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드] 홀로
160728 홀로
수장은 반드시 생포할 것이며, 수하들은 기사 개인 판단에 의한 상세 처분 내용에 상관없이 절대 도주하지 못하게 할 것. 이것이 버미어의 고귀한 왕녀이자 로열 글라디우스 기사단장의 명령이었다. 최근, 게이츠 백작령에서 일어난 반란의 배후 중 하나로 덴스 콜루베르 상단이 신중한 사전 조사와 증거 수집 끝에 최종 지목되었다. 반란군에게 반란을 부추기고 무기를 지급했다는 중대한 혐의다. 곧바로 신속히 파견이 이루어졌다. 로열 글라디우스가 도착한 동부의 자유도시 카일노스는 상단의 총본산이기도 했다.
“따로 영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엄연히 직권이 발휘되는 ‘자유도시’인데― 간도 크네.”
여기서 직권이란 왕의 것을 이른다. 제이드 라누아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기사들의 뒤를 따라 말을 타고 걷고 있었다. 서부에서 일어난 일의 배후에 동부가 있을 줄이야. 그렇게 덧붙인 기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정 모르는 이가 듣기엔 좀 위험한 발언 아닌가. 동부 전체가 아니라 덴스― 어쩌고 라는 상단 하나지. 장황한 이야기를 죽 들어주던 기사가 사족을 툭 달았다.
동부 국경지대를 담당하는 말룸 오르투스 기사단에서 사건이 벌어진 서부의 투실라고 오카수스와 로열 글라디우스 편에 정식으로 제공한 정보는 확실히 의외였다. 반란에 한 상단이 버젓이 관련되어있다니. 동부에 아무리 날고 기는 상단이 많다지만. 게다가 무기상이다. 푸르르. 발굽을 떼던 말이 투레질을 한다. 제이드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고삐를 한 손으로 틀어쥐고 하품을 했다. 언뜻 기사단의 선두를 이끌며 말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상아색 머리카락을 보았다.
졸음으로 일렁이는 시야에 임시로 쳐둔 천막이 들어왔다. 저 곳에서 정비가 끝나는 대로 진압 작전에 들어갈 것이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은 빠르게 도열한다. 그도 제법 성의껏 줄을 맞춰 섰다. 수장은 반드시 생포할 것이며, 수하들은 기사 개인 판단에 의한 상세 처분 내용에 상관없이 절대 도주하지 못하게 할 것. 다시 한 번 지엄한 명령이 내려졌다. 짧은 연설은 힘차고 당당하다. 버미어의 이름으로. 이 무거운 문장은 때를 놓쳐 합창하지 못했다. ―르으음으로. 대신에 그럭저럭 편승한다. 옆에 선 기사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가능한 한 피해 왔음은 사실이다. 심장에 단검을 꽂는 것보다 넘어뜨린 후 기절시키는 방식을 더 선호했고, 더 나아가서는, 은신하고 도주하는 것을 택했다. 스스로 검술에 재능과 뜻이 없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제 몸 하나를 지키는 법은 잘 알고 있다. 지킨다는 것은, 관점을 바꾸면 지킬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새빨갛게 물든 손을 들여다보았다. 찔러오는 검을 무심코 손으로 붙잡은 터라 큼직한 자상이 났다. 끈적끈적하고 화끈거린다. 딱히 감흥은 없다. 제복에 대충 문질러 닦는다.
어쩌다 아수라장의 한복판에 서 있다. 허겁지겁 도망가려는 이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쿵. 주군의 말을 따른다. 그러나 뒤처리는 다른 이가 해야 했다. 이봐. 제스. 장난인 줄 알아? 지친 동료 기사가 그를 보며 씨근거린다. 아뇨. 그럴 리가요. 특유의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 그가 말버릇처럼 달고 사는 문장이다. 그럴 리가요, 라니. 참, 간단히 맥을 끊는 재주가 있는 문장이었다. 짜증이 치밀어 무어라 악을 지르는 동료에게 가벼이 손을 흔든다. 손이 붉다.
걸쭉하게 맺힌 핏방울이 중지 끝에서 뚝, 뚝, 낙하했다. 푸른 제복을 입은 자들 중에 다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들 걸출한 실력의 귀족 자제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새것처럼 번쩍이는 무구들을 착용한 상단 용병들이 저들의 본진에서 또 한 번 출두했다. 아마 저 것, 반란군에게 보내려던 물건들이겠지. 이미 세 무리를 진압하고 대부분을 체포한 상태다. 대체 이놈들은 언제까지 오는 거야. 누군가 투덜댔다. 여기저기서 작은 한숨으로 동의한다.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무료한 표정으로 그들 중에 섞여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동부의 공기가 낯설어서일까. 제이드는 선뜻 무어라 말이 없었다.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편으로 다행이다. 아니면 그가 침묵을 지키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경박한 언사도 장난스러운 행동도 찾을 수 없다. 잠잠했다. 덕분이랄지, 상황은 막힘없이 마무리 되어 간다. 네 번째 용병 무리가 무릎을 꿇었다. 몇몇은 때 이른 자비를 부르짖었다. 물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스승님.”
그가 돌아보았다. 이끼를 연상시키는 짙은 녹색의 눈이 느릿하게 끔벅인다. 슈텔 경. 친절한 미소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하실 말씀이라도. 그녀가 그의 손을 가리킨다. 피가 납니다. 그는 말했다. 괜찮습니다. 곧 멈출 테니까,
“제가 보기엔 파상풍이나 과다출혈, 둘 중 하나로 돌아가실 텐데요…?”
무시무시한 예언이었다.
“어, 그 만큼은 아니― 으악!”
불쑥 등장한 다른 손이 그의 상처에 물을 예고 없이 쏟아 부었다. 깨끗한 물이다. 순식간에 왼쪽 다리 전체가 젖어버린 그가 깜짝 놀라 반 보 뒷걸음질을 했다. 뭡니까. 엉성한 자세로 묻는다. 소독을 해야죠. 어느 새 다가온 비비안 드헤셀이 딱 입매 정도만 당겨 웃는다. 제가 아는 라누아 경은 억지를 부리는 분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피엔디라 경 말을 참고하는 게 어떨까요. 제이드는 피얼룩이 조금 가신 제 손을 흘끔 보다가 슈텔 피엔디라가 건네는 하얀 천을 받아 감쌌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멀어지며 말했다. 늦기 전에 정식으로 치료 받는 거 잊지 마세요, 스승님.
“오늘 좀 이상하네요. 라누아 경.”
그런가요. 비비안이 슈텔의 뒤를 따르기 전 어깨를 두드린다.
“…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독 날씨가 좋으니까.”
다시 혼자 남은 제이드 라누아가 듣는 이 없는, 꽤 늦은 대꾸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