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드] OR
160813 OR (with. 에브닉)
제이드 라누아를 죽인다. 아, 그래. 진작부터 그렇게 결정할 것 그랬다. 그랬으면 모든 게 순탄했을 것 아닌가. 은구슬이고 뭐고, 애초에 제비를 붉은 색으로 고르지만 않았어도― 제기랄. 에브닉은 미간을 좁히며 투덜거렸다. 결국 한바탕 거하게 전쟁을 치른 탓에 저를 따르는 이는 다행히 조용한 편이었다. 이따금 숨을 죽여 웃는 소리만 뺀다면. 크큭. …닥쳐라. 서릿발 같은 경고였다. 입가에 주먹쥔 손을 가져다 대고 웃고 있던 제이드의 어깨가 또 한 번 들썩인다. 예. 죄송합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저것은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듯 한 표정이 아닌가. 짜증이 치민 에브닉은 사납게 옷자락을 휘날리며 낡은 서재로 들어섰다. 공자님. 같이 가요.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오래된 서적들로 가득한 서재에서는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에브닉은 그 중 아무 것이나 빼내어 뒤적였다. 책의 맨 뒤에 ‘세실리아’ 라는 신원이 불분명한 여성의 이름이 덜렁 적혀 있었을 뿐 이렇다 할 내용이 전혀 없었다. 에브닉은 다소 거칠게 자신이 고른 책을 이리저리 살폈다. 뭐야. 하지만 역시나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김이 샌 얼굴로 책을 원래의 자리에 꽂아놓았다. 뭔가요. 갑자기 그가 에브닉의 어깨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채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제의 책을 멋대로 가져가 팔락팔락 넘겨본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없던 내용이 번쩍 나타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실리아. 제이드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그는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곧 손바닥에 가볍게 올라갈 만한 작은 통이 하나 등장했다. 통을 열고 킁킁, 냄새를 확인한 제이드가―이걸로 될지는 모르겠지만은요―손가락으로 꾸덕한 제형의 내용물을 푹 찍어 책에 덧바른다. 뭐 하는 거야. 에브닉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움직였다. 쉿. 이제 비밀 이야기를 기다릴 시간입니다. 제이드는 그런 에브닉을 보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놀랍게도 붉은 색 글씨가 나타났다. ‘감히 숙녀의 것을 훔쳐보다니 죽어라! 옌첸의 개자식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을지니!’ 화자의 의지가 매우 뚜렷하게 전달되는 훌륭한 문장이었다. 내용을 확인한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복잡 미묘해졌다. 책의 두께로 보아 다른 문장도 많았을 텐데 하필 골라도 또 이런 것을 골랐다. 에브닉은 경멸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것 참. 저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제이드는 억울한 표정으로 책을 돌려놓고 성큼성큼 에브닉의 뒤를 따랐다. 있잖아, 라누아 경. 너랑 있으면 예전부터 좋은 일이 단 하나도 없었어. 어떻게 생각해. 셀레비스의 공자는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처럼 딱 잘라 말했다. 참 고맙네. 저주도 받아보고. 괜찮아. 이게 다 색다른 경험이지 뭐겠어. 그 말에 제이드가 콧잔등을 민망하게 긁적였다. 아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에브닉은 흥, 하고 신경질적으로 코웃음을 치고는 다음 책장을 눈으로 훑었다. 책등에 본 책의 목적이 적히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라 내용을 보고 싶다면 직접 책을 뽑아 뒤져야만 했다. 그나저나 구슬. 구슬을 찾아야 하는데. 사람에 따라 고압적으로 느껴질 만한 시선이 제일 위로 향하자 유달리 고운 선을 그린 턱이 함께 살짝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구슬은 없을 거 같은데.”
에브닉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손끝이 책등을 스쳐 지나듯 더듬는다.
“음― 저도 동의합니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 창밖을 보았다. 반쪽짜리 투명한 달이 떠 있다. 제이드는 혹시나 책 뒤에 숨겨져 있을까 하여 잔뜩 껴안았던 책들을 한꺼번에 내려놓고 주변을 느긋하게 관찰했다. 촛불의 희미한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눈이 피곤한지 에브닉이 손등으로 눈을 잠시 비볐다. 공자님께서는 밤이 길어지는 데 익숙하지 않으시죠. 그가 어느 새 다가와 눈을 꾹 감았다가 뜨는 에브닉 옆에 섰다. 어. 에브닉은 심드렁하게 인정했다. 의외로 담백한 반응이다―놀리려는 거면 또 얻어맞을 줄 알아. 그땐 네 놈 눈에 퍼렇게 도장을―아니, 썩 담백하지는 않았다. 설마요. 제이드는 가만히 웃었다. 에브닉의 것 보다는 낮은 채도의 금빛 눈동자가 떠오른 미소 뒤로 감춰진다.
