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드] Good Afternoon
160814 Good Afternoon (with. 대너)
대너 에르하르트가 제이드 라누아를 만난 것은 다음날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 식당에서였다. 그는 분명 제 뒤로 줄줄이 달린 소문을 소거시키러 갔었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소문 하나를 더 달고 나타났다. 소문인즉 에피니치움의 모 경과 애틋한 교제를 하던 중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끝내 결별을 했다는, 참으로 비극적인 내용이었다. 그녀는 그 소문의 전말을 종자로부터 전해 듣고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껏 오해를 불식시킬만한 친절한 조언을 해주었더니 그런 식으로 전개시킬 줄이야. 그럴 듯한 해결책이 아니라 순 미봉책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 또한 일종의 해결하는 방식이라고 친다면, 그래. 쳐줄 수 있기야 하겠다― 싶었다. 대너는 그것이 그 남자 나름의 리듬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헤어지셨다면서요,”
그녀는 뻔뻔하게 말하며 콩을 철천지원수 다루듯 포크로 찍어 누르는 그의 건너편에 은제 접시를 내려놓았다. 제이드는 대답을 미루며 처참히 으깨지고 다져진 콩을 스푼으로 떴다. 입 안으로 그것을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이 영 불량하다. 꼭꼭 씹어 삼킨 뒤에야 비로소 목례가 돌아왔다. 좋은 오후이지요, 에르스트 경. 먼젓번 말에는 대답이 없다. 그녀는 우아하게 정정해주었다. 에르하르트입니다. 좋은 오후이군요, 라누아 경.
“오늘따라 우울해보이십니다.”
“어제까지 세기의 사랑을 하다 헤어졌는데 당사자라면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일이 그리 되었으니 시늉이라도 해야지요. 어쨌든―”
툭. 간발의 차이로 꿰뚫림을 면한 콩이 접시를 탈출해 테이블 위를 굴렀다.
“그러나 가엾은 콩은 잘못이 없을 텐데요.”
“사정을 알 게 뭡니까. 제 식사로 간택 받은 녀석이니 이쯤은 감수해야죠.”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에서 은은하게 백합 향이 난다. 잘 익은 고기를 나이프로 한 점 자르며 말했다. 재밌는 분이시군요. 조만간 경과 대련이라도 한 번, 그녀의 말에 그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아. 아뇨. 그런 건 거절합니다. 대화라는 평화로운 소통의 방법이 이 세상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굳이 그런. 폭력적인. 재빨리 손사래를 치자 긴 머리도 따라 춤추듯 흔들렸다. 할 수 있다면 우리 함께 비폭력을 행합시다, 에르―어쩌고 경. 대너는 찰나에 그의 손마디 곳곳에 난 흉터와 단단히 박힌 굳은살들을 포착했다. 곡선을 그리며 닫혀있던 입술이 열렸다.
“자신이 없으신가요?”
응당 기사라면 이런―
“네.”
―질문에 자존심 정도는 세웠어야, 했던 것, 아닌가. 대너는 다소 맥이 빠진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흥미를 잃은 표정을 본 제이드가 민망하게 웃는다.
“대너 경과는 이미 대련을 했었던 적이 있었지요. 기억나십니까.”
그녀는 그랬었던가― 하고 싱싱한 샐러드에 손을 뻗으려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윤기가 흐르는 옥수수 알갱이가 먹음직스러웠다. 기억을 못하시는군요. 제이드의 입매가 장난스레 올라갔다. 사실 그녀와 대련을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꽃이 여물던 지난 계절이었으니 이제 넉 달이 조금 넘었던가. 연마장 근처의 큰 나무 위에서 게으름을 봄꽃처럼 피우고 있던 제이드에게 내려와 대련을 한 번 하자며 서슴없이 당차게 제안하던 그녀의 이마에는 맑은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뭐, 물론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제안을 거절할만한 그럴듯하고 마땅한 핑계거리가 없어 어정어정 내려왔다가 한 치의 예상과 틀림없이 보기 좋게 땅에 드러누웠던 것이다.
저를 내려다보며 흰 천으로 목에 서린 땀을 닦던 그녀의 얼굴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어딘가 상쾌해 보이기도 하고, 후련해 보이기도 하던, 비온 뒤 축축하고 성근 땅을 연상케 하는 진갈색 눈동자였다. 사실 대련은 핑계이고 하필 화풀이 상대 따위에 잘못 얻어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검집에 검을 갈무리한 그녀가 수고하셨습니다. 라며 먼저 정중히 인사를 했을 때에도 제이드는 여전히 더운 바닥에 쓰러져있으면서 좀처럼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상대가 엄청나게 게으를 뿐 딱히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대너는 그렇게 그를 담백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 때 에르빗 경이 저를 아주 무자비하게 때리셨습니다.”
“에르하르트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랬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허브티가 담긴 각자의 찻잔을 여유롭게 들어올렸다.
“사과를 드릴 필요까지 있을까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엄연히 대련이었는데. 그가 덧붙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다. 묘한 대립각이 서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거울을 보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처음부터 자못 느긋하게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마주보고 서 있는 저택의 근위병들처럼, 그렇게―
“다행이군요.”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자.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제이드는 콩을 버무린 소스들로 난장판이 된 은제 접시를 들고 일어나 설핏 눈인사를 건넸다. 접시의 부도덕한 상태를 확인한 대너의 눈동자가 위 아래로 굴러간다. 그 사이 훌쩍 올라가버린 시선이 높다. 이 순간만큼은 멀리서 그녀를 시야 아래로 지켜보는 방관자였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붉은 입술을 떼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아, 조언 감사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답니다. 대신 상대에게서 산뜻한 첨언이 뒤따랐다. 뒤돌아 멀어지는 진청색 제복이 유난히 짙은 색으로 보였다. 머리에 달린 까마귀 깃도.
자리에 홀로 남겨진 그녀가 재차 느릿하게 맑은 차가 담긴 찻잔을 그러쥐었다. 서늘히 식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