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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 춤추는 미스터 귤상자

IllillIll 2018. 1. 28. 19:03

160724 춤추는 미스터 귤상자 (with. 그리젤다)

 

 


   밤 하늘에 뜬 별의 색이 짙다. 그리젤다 마레의 눈을 닮은 별이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그 현명한 빛을 볼 수 있는, 운 좋은 이들의 수는 줄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빛이 반감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았다. 덥구나. 실크 장갑이 감싼 손으로 부채질을 한다. 자수가 수놓아진 레이스 가면 사이로 보이는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더듬더듬 손을 등 뒤로 뻗어 복잡하게 얽혀 묶인 스트랩을 쓰다듬어본다. 으음. 이거 풀리는 건 아니겠지. 좀처럼 화려한 옷을 선호하지 않는 그녀의 성정을 익히 아는 그녀의 오빠가 기사들을 치하하는 가면무도회가 열린다는 말에 아내의 것을 빌려 덥석 입힌 옷이었다. 반짝이는 드레스는 가면과 꼭 어울리는 한 쌍인 것처럼 금빛을 두르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진짜로 드레스가 확연히 돋보이는 탓인지가는 곳마다 온통 시선이 집중되는 느낌이라 상황에 익숙지 않은 마음이 어지럽다.

 

   “…… 정말.”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한 마디를 뱉었다. 입술이 일자로 다물린다. 슬슬 허리도 아프고 발도 아프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이 주목받은 이유는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뒤뚱거리는 걸음 때문이리라. 소녀들이 돌려 읽는 책이나 재잘대는 이야기에 가끔 등장하는 어설픈 여성. 그게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실과 부풀어 각색된 상상은 다르다. 그런 이야기에는 대개 멋진 파트너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곳은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가면을 쓴 자들이 하루 동안 모여 춤추는 장이다. 설사 기적적으로 등장할지라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

 

   조금이나마 이 답답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목을 축일 생각으로 뒷걸음질을 하던 차였다. 드레스가 뒤로 길게 늘어진 디자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걷는 순간 중심을 잃었다. 복장이 평범했다면 문제가 아니었을 테지만 오늘은 다르다. 한적한 테라스라 하여도 어딘가 분명히 보는 눈은 있을 것이고이대로 벌렁 넘어지는 수치를 당해야겠지. 벌써부터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눈을 꾹 감았다. 하필 이런 날에! 어설프게 허공을 헤집는 스스로의 팔이 측은했다. 으읏.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염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를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부축해준 덕이다.

 

   감사합니경황없는 중에 무턱대고 감사인사를 하려던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친 사람은, 그녀의 유려한 등에 맺어진 매듭에도 손길을 가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돌아보았다. 무슨. 또 한 번 말이 끊어졌다. 상식과 다소 거리가 있는 장면이다. 그는 가면이 아니라 상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귤 상자를. ‘남부 산 맛 좋은 귤’. 와중에 황망히 문장을 읽었다. 고운 입술을 달싹인 그녀의 어깨가 한숨과 함께 축 처진다. 하아.

 

   “제스그렇게 하면, 누구나 놀라잖아.”

 

   그녀는 원망 섞인 푸념을 하며 그가 편히 매듭을 만질 수 있게 돌아주었다. 귤 상자를 뒤집어 쓴 그의 손이 능숙하게 느슨해진 드레스 스트랩을 고쳐 맨다. 이제 그녀가 안심하고 춤을 추어도 될 만큼 든든하다. 손이 떨어지자 그녀가 귤 상자를 마주보았다. 망설임 없이 찌그러진 귤 상자를 벗긴다. 이건 또 어디서 구한거니? 그녀가 가볍게 책망했다. 상자 안에서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나 싱긋 웃는다.

 

   “짜잔. 즐거운 밤이지요, 선생님.”

 

   그녀가 짧게 쿡, 웃었다. 선생님은 무슨. 뺨이 발갛게 물든다.

 

   “혼자 계셨습니까?”

   “. 그나저나 제이드 경께선 왜 이런 걸 쓰고 돌아다니신 걸까요?”

 

   임시로 품에 안은 귤 상자를 턱짓했다. 글쎄요. 그리젤다 경. 그건 비밀이라. 그의 입술에 검지가 닿는다. . 그리젤다는 그에게 상자를 돌려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서운하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비밀이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발소리 없이 걸어 건네받은 상자를 테라스 한 구석에 내려두었다. 그런가요. 눈매가 가늘게 휜 틈 사이로 그녀의 드레스와 같은 색의 눈동자 한 쌍이 보였다.

 

   “정말 놀랐다니까.”

 

   그녀가 제 허리에 양 손을 얹고 짐짓 강조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와 손등에 정중히 입맞춤을 한다. 그러니 부디, 제게 경께 진심어린 사과를 드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그녀가 밤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웃는다. 지금 춤 신청을 하시는 건가요, 제이드 경? 그리젤다는 장난스레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여느 때처럼 웃었다. 손끝을 가벼이 잡은 다른 손이 뜨겁다. 새삼 어렴풋한 과거 속의 소년이 정말로 꽤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기억이 속삭이는 소리에 답했다. . 기꺼이.

 

   여름 밤, 음악이 흐른다. 저마다 즐기는 방식은 달랐지만 쫓는 것은 전부 같다. 신기루 같은 한여름 밤의 꿈. 내일이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시간의 틀 안에서 저마다 춤을 춘다. 금빛의 드레스가 물결쳤다. 꽤 하시는 것 같습니다. .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요. 걷는 건 그렇게, 그리젤다는 부러 그의 발을 꾹 밟았다. 아야. 허리를 감싼 손이 움찔거렸다. 사탕 안 줄 거야. 사탕을 운운할만한 시기는 두 사람 다 지났으나 아직까지 경고를 하기엔 충분했다. . 그건 싫은데. 눈동자를 굴리던 제이드가 불쑥 거리를 좁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도와드린 거칭찬해 주십시오.”

 

   다시 그가 우아하게 멀어진다. 그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선심 쓰듯 답한다. 음악에 맞춰 한 바퀴를 돌았다. 좋아. 대신 사탕은 딱 하나만, 입니다. 제이드 경.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즐겁다. 오늘 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