“그래도 제법 많이 찾았습니다. 보십시오. 하나, 둘, 셋… 열두 개나 됩니다.”
자, 여기요. 제이드는 구슬 하나를 에브닉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그것은 달처럼 참 은은하게 생겼다. 에브닉은 은구슬을 손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는지 미지근한 온기가 서려있었다. 누가 뺏으려고 들지도 않았을 텐데.
“얼른 있는 거 다 찾고 가자.”
“예에? 아니, 몇 개가 더 있을 줄 알고―”
제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말이 그렇다는 거지.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에브닉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물에 잔뜩 젖은 냄새가 나는 이 서재에 더 볼 일이 없다고 판단되자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끼익끼익. 맛이 갈대로 간 나무 바닥이 에브닉의 보폭에 맞추어 유난히 애처롭게 비명을 지른다. 왠지 으스스하다. 들어온 방향과 반대편으로 펼쳐진 어둑한 복도에는 양초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에브닉은 무심코 문 바로 옆의 촛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먼저 복도로 나갔다. 뭐해. 얼른 와. 아직도 서재 안에 마음이 가 있는 제이드를 재촉하며 인상을 썼다. 끼이익. 그 때 문이 저절로 닫혔다. 마지막 장면으로는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는 그를 보았다.
뭔데. 홀로 어두운 복도에 남겨진 에브닉은 찜찜한 표정으로 자연스레 서재의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하던 대로 문고리를 내리며 밀었으나 철컥, 하는 불길한 소리가 나며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응? 당혹감에 물든 눈이 커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철컥철컥. 문고리를 위로도, 아래로도 해보았으며 당겨보기도, 밀어보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뭐야. 뭔데. 사태의 파악이 완전히 끝난 순간 뒷머리가 일제히 쭈뼛 섰다. 에브닉은 문고리에서 손을 어색하게 떼어내었다. 어― 하고 형태가 갖추어진 말 대신 덜 갖춘 소리가 흘러나온다.
“…… …….”
에브닉은 그 빌어먹을 문고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똑똑,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공자님. 보이지 않는 까마귀가 말을 걸어왔다. 눈에 띄게 얼굴이 창백해진 에브닉은 머뭇거리다가 으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경직된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아. 진짜 일진도 더럽게, 망할 놈의 새끼가―라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다. 복도가 쓸데없이 음산하다. 누군가 모든 것을 엿듣고 있을 것만 같다.
“으음. 아무래도 전 갇힌 것 같네요. 이쪽에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와중에 참 태평한 소리였다. 에브닉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공자님께서는― 어쩌고 뒤로 하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아니,”
다급하게 문에 바짝 대고 소리친다.
“잠깐만! 야!”
“예?”
다행히 제이드가 문 곁으로 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에브닉은 착잡한 심정에 마른세수를 하다가 심호흡을 했다. 최대한 빠, 빨리 열어. 짜증나니까.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들리기를 빌었다. 그는 그야 저도 빨리 나가고 싶으니까요, 하며 건너편에서 뭔가 부스럭대는 기척을 냈다. 무엇을 하는 걸까.
“어, 그런데―”
“…… 응?”
에브닉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온 몸이 바짝 얼어 뻐근했다.
“지금 공자님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정적.
“닥치고 빨리 문을 열 방법을 찾아서 나와!!”
결국 검은 복도에 발끈한 고함소리가 왕왕 울렸다. 보자보자하니까 이게 누굴 멍청이로 아나. 꽝. 문을 홧김에 세게 내리쳤다. 실없는 헛소리 탓인지 졸지에 긴장이 풀린 에브닉은 한숨을 쉬었다. 식은땀에 절은 손 안에서 아까의 은구슬이 힘없이 떨어져 굴러간다. 복도 끝 그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구슬은 바닥에서 빙빙 맴을 돌았다. 저 재수 없는 자식이 나오자마자 기꺼이 한 대 쳐줄 것이다. 에브닉은 셀레비스의 이름을 걸고 굳게 결심했다. 썩은 바닥 위로 은구슬이 빛났다.
문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웃음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