무엇이 어지러웠다.

   그 화마가 낡은 라누아 저택을 모조리 부수었다.

 

   아버지.

   제가 이겼습니다.

 

   불탄 재 위로는 오늘날까지 흰 잿더미만이 남았다.

 

 

   이제 모든 것이 제 것입니다.

 

 

 

* * *

 

 

 

 

   제이드 라누아에게.

   네가 이곳을 떠난 뒤로 계절이 두 번 바뀌었어. 나는 너무나 무사히 지내고 있다. 별장은 늘 조용하다. 하인들 말고는 상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물론 심심할 때도 있어. 그래서 너도 알다시피 가끔은 다른 곳에서 머물긴 하지만그것도 그리 길지는 않아. 솔직히, 방에 틀어박혀서 네가 보내 준 편지를 다시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여러모로 더 유익할거야. 다만 네가 보낸 첫 편지는 아직까지 열이 받는다. 이 일에 대해선 너도 딱히 할 말은 없겠지. 사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 퇴근시간이 아닌데도 성을 나서기에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집에요.” 라고 해서 나는 당연히 내 집에서 기다렸는데, 너는 돌아오지도 않고. 그 다음 날에 정식으로 네 근황을 물으러 기사단저에 가보았더니 네가 로열 글라디우스에서 탈단을 했다고 하질 않나―」

 

   부드득. 열심히 써내려가던 종이에 펜촉이 걸려 잉크가 튀었다. 에브닉은 분노로 인해 떨리는 손을 차츰 진정시켰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사실, 누군가 저 사건에 대하여 물어보았을 때, 그 때의 화가 다 풀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에브닉 드 셀레비스의 머리카락처럼 새빨간 거짓말이다. 여전히 괘씸했다. 정식으로 인사를 한 것도 아니고, 제 때 사정을 설명한 것도 아니었다. 며칠 후에 전후사정을 구구절절하게 담은 편지가 도착했다. 에브닉은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그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제이드였다. 이제 와서. 그렇다 하여도 명백하게 일방적인 통보였다. 벌써 이벨리아에게 실컷 놀림당한 뒤였다. 거 보렴. 이브, 그 남자는 돌아오지 않는다니까. 널 버린 거야.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제이드 라누아와 이벨리아 드 셀레비스의 사이에서는 사전에 세세한 이야기와 협의가 다 오갈 만큼 오간 뒤모든 일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덕분에 에브닉은 바보가 된 기분을 더욱 실컷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에브닉이 보낸 첫 답신은, 꽉꽉 눌러 쓴 <죽어버려> 였다.

 

   첫 번째 편지에는 라누아 가로 돌아가는 이유, 기사단을 탈단한 사정, 그간에 그가 자신의 누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앞으로의 계획과,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얼마나 저를 생각하고 있는지몇 번을 읽어도 낯이 뜨거울 만큼 긴 이야기들이 특유의 정갈한 글씨로 기승전결이 적절하게 나뉘어 무려 서른 장에 걸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때문에 차마 홧김에라도 벽난로에 집어 던질 수가 없었다. 답장을 비록 그렇게 하긴 했으나 에브닉의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이벨리아가 놀리는 것을 그만 둘 정도로 넋이 나간 모습으로 얼마간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브. 곧 돌아가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어찌나 자주 손으로 더듬어 보았는지 물든 잉크가 다 희미해져버렸다.

 

   그렇지만 제이드가 돌아온 것은 꽤나 갑작스러웠다. 꼬박꼬박 일이 주에 걸쳐 한 번씩 도착하던 편지가 살짝 늦어진다 싶던 어느 날, 겨울과 봄을 보내고 여름으로 막 접어들던 차에, 이벨리아가 응접실에서 손님과 티타임이 있다고 하여 너도 모처럼 내려오지 않겠느냐 권유했었다. 에브닉은 별 일이다 싶었지만 아무 의심 없이 응접실에 내려갔다. 그리고 마치 기적처럼, 태연하게 누이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까마귀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공자님. 오랜만입니다. 정말 우습게,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반 년 만에 저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인사였다. 에브닉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제 방으로 돌아가 실전에서 즐겨 사용하는 커틀러스를 꺼내 내려왔다. 이어 득달같이 내려와 가차 없이 휘둘렀다. 이 망할 자식아. 내가

