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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 자각

IllillIll 2018. 1. 28. 19:54

160829 자각 (with. 에브닉)

 

 

   빛이 스몄다. 붉은 빛이. 그는 언젠가부터 가시덤불로 뒤덮인 끈끈하고 더럽고, 질척이고, 검고 습한 제 안에 무엇인가 마침내 도래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실은 그 이상으로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것대로 좋았다. 따뜻했다. 그것이 스며든 빛 탓일지, 지금 자신이 품 안에 가둔 이의 체온 탓일지는 잘 짐작이 가지 않는다. 붉게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손틈 새로 쓸어 올리다 그 둥근 이마에 가만히 입술을 붙였다. 고른 숨소리가 조금 커졌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까마귀는 저 말고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날개 안으로 더욱 밀어 넣어 품었다. 평온하게 감긴 상대의 눈꺼풀을 응시한다. 스페사틴. 그리고 문득 보석의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스페사틴. 그것은 불그스레한 금빛을 머금은 특별한 가닛의 이명이다. 때로는 귀한 호박이기도 하고, 찬란한 시트린 같기도 하고, 연마된 토파즈였지만, 무엇보다 한여름에 타오를 듯 하는 것이 꼭 작열하는 태양의 루비 같았는데, 그것도 제법, 어울린다. 어쨌거나 결론은 그가 손에 감싼 가장 긴요한 보석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지난 밤을 뜬 눈으로둘 중 한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지샌 덕에 뒤바뀐 잠을 청했고, 때문에 창밖으로는 동이 트는 것이 아니라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는 몸에서 힘을 풀고 늘어졌다. 딱히 움켜쥐기 위해 힘을 주진 않았지만, 자신의 염려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날이 서 있겠지만, 혹여나 으스러질까 싶었다. 어쩌다 대단히 운이 좋게 갖게 된 이후로, 매 순간을 상상했다. 처음으로 손에 다 닿은 진실. 지극히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말의 끔찍한 상실의 가능성을 언제나 매 시 매 분 매 초마다 상상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견딜 수 없어져버릴 것 같았다. 누군가가 괜한 걱정이라고 치부해도 상관없었다. 추하다고 해도. 까마귀, 제이드 라누아는 그 누구도 완벽하게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마저.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욕망으로 점철된 사람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에브닉 경.”

 

   나직한 목소리가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내면과는 달리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코끝을 톡, 하고 살짝 건드리자 잠결에 콧잔등을 찡그리기에 푸스스 웃었다. 사실은, 잘 모른다. 짐짓 많이 아는 체를 했지만 정작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이 붉은 머리의 남자가 제게로 와서 잘 기댄다는 것, 정도일까. 저를 등지고 기대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면 퍼즐처럼 포개어 맞추기를 좋아했다. 거부할 이유가 하등 없어 한 번도 거절하거나 밀어낸 적은 없다. , 보통은 그 전에 먼저 그가 홀린 듯이 이끌려 다가가고는 하였다. 다가가 입을 맞추고 품에 가두었다. 다행히 마찬가지로 거절당하거나 밀어내진 적은 아직까지 없다. 제이드 라누아는 여태 제 허리를 감고 있던 에브닉 드 셀레비스의 손을 조심히 가져가 당신의 열 손가락 끝에 일일이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 손가락에서 입술이 떠나자 감겼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재차 감길 듯 말 듯, 가물거릴 시야가 권태로워보였다. 그만 일어나세요, 공자님. 여기서 더 주무시면 밤이 돌아왔을 때 곤란하실 겁니다. 뺨을 쓸며 다정히 달래었다.

 

   “…… 나 얼마나 잤어.”

   “세 시간 정도 주무셨습니다.”

 

   그래. 에브닉은 잠긴 목소리를 풀기 위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입을 일자로 다물더니 일어나지 않고 잠투정이라도 하는 양 그대로 품에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몸을 들썩이자 은은한 포도향이 가까웠다. 이 이상 무어라 더 말을 할까 하다가 제이드 역시 입을 다물었다. 가끔은 왜, 라고 묻고 싶었다. , 어떻게, 상대가 자신에게서 안온감을 찾아 느끼는 것인지를. 자신은, 얼마 전 까지 연인에게 둔중한 중력 아래 검붉고 무거운 감각을 연상케 했다. 이후로 줄곧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 어떻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누군가 가르쳐 준 걸까. 지금은 모든 인과가 구체적이지 않고 어렴풋하기만 하다. 그러나 아마도 영원히 묻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든 섣불리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붉은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더딘 감각이 간만에 제대로 작용한다고 착각할 만큼 부드럽다. 부드러울 것이다.

