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로그

[제이드] TREAT

IllillIll 2018. 1. 28. 19:40

160815 TREAT (with. 에브닉)

 

 

   은구슬이 손등을 굴러간다. 손마디를 타고 그 다음, 그 다음으로 넘어간다. 더 갈 곳이 없어지자 손아귀 안으로 떨어진다. 구슬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은 굳은살이 많이 박혀있다. 어떻게든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려 있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붙잡고 버틴 흔적들이다. 개중에는 쓸려서 지문이 희미해진 손가락도 있다. 이제 이 손은 외부에서 침입해오는 자극에 둔했다. 두 주먹 안에 꼬박 쥘 수 있는 감각들이 흐릿하다.

 

   그래도 선연하게 기억하는 것들이 몇 있다. 따뜻했던 누군가의 손, 겨울의 눈과 얼음, 실수로 불에 데었을 때의 열기. 대부분은, 온도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미적지근하거나. 나머지, 손에 다가온 촉감들은 그에게 어떤 것이든 무던하게만 느껴졌다. 부드럽거나, 딱딱하다거나 하는 것 따위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지. 그런 걸 다 기억했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으리라. 그는 잔상이 비치는 유리 탁자 위에 은구슬을 올려놓고 검지의 손끝으로 굴렸다. 이것은 차갑다.

 

   게다가 가짜다. 입매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그날 밤, 찾은 은구슬들 중에는 가품 몇 개가 섞여있었다. 아마 은구슬 전부를 진품으로 구할 수는 없었겠지. 겨우 유희를 하는 것인데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제이드는 셀레비스의 공자가 선심 쓰듯 건네준 구슬을 찬찬히 응시한다. 하나쯤은 가져도 아무도 모를 거야. 많이 찾았는데 아깝잖아였던가. 그렇게 웅얼대며 시트린 같은 눈이 빛났었지. 그런데 골라도 이런 것을. 머리카락은 셀레비스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붉었다. 가닛보다는, 스피넬이나, 루비를 닮았다. 루비. 흐음. 루비는 좋지. 아름답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자수정이었으나 심홍색의 루비도 그에 못지않게 좋아했다. 왜냐하면, 가치가 매우 높으니까. 테이블에 한가하게 엎드려 은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거 말고, 진짜를 갖고 싶다. 입매가 시무룩하게 떨어진다. 갖고 싶은데.

 

   그는 이따금 모친이 왜 자신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는지가 궁금했다. 어쩌면 그 시기에 유독 갖고 싶었던 것이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은 바람대로 고귀한 푸른색의 아이 대신 스쳐지나간 하룻밤의 손님을 닮은 아이를 여자에게 내어주었다. 아마도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당연하게 잊고 지냈던 날을 대충이나마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태중에서 축복을 받기보다 여자의 탐욕을 먼저 배웠다. 빛나는 보석을 갈구했었던. 그것은 오늘날까지 그가 토해내지도 못할 만큼 깊은 저 아래에서 뿌리를 내리고 계속해서 몸을 불려왔다. 감각이 둔한 손을 쥐었다가 폈다. 루비는 차가웠던가, 뜨거웠던가. 그런 게 아니었던가. 아무튼 그에게선 이름대로 아름다운 푸른색이란 일절 찾아볼 수가 없다. 까마귀는 무척이나 검었고, , 욕심이 많았다. , 정말,

 

   갖고 싶다.”

 

   푸른 것. 붉은 것. 아니면 다른 것도 좋은데. 안에서 부풀어 터져버린 탐욕이 굳게 닫아 놓은 입 밖으로 기어코 샌다. 그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고개를 묻은 채 한동안 미동조차 없었다. 마침 기사들이 종종 사용하는 휴게 공간 앞을 지나가다가 그를 발견한 에브닉 셀레비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 오늘도 역시나 엄청나게 한가해 보이는구나, 제이드 라누아. 네놈의 불가사의한 일과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왕실에서는 알고 있는 건가? 국민의 혈세가 이런 놈에게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루비. 눈앞에 루비가 보였다.

 

   그거 주세요.”

   ? ! 뭐하는 짓이야!”

 

   대뜸 어기적거리며 일어난 제이드가 에브닉의 머리카락 하나를 뽑았다. 예의라고는 없이 불쑥 다가와서 한다는 짓이 멀쩡한 사람 머리카락을 쥐어 뜯는 거라니. 황당한 일을 당한 에브닉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드는 손에 쥔 에브닉의 머리카락 하나를 심드렁하게 바라본다. 너무 적은데. 자연히 나머지 붉은 머리카락에 흘깃, 매우 수상한 시선이 간다. 드디어 미쳤구나. 에브닉에게서 질렸다는 표정이 돌아왔다. 저도 모르게 제 머리 위에 손이 올라간다. 아직도 뽑힌 부분이 따끔따끔하다. 너도 갈수록 사고방식이 네 아들인가 뭔가 그 건방진 놈을 닮아가는 거냐. 주세요. 절대 안 돼! 이따위 이유로 대머리가 되는 것은 사절이다.

 

   하아아. 의미 없는 실랑이 끝에 제이드가 먼저 포기를 선언하듯 소파에 길게 누웠다. 평소처럼 느긋하게 드러누운 모습이 아니라 영락없이 뭔가에 지쳐 의욕 없이 늘어진 꼴이다. 뚱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에브닉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뭐 잘못 먹은 건 아니지. 반쯤 감겨있던 눈이 뜨이며 잠시 빙그르르 돈다. 예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로 반쯤 감긴다. 그럼 뭔데. 갖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게, 갖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저는 갖고 싶은 거 못 가지면 병나는 병이 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다. 병나는 병이라니. 어디의 돌팔이가 맘대로 붙인 게 아닌가 싶다. 어이가 없어진 에브닉은 하,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서. 네놈이 갖고 싶은 게 뭔데.”

   …… …….”

 

   웬 걸, 대답이 없었다. 직접 입으로 말해버리면 이게 더 심해져서 안 돼요.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열도 나고, 밥맛도 없어지고. 멋대로 주절대는 것만 두고 보면 여느 때만큼 멀쩡해 보였다. 에브닉은 전적으로 예의상의 조언을 툭 던졌다. 정 그러면 의무실이라도 가보던가. 자칫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정도로 무신경한 어조였지만 제이드는 그럴까요, 라며 비척비척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에브닉은 그가 지나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히죽 웃어 보인 제이드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

 

   그 순간, 에브닉은 머리를 감싸 안고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제이드 라누아이 젠장할, 그는 유유히 멀어지며 눈 깜짝할 새 주인을 잃은 붉은 머리카락 또 하나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공자님은 제게 진짜를 안 주셨으니까요. 이건 그 대신입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에브닉이 득달같이 그를 쫓아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난 네놈이 정말 싫어. 우당탕탕. 으악. 한바탕 소란이 가신 뒤에는 그 날의 가짜 은구슬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