 

   무슨 심정으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죽어. 죽어버려. 정식으로 검을 찌르거나 긋는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위협적으로 작용했다. 하마터면 진짜로 턱께에 상처를 입을 뻔 한 제이드는 몸을 요령껏 피하면서도 에브닉이 진정할 때 까지 섣불리 무어라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긴장이 풀려 빠르게 지친 에브닉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검을 든 손을 떨구었다. .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넘어오는 숨을 삼켰다. 진짜 짜증나. 그랬더니 뭐라더라, 제이드 라누아는 난감하게 웃으며, 이 말 제일 먼저 해드릴 생각이었는데. 많이 보고 싶었어요, 공자님. 이라고 했던가. 어깨가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너무나 뻔뻔스럽기 그지없었다. 에브닉은 이를 악물고 넌 지금 그 말 밖에 안 나오지, 라고 사납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공자님께 미리 말씀 드리고 싶었는데.

 

   그는 답지 않게 말 잇기를 머뭇거렸다. 공자님 보고 싶은 거 참느라 저 여기, 터지는 줄 알았어요. 그는 그의 심장이 자리한 곳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정말 이거매일 말씀 드리고 싶었는데. 직접. 제 목소리로. 에브닉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보고 싶었어요, 에브닉 경.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함부로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단 한 순간도 제하지 않은 모든 순간마다. 그 말에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브. 그가 저를 다정하게 불렀다. 너 같은 거 너무 싫어. 왜 네 마음대로 없어지는 건데.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거기다 쓸데없이 오래 걸렸잖아. 더 분발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는 버벅이며 마구 쏘아붙이는 에브닉을 조심스레 품에 끌어안고 달랬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공자님.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절대. 약속할게요. 제이드가 멋쩍게 미소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지만 에브닉은, 그저 그가 달아나지 못하게 꽉 껴안고 버텼다. 그 꼴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이벨리아는 끝내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랬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의 사이를 재고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해. 제이드 라누아.

 

   에브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재고, 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었다. 재고.

 

   실은 최근에 너보다 가까이에서 늘 나를 아껴주고, 따르고, 지켜주는 존재가 생겼어. 그는 다정하고 상냥해. 가끔은 내가 그를 돌보아주고싶기도 해.

 

   그러니까,

 

   …「우리는 이만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빠르게 답장 주었으면 좋겠어. 에브닉 오르페오 드 셀레비스. 에브닉은 더없이 고상하고 우아한 귀족적인 몸짓으로 깃펜을 내려놓고 거기까지 쓴 편지를 접어 봉투에 봉했다. 조금 더 파격적인 표현을 쓸 걸 그랬나. 못내 아쉬움에 편지 봉투를 슬쩍 들춰보았지만 붉은 씰은 저 혼자 단단하게 굳어버린 상태다. 폭 한숨을 쉬었다.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그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는 내내 신선한 고기를 뜯으며 창틀에 앉아 대기 중이던, 커다란 까마귀의 검보라색 눈과 제대로 마주치자 에브닉이 불만스레 미간을 좁혔다. 이리 와. 퉁명스러운 말과는 다르게 선뜻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까마귀가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몇 번 헛으로 날갯짓을 했다. 짜증이 슬그머니 솟았다. 제이드 라누아가 애지중지 기르는정확히는 모신다는 표현에 더 가까웠고, 가끔은 까마귀에게 우는 소리까지 하는 듯 했다하여튼 저놈의 까마귀는 대단히 건방진 녀석이었다. 제가 숫제 인간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그만큼 머리가 비상한 모양이었으나 유난히 에브닉에게 모질고 박하게 나오는 것 또한 현실이다. 에브닉은 감히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까마귀에게 편지를 드밀었다.

 

   “이거, 제이드 라누아에게 전해.”

 

   까마귀는 에브닉이 내민 것을 분명히 보고도 눈을 껌벅이며 갸웃거리다가 못 본 척 돌려버렸다. 울컥한 에브닉은 다소 거친 손길로 까마귀를 덥석 잡아끌어 편지를 고정시켰다. 이 무례하고 비인도적인 처사에 즉각 항의하듯 까마귀는 에브닉의 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아야. 손을 얼른 뒤로 빼서 허공에 털어냈다. 다행히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에브닉은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다가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덧 떠날 준비를 마친 까마귀가 검은 날개를 퍼덕였다.