 

   또 자신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것이 처음이지 않을까. 일전에 정체를 배운 적이 없는 감정은 스스로 터득하는 데까지 애로사항이 많았다. 그 일련의 복잡한 과도기를 겪는 과정 속에서도 확실한 것이 있다면, 제이드 라누아는 에브닉 드 셀레비스가 좋았다’. 드물게 단어 그대로의 표현이다. 갖고 싶었고, 계속 눈앞에 두고 보고 싶었고, 그렇게 보고만 있으면 입을 맞추고, 안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오직 본능을 따라 움직이는 것 또한 생경한 경험이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함께 걷는 동안 헤매는 이는 자신뿐이지 않을까 슬쩍 작은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그런 것을 찾으셨습니까, 정말로 묻진 않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 제 심장에 매단 붉은 줄을 쥔 것처럼 주먹을 꾹 쥔 손을 만지작거려본다. 배를 타고 검을 잡았던 손 치고는 신기하리만치 흠이 없다. 그러니 자꾸 입술이 향했다.

 

   날이 떨어진다.

 

   저를보세요. 창밖을 확인한 그는 작정하고 연인을 깨우기 위해 부득이하게 위로 올라와 뺨을 감싸고 작게 틈이 난 도톰한 입술 새를 침입했다. 으응. 미간 사이가 자연히 좁아진다. 갑자기 막힌 숨에 어깨를 밀어내려던 손이 곱아들었다. 흐릿하게 뜬 눈이 갈 곳 없이 구르다가 그를 향했다. 저만 봐요, 이브. . 잠들면 안 돼요. 이윽고 그가 사랑하는 두 눈에 초점이 또렷해졌다. 그것을 신호로 보다 녹진한 입맞춤이 벌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엉켜 서로를 얼마간 탐하고 옭아맸다. 언제나처럼. . 제이드는 마지막으로 에브닉의 아랫입술에 과하지 않게 장난스런 소리를 붙였다. 드디어 일어나셨습니까, 공자님. 좋은 저녁이지요.

 

   에브닉은 제 위에 올라와 늘 그랬듯 짓궂게 웃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가 길다. 그리고 언뜻 보이는 까마귀 깃털. 결국 끝내 눈을 붙이지 않은 것 같았다. 풀밭이나 바위가 아닌 침대에서 잠을 잘 때에는 저것을 떼어 옆에 내려놓고는 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할 말이 없어졌다. 머릿속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이 자는 동안 죄다 사라진 모양이었다. 눈을 간간히 감았다가 뜨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더 어색해지기 직전에 그를 끌어당겨 빛을 잃은 쪽의 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제스. 오늘은 그리 부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 괜찮은 거지.”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가 다시 그린 듯이 미소가 금세 떠오른다. 그건 썼다.

   에브닉에게도 적당히 탄 음식처럼 쓰게 느껴졌다.

 

   “제가 언제는 안 괜찮았던 적이 있습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것은 분명 괜한 소리다. 하지만 에브닉은 단지 그래, 그랬지. 하고 말았다. 이대로 두 사람 모두 평소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했다. 암묵적이었다. 아니, 두 사람 모두 사실은 그럴 생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 * *

 

 

 

 

   그날 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에 무엇인가가 나왔다. 눈앞이 수없이 희었다가 검기를 반복하며 명멸한다. 제스. 우리 제스. 바싹 마른 나무 줄기 같은 손 갈퀴가 안으로 들어와 속을 긁어냈다. 헐겁게 고정되어있던 심장이 단번에 뜯겨져 나갔다. 비어버린 것은 몸통이었는데 어쩐지 전신이 붙잡아 끌리는 고통이었다. 사랑한다. 제스. 하나 뿐인. 우리 손자. 손가락은 머리채를 잡아챘다. 뜨거운 벽난로가 위로부터 쏟아졌다. 달궈진 벽돌에 얻어맞은 머리가 울렸다. 살갗에 불씨가 튀어 타들어갔다. 울지 마렴. 매캐한 연기가 폐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괴로운 게냐. 그에 대해 할 말은 없었지만 목이 메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빛과 어둠만을 분간하는 눈이 시렸다. 별안간 시야가 트였다. 붕 뜬 땅이 푹 꺼져 어디론가 몸이 거꾸로 쏠린다. 붉다. 붉은 것. 사방이 온통 붉은 것이었다.

 

   붉은 것. 그는,

 

   뒤집힌 세상에서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성긴 손가락들 사이로 끈적한 액체가 떨어져 발 밑 웅덩이에 고였다. 난 괜찮은데.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 마디마다 수면이 부르르 진동했다. 괜찮아. 파문이 일었다. 진원지에서 퍼져나간 무언가의 막연함은 안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버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혀를 빼고 손에 묻은 것이라도 핥아 급히 삼키려고 들었지만 늦어버렸기에 깨끗이 증발해버린다. 또다시 원인모를 허기와 끓는 갈증이 시작되었다. 혐오스럽다. 열이 들어찬 머리가 무거워 고개를 떨군다. 심연이 차원을 건너 저 아래에 있었다. 저곳에 까마귀의 새카만 둥지가 존재했다.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웅덩이가 사라진 땅을 더듬었으나 더 이상 붉은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머지않아 모든 것이 소멸하고 말았다.

 

   동시에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 위를 덮쳤다. 끄트머리에 얹힌 소음이 요란하다.