 

   “잘 가. 부탁해.”

 

   반쯤 열려있었던 창문을 젖혔다. 길이 열린다. 까마귀는 망설임 없이 창공을 향해 비상했다.

 

 

 

* * *

 

 

 

 

   왕궁 안의 분위기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기묘하게 평화롭다. 검은 머리에, 금색 눈동자를 가진 키가 큰 남자는 반질거리는 흰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따라 한가하게 걸었다. 긴 머리카락 뒤에 매달린 까마귀 깃털이 주인을 따라 춤을 춘다. 바다를 다니며 그을린 얼굴 위로 끝이 올라간 입매가 여유롭게 보였다. 희미한 콧노래가 주위를 맴돌았다. 눈부신 창을 지나칠 때마다 귓바퀴를 따라 박힌 작은 장신구가 빛난다. 그는 귀한 루비 반지를 목에 목걸이마냥 만들어 걸고 있었다. 붉은색 예복을 걸친 어깨에는 그늘 속에서도 햇살이 유유히 내려앉았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얗고 고요한 왕궁과는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자체적인 불협화음을 유치했다. 어딘가에서 도려내온 것을 임시로 때워 붙인 것처럼. , 어차피 이 남자는 마침 왕궁에 소속된 자가 아니었다.

 

   어쨌든 객의 자격일지라도 지금은 가능한 한 눈을 피해서 비교적 외곽에 자리한 뜰로 가는 중이었기에 마주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렴 눈을 피하려는 사람치고 썩 긴장된 태도는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저렇게 대놓고 앞길을 막는 사람은아무리 제이드 라누아일지라도 피하지 못할 필연적인 일로 작용했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제이드 라누아, 클로비스 애셔 버미어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가를 상징하는 보라색 눈이 말없이 가늘어졌다. 그간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그렇기에 면이 익숙한 자다. 저 자가 기사단을 그만둔 뒤, 항간에는 셀레비스의 공녀와 손을 잡고 상단을 차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의외의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굉장히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제이드 라누아가 자신의 성을 건 상단의 상단주가 된 것은 소문에서 그치지 않은 엄연한 사실로 자리 잡았다. 더구나 알아본 바에 의하면 원체 수완이 있는 자라 고작 몇 개월 사이에 남부에서 제법 세를 불렸다고도 했다. 선박을 이용해 교역을 하는 해상상단이라던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쪽이 아니고, 상단에서 암암리에 지재를 포함해 다룬다는 쪽에 주목해야 했다. 정보상이라니. 알 만 했다. 정보는 남부에만 있지 않다. 사방 도처에 널려있는 것이 정보. 까마귀가 반짝이는 것을 주워다 모으는 건 그만두고 다른 것을 주워다 모으기로 했나. 과연, 저 자가 제 손안에 든 정보만을 순전히 사고 파는 데에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은 적중했고, 그래서아마도 이렇게 마주친 것일 테지만. 몇 가지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있지. 너를 지금이라도지하 감옥에 넣고 가는 것이 이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닐까.”

 

   진심이었다.

 

   “으음그것은 지금이라도늦지 않으셨습니다만, 정중히 사양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자는 그의 정강이를 거하게 걷어찼다. 비교적 오랜만의 안부인사 치고 격렬한 행위였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만한 엄청난 통증이 그를 후려쳤다. 하마터면 정말로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맙소사. 그는 얼굴을 싸매고 비틀거리며 복도의 벽에 몸을 기댔다. 두목.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닥쳐. 팔짱을 끼고 당당히 서 있는 왕자의 한 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내가 친히 계속 경고한 것 같은데,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반드시 죽일 거다. 네놈이 사랑해 마지않는 흑염소와 사이좋게 수장되는 기분이 어땠는지는 바다 밑에서 서면으로 직접 보고하도록. 예에? 전하. 어휴, 제가 사랑하는 건 오직원하는 만큼 조속하고 간결한 요약답변이 준비되어있지 않자 반대편 정강이가 같은 강도로 걷어차였다. 으악.