 

   “제스.”

 

   제스. 제스. 에브닉은 손등에 핏줄과 뼈마디가 도드라질 만큼 베개를 세게 움켜쥐고 있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베개 위로 엎드린 채 미간이 깊게 패여 있다. 아무리 그래도 베개가 철천지원수일 리는 없으니 충분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제이드. 제이드 라누아.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자 등을 다독였다. 이대로 뒀다간 멀쩡한 베개 하나가 찢겨나갈 것이다. 난감하게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 깍지를 꼈다. 벌어진 틈을 꽉 채웠다. 이번에는 억지로 깨우려 들지 않고 옆에 누워 그를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숨소리가 드물게 제멋대로였다. 제스. 에브닉이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그 부름에 응답하듯 일순간 숨이 멎었다. 긴장이 어느덧 다 타고 남은 잿더미 안으로 숨어 사그라든다.

 

   “…… …….”

 

   노란 베고니아 꽃잎을 짜낸 물이 오롯이 둥글게 고여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에브닉도, 제이드도 움직이지 않았다. 불탄 찌꺼기가 부패해버린 속은 진탕이 되어 쓰렸다. 선뜻 제자리를 찾지 못한 심장이 살아서 펄떡인다. 방황하던 시선이 혼자 아래로 향했다. 그처럼 맥없이 교차가 끊기고 난 뒤로, 에브닉은 숨을 죽여 제 입 안을 깨물었다. 곧 베개가 원래의 형상을 찾았다. 제이드. 추락하던 눈길이 서서히 올라왔다. 괜찮으냐, 무슨 일이 있느냐, 고 부러 묻지 않았다. 대신에 아침이야, 라고 했다. 그게 더 어울렸다. 씻고, 얼른 식사 하러 가자.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조금 늦게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움직였고익숙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에브닉 경. 머리, 기르시면 안 될까요.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말이다. 예쁜데. 손을 뻗어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꿈과는 달리 현실은, 극적으로 손끝이 가 닿았다. 에브닉은 대답 없이 그 손을 훔쳐 그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에 입을 맞춘다. 그러자 저는, 이라고 얕은 한숨을 섞어 제이드가 말을 이었다. 부드러운지, 거친지, 얼마나 뜨거운지, 얼마나 차가운지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조금 아쉬워요. 에브닉도 알고 있다. 그의 손끝이 둔하다는 것을.

 

   그럼 다른 곳으로 느끼면 되지. 그 선연한 말에 제이드가 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방금 그거 되게 위험한 발언인 거 아십니까. 하지만 에브닉은 뻔뻔스레 눈썹을 들었다가 놓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네가 위험한 거야. 그런가요. 눈을 감은 제이드는 입을 다물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코로 내쉬었다. 에브닉이 침대 시트를 부스럭거리며 몸을 붙여왔다. 미지근한 체온은 어지럽게 번지는 의식을 중심을 두고 침잠하게 했다. 금빛의 눈동자 두 쌍이 나란히 서로를 엮었다. 하나는 진하며, 하나는 밝았다. 공자님. . 에브닉 경. .

 

   “저 아파요.”

 

   에브닉은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파? 어디가. 얼마나.

 

   그냥요.

   그러니까, 키스해주세요. 그는 낮게 웃었다. 에브닉은 그런 그를 잠시 멀거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인 뒤 그의 입술에 짧지 않게 입을 맞추었다. 감사합니다. 훨씬 좋아졌어요.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미소였다. 더불어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이었다. 피곤하면 더 잘래? 에브닉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는 에브닉을, 까마귀는 붉은 보석을, 끌어안았다. 아니. 괜찮습니다. 벌써 다 나았나봐요. 공자님 덕에. 귓가에 바람을 섞어 속삭였다. 이제 와 붙잡을 수 없는 지나간 것은 잊을 수 없더라도, 혹은 그것마저 탐이 나더라도 어찌할 수 없다. 제스, 어제는 내가. 에브닉은 쉽게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있잖아. 그러다 무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찡그리며 입을 꾹 다문다.

 

   “네 이야기도 들려줘. 나중에라도 좋으니까.”

   “글쎄요. 공자님께서 듣기엔 하찮은 이야기들 뿐일 텐데.”

 

   그건 내가 판단해. 아니, 말하고 싶지 않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뭐든 말씀드리면, 재미가 없어도 잘 들어주실 겁니까? 에브닉은 새삼스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음, 하고 목을 울렸다. 기억해주실거고요. . 시트린같은 눈이 의욕에 차서 빛난다.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저런, 정말 다 듣고 기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합니다.”

 

   이런 말들은. 그는 하필이면 그 정확한 순간에, 저를 내려다보는 에브닉의 두 귀를 양 손으로 가리고 말했다. 하지만 완벽히 틀어막은 것도 아니거니와 그 입술의 모양이, 너무나 뚜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에브닉은 기어이 뻣뻣하게 굳고야 말았다. 아하하. 제이드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유쾌하게 웃었다.

 

   깃든 공허함은 어느새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