 

   “다 시끄럽고. 앞으로 범죄는 안 돼.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위조도 안 돼. 사기, 절도, 폭행, 공갈협박, 이런 것들도 전부 불허한다.”

   “?”

 

   까마귀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불허한다고.”

 

   의의 있나? 아니 뭐, 예에.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다리의 안녕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클로비스는, 이윽고 미련 없이 스쳐 지나갔다. 왕가의 복도는 앞으로 한참 길었다. 왕자 전하. 또 마지막까지 무슨 한심한 헛소리를 하려나 싶어 흘끗 돌아보았다. 주저앉은 바닥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가 가면을 씌운 듯한 미소를 그린 채 느릿하게 다리를 굽힌다. 정석적인 예법에서 단 한 치의 어긋남조차 없는, 가히 모범적인 움직임이었다.

 

   “부디 오래도록, 무탈하게 강녕하시옵소서.”

 

   역시나 헛소리였다. 왕자는 코웃음을 쳤다.

 

 

 

* * *

 

 

 

 

   “늦어서 송구합니다.”

 

   아니. 괜찮네. 한 손에 애마의 고삐를 쥔 왕태자는 옅게 웃으며 그를 맞아주었다.

 

 

 

* * *

 

 

 

 

   외곽에 딸린 숲은 인적이 드물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그래서이것들은 일전에 요구하신 정보들입니다.”

 

   간략한 보고를 마친 제이드는 엘란츠에게 잘 갈무리된 문서 몇 개를 넘겼다. 하나같이 철저하게 관리된 태가 나는 것들이었다. 현재 급속도로 자체적인 세를 불려나가는 동부 상단들의 명단입니다. 최근에는 남부 근처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죠. , 출신이 남부인 자들은 제외했습니다. 그는 담백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균열이 생겼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나, 보시다시피. 그 균열을 그냥 두실지, 나서서 공적으로 처리하실 지는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그가 눈을 휘었다.

 

   후자의 경우 뒤에서 저들끼리 암암리에 이처럼 눈을 가리고 벌이는 일들로, 증좌 확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첫 실을 잘 꿸 구실이 필요합니다. 덧붙여 지적하신 부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더 심도 깊은 조사를 진행한 뒤에 전하께 정보를 드릴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 작업은 이미 저희 쪽에서 진행 중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예상으로는앞으로 길어야 사흘 안에. 건네받은 문서를 훑는 왕태자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그것에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왕태자가 가장 신뢰하고 아끼는 준마가 푸르르, 하고 투레질을 했다. 야아. 프레이 공. 산책이 산책답지 않아 심심하시지요.

 

   “그렇다면 이 상단들, ,”

 

   엘란츠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라누아. 자네 괜찮은 것인가?”

   “?”

   “자네머리를…….”

 

   내 말이 씹어 먹고 있지 않나, 라고 지적하기란 이상하게 참 힘들었다.

 

   “하하. 여기에 올 때마다 늘 벌어지는 일이니 괜찮습니다. ! 깃털만은 안 됩니다!”

 

   황급히 깃털을 사수하기 위해 머리를 감싸고 뒤로 물러났다. 프레이는 불만스레 앞발로 땅을 긁었다. , 미안하네. 프레이. 그러면 안 돼. 괜한 엘란츠가 애마를 타이르며 사과를 했다. 미욱한 백성 주제에 왕태자나, 왕태자의 애마 둘 중 누구에게 이렇다 저렇다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입만 비죽거렸다. 저는 괜찮습니다아. 절대로 안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말은 일단 그러했다. 대신에 몸을 숙여 가져 온 가죽 가방에서 제일 깊숙이 밀어 두었던 붉은 봉투 하나를 꺼내어 바쳤다. 그리고, 이것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엘란츠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가 내민 봉투를 가져가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겉면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랄까, 이것은 당장엔 혼란이 이실까 하여 감히 보여드리는 시기를 잠깐이나마 고민했습니다만,

 

   “보시고 직접 판단하시면 됩니다. 저는 단지 요구하신 것을 능력껏 알아봐드릴 뿐, 마찬가지로 최종 결정은 전하께서 하시는 것이니까요.”

 

   문서를 잡은 왕태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커다란 까마귀가 날아든 것은 그 때였다.

 

   익숙한 날갯짓 소리를 누구보다 쉽게 포착하고 제이드가 팔을 들었다. 까마귀는 큰 날개를 퍼덕이다 그의 팔위에 기품 있게 내려앉았다. 안녕하십니까, 두목님. 수고하셨어요. 먼 길 오셨는데어디보자, 다치신 곳은 없는 것 같고. 상태를 살피기 위해 날개를 쓱 들추자 그것이 실례라고 꾸짖기라도 하는 듯 자비 없이 검은 날개를 휘둘러 뺨을 후려쳤다. 아야. 알겠습니다. 적당히 할게요. 제이드는 까마귀를 달래며 묶인 편지를 뜯어냈다. 엘란츠는 그가 기르는 저 까마귀가 신기했다. 중요한 편지들을 비밀리에 가끔 배달하기도 했기에 까마귀는 왕태자와도 구면이었다. 매우 영리하고 영악하다. 이름이 뭐라더라, 그는 까마귀를 두목이라고 불렀다. 두목. 가만 보면 실제로 두목을 모시는 부하의 자세로 우대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까악. 까마귀가 채근하자 제이드가 품에서 투명한 유리구슬을 꺼내 입에 물려주었다. 식사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숙소에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는 엘란츠에게 양해를 구하고 까마귀가 전해 준 편지를 뜯었다. 셀레비스에서 흔히 쓰는 봉투였지만 가문의 인장이 정식으로 찍혀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제이드의 만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튼 그건 그것이고, 제이드는 까마귀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저기요, 두목. 혹시 에브닉 경을 쪼거나 하진 않으셨죠. 제가 비싼 고기도 드리면서 미리 부탁드렸잖아요. 그렇죠. 어깨 위로 자리를 잡고 앉은 까마귀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일말의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배달된 편지는 평소만큼 길지 않고 유달리 짧은 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문제의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그는, 매우 충격 받은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현장을 에브닉이 보았다면 의도대로 성공했다며 퍽 고소해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바젤의 천둥과 번개가 전신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오죽이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엘란츠가 자네 괜찮은가? 하고 물었다.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었다.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전하…….”

   “, ?”

 

   이제 어찌하면 좋습니까아. 에브닉, 에브닉 경이. 글쎄. 저더러.

   그는 생명끈 같은 편지를 부여잡고 온통 울상이었다.

 

 

 

* * *

 

 

 

 

   더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충동적이었다.

   잘라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한 것 또한 충동적이었다.

 

   에브닉은 서재를 뒤지다가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비를 연상케 하는 심홍색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들썩였다. 신경질적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짜증이 일었다. 그렇지 않아도 뜰에 나가 한바탕 검을 휘두르고 돌아 온 참이다. 오늘따라 이 풀풀 날리는 붉은 것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선물 받은 머리끈으로 고정을 해도 한계가 있었다. 가슴께까지 물결치며 내려오는 붉은 머리 타래는 누구에게나 매우 아름다워 보였지만, 이 순간, 그 어떤 찬사도 에브닉의 귀에는 와 닿지 않았다. 이가 갈렸으면 갈렸지. 새삼 제게 머리를 기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그 놈의 얼굴이 생각났다. 짜증이 치밀었다. 그 놈에게서 답신이 늦는다는 점도 틀림없이 작용했다. 내용이 심상찮게 그러한데 바로 보내야 할 것 아닌가. 까마귀든, 인편이든.

 

   “몰라. 나도 이제.”

 

   앉은 자리에서 도로 벌떡 일어난 에브닉은 사방을 주시했다. 문득 방 한켠에 고이 놓인 자신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검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고운 머리카락을 한움큼 잡아 검을 대었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실들이 발밑으로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옷에 묻은 것들을 대충 툭툭 털어버린다. 용건을 다한 검은 검집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손질을 좀 하긴 해야 하겠지만 시원하게 잘린 머리가 거울에 비치는 것을 보자 그것만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아직 손에 꾹 쥐고 있는 머리타래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대충 묶어 사이드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창가에서 내리는 여름 햇살에 붉은 머리카락이 아스라이 반짝였다. 에브닉은 방문을 닫았다.

 

   땀에 푹 젖은 몸을 씻고 나오니 시종들이 간단한 간식으로 셔벗을 준비해두었다며 내주었다. 상큼하고 달달한 오렌지 향이 물씬 풍겼다. 작은 스푼으로 파삭거리는 차가운 것을 떠 입 안에 넣었다. 맛이 좋았다. 창밖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푸른 잔디가 깔린 앞뜰이 넓다. 나무가 우거진 숲이 가까이에 있었다. 우수수, 하고 나뭇잎들이 저들끼리 몸을 비비고 부딪혀 바람소리가 난다. 누군가 오는 걸까. 괜스레 두근거렸다. 유달리 숲도 시끄럽다. 녹은 것을 전부 스푼에 긁어모아 먹고 자리를 떴다. 오늘치 훈련도 미리 마쳤고, 여름이라고 해도 해가 많이 따갑진 않으니 밖으로 나가 천천히 주변을 거닐 생각이었다.

 

   바람에서 여름의 냄새가 났다. 문을 열고 나온 에브닉은 멀지 않은 나무 둥치에 앉았다. 흰 셔츠가 녹음에 대비되어 더 하얗게 보였다. 머리카락은 몹시 붉었다. 두 눈은 진한 호박색이다. 눈을 가만히 감았다가 뜬다. 무엇인가 보일 듯 말 듯 하다. 사박사박. 풀 위를 걷는 소리가 났다. 에브닉은 그 편을 향해 자연히 고개를 돌렸다. 이처럼 외딴 별장에 찾아올 이가 있던가. 우선은 검고 긴 머리가 보였다. 그 다음으로는 볕에 그을린 얼굴이, 저와 같이 황금빛으로 밝게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목이 꽉 틀어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걸음을 떼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저를 보고 웃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에브닉 경. 나직하게 제 이름을 불렀다. 다행스럽게도 첫 걸음을 떼자 두 번째 부터는 수월했다. 에브닉은 뜰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곧장 달려갔다. 제스. 그가 멈추어 서서 팔을 벌렸다. 이리 오세요. 에브닉은 서슴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제이드는 에브닉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잡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흡사 난데없이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깨달음이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제이드의 눈이 급격하게 경악에 물들었다.

 

   “에브닉 경.”

   “나도 보고 싶었?”

   “머리가 이게…… 뭡니까?”

 

   에브닉은 무어가 어떠냐며 제 머리를 슥슥 쓸었다.

 

   “더워서 잘랐는데.”

 

   예에에? 제이드는 에브닉을 돌려 서둘러 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의 심각성을 진단했다. , 맙소사. 에브, 에브닉 경. 이브. 아니 세상에. 이 예쁜 것을요! 에브닉은 벌컥 돌아보며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내 머리카락이라서 내가 잘랐는데 도대체 네가 무슨 상관뒤로는 말을 잘랐다. 제이드가 교제를 시작하기 전을 포함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더 없이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측건대 희대의 충신이 눈앞에서 나라를 잃어도 저런 표정을 짓진 않을 것이다. 에브닉은 낯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제이드 라누아. 저기, 혹시 울어? 끔찍한 가정이긴 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안하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결국 에브닉은 자신이 머리를 충동적으로 자른 것에 대해 살짝 후회했다.

 

   “다음에는…….”

   “, .”

   “…… 저랑 상의를상의해주세요…….”

 

   그는 우울 그 자체가 되어 에브닉을 당겨 안았다. 에브닉은 잠자코 품에 안겨있었다. 포도 향이 가깝다. 잃어버렸던 것을 오랜만에 되찾은 기분에, 비로소 제이드는 옅게 웃었다. 오른쪽 뺨에 입을 맞추고, 왼쪽 뺨에 입을 맞추고, 콧잔등과, 이마에 입을 맞춘다. 공자님.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아니면. 키가 조금 크셨나? 아하하. 농담입니다. 그렇게 보지마세요. 또 하고 싶게. 이런 거그는 에브닉의 입술에 길게 입술을 맞대었다. 부드러운 온기가 안에서 부풀어 올랐다. 장난을 거는 듯 가벼운 키스에 간지러워 숨죽여 웃던 에브닉이 그를 제 쪽으로 확 이끌어 조금 과감하게 공수를 전환했다. 단 호흡을 삼킨다. 뜨거운 것을 나누고, 교차한다. 제이드가 먼저 눈을 떴다. 노란 베고니아 꽃잎이 만개했다.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혹시 어디서 연습하셨나?”

 

   제이드는 웃었다.

 

   “여기서 내가 했다고 하면 싸움이 날까?”

   “어어? 뭡니까. 저는 그럴 리가 있냐, 라는 담백한 대답을 기대했습니다만.”

 

   에브닉이 묘한 표정을 짓자 그가 흐음, 하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혹시 편지에 쓴 그저보다 가까이에서 늘 공자님을 아껴주고, 따르고, 지켜주는 그 분이십니까? 다정하고 상냥하시다면서요. 가끔은 에브닉 경이 손수 돌보아주고싶기도 하고.”

   “단어순서도 외웠어?”

   “당연하죠. 공자님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기억하려고 합니다. 기억하고 있고요.”

 

   그는 씩 웃었다.

 

   “그래서저에게도 그 분을 좀 소개시켜주시겠습니까?”

 

   고모의 할머니의 이모의 사돈의 팔촌까지 무자비하게 털어 생선처럼 줄줄이 엮은 다음 아주 보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뒷짐을 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 * *

 

 

 

 

   집에 들어갔던 에브닉은 어린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나왔다.

   . 이 근처에서 얻어왔는데, 나를 아껴주고, 따르고, 지켜주고, 다정하고 상냥해. 가끔은 내가 손수 돌보아주고싶기도 하고. 실제로도 그러고 있고. 너보다 말도 잘 듣고 똑똑해. 네가 봐도 그렇게 보이지?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는 게 어때. 제이드 라누아. 강아지는 끼잉, 하고 에브닉의 턱을 핥았다.

 

   제이드는 말없이 얼굴을 감쌌다.

 

   , 잠깐. 누구 맘대로 누굴 핥는 겁니까.

 

 

 

* * *

 

 

 

 

   “에브닉 경.”

 

   ? 제이드가 이벨리아에게 넘길 문서를 정리하는 것을 건너편에서 낙서를 하며 구경하던 에브닉은 고개를 들었다. 손 아래 깔린 종이에 쓰인 글씨가 영 삐뚤빼뚤하다. ‘제이드 라누아’. 용케 알아 본 제이드는 빙긋 웃었다. 답례로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가져다 짧게 입을 맞춘다. 이번에 오면 공자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어요. 뭔데. 또 번지르르 한 말이나 하려고 그러는 거지. 에이, 아니에요. 그럼. 에브닉은 그에게 잡힌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 중요한 겁니다. 손끝이 아프지 않게 깨물린다. 번지르르 한 말이 아니라면, 아마 그것일 것이다. 어디 어디를 갔다 올 것이며,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지에 대한 보고다. 에브닉은 말해 봐, 라며 몸을 당겨 앉았다.

 

   “저랑 같이 가실래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오랜만에 배 타고 싶지 않으세요?”

 

   그 말인 즉슨. 에브닉은 할 말을 잃고 머뭇거렸다. 하지만제이드는 차분히 에브닉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주변 사람들이 무어라 언질을 준적은 없지만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의 일부는 타자가 함부로 손댈 수 없이 매우 복잡하고, 심지어 위험하다는 것을. 제이드는 에브닉을 따라 몸을 당겨 앉았다. 콧잔등에 옅게 주근깨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걱정하시는 것은 다 끝났습니다. 전하를 뵙고 라슬로에 다녀오면서마무리가 되었죠. , 제 끝내주는 능력으로 벌써 대부분 안정이 된 상태니까요. 제이드가 장난스레 우쭐거리며 짐짓 거만한 제스처를 취했다. 에브닉은 그 모습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뭡니까. 비웃으시는 건가요.

 

   “아니야.”

   “그럼요?”

   “자랑스러워서 그렇지. 아마도?”

 

   흐음. 그는 의심과 불만이 가득한 눈을 반쯤 감았다.

 

   “그래서, 대답은요? 공자님.”

 

   에브닉은 부러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제이드.

   나는

 

 

 

* * *

 

 

 

   “아가씨. 도련님은 언제 오실까요?”

 

   “때 되면 소식이 오지 않겠니. 바다는 넓으니까 느긋하게 기다리지 뭐.”

 

 

* *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