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드] 결성! 흑염소단
160720 결성! 흑염소단 (with. 클로비스)
명백하게 늦은 시간이었다. 뒷골목이라는 특성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그곳은 적절치 못할 만큼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특히나 일국의 왕자가 호위 하나 없이 돌아다니기에 환경이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클로비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편에 속했다. 오늘은 조용한 걸.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왕자 중 하나가 가끔씩 왕궁의 담을 넘어 취객만을 골라 습격하더라는 정체불명의 소문이 알음알음 나돌았다. 물론 늘 그렇듯이 소문과 실상은 차이가 있다. 그들은 고상하게 ‘취객’ 이라고 칭해지기에 민망하기 그지없이 주사가 아주 고약한 주정뱅이였을 뿐이고, 더해 왕자는 자신과 마주친 그 운 없는 주정뱅이가 취중에 혹여 험한 사고라도 당할까 술이 깨기를 바라며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뿐이다. 다시 말해 습격 따위가 아니라 버미어의 고매하신 왕자께서 백성을 친히 굽어 살피시는 고급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흐릿한 달빛은 어둠이 내린 길을 밝히는 유일한 광원이었다. 둥근 달에 달무리가 생겨 있었다. 머지않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바닥에 깔린 검은 돌들이 습기를 머금어 매끈했다. 얇은 후드를 챙겨 왔으니 머리가 젖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옷이 축축해짐에 따라 생기는 불쾌감과는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에 가급적 볼 일만 보고 얼른 돌아가야 했다. 원래의 예정대로 용건이 있었던 곳에 들러 일의 매듭을 짓는 데 까지는 차질이 없었으나 이렇게 되면 결국 오늘의 밀행은 겨우 반쪽짜리였다. 쯧, 하고 불만스레 혀를 찼다. 그 때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는 아니었고,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악. 악. 아악. 살려주십시오. 클로비스는 선뜻 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무리의 건달들을 포착했다. 마침 한 사람을 둘러싸고 신나게 두들겨 패고 있는 모양이었다. 피해 남성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왜 이러십니까아. 아마 클로비스가 도착하기 전에도 몇 번인가 진득하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우리가 기분이 좋아서 좀 맞아줘야겠다. 안 그래도 오늘 돈 많은 영감 하나를 털었더니 수완이 좋거든. 기분이 더러워서, 라면 모를까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건달들이 낄낄대며 짓밟았다. 싫으면 너도 있는 걸 내놓던가. 말 그대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심히 눈물 나는 장면이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여태껏 짓밟혀 엎드러져있다가 버둥버둥 일어나 옷자락을 붙잡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연신 비벼대는 손에서 불이 치솟는 게 아닌가 염려될 정도였다. 못 볼 꼴을 본 기분이라 눈을 찌푸렸다.
클로비스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렸다. 운명처럼 금이 간 술병이 떨어져있었다. 그것을 주워 서슴없이 던졌다. 밤송이를 닮은 뒤통수를 향해서. 신중하게 고를 것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저 사람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이 확실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옆으로 두 배, 위로 두 배 컸으니까.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누그으으으. 갑작스런 충격에 냉큼 뒤돌아보려던 건달이 말을 못 다한 채 눈을 뒤집고 쓰러졌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던 자들이 형님! 하고 외치며 서둘러 부축했다. 이마에서 피가 과할 정도로 철철 흐르고 있었다. 건달 무리가 겁을 먹고 힉힉 숨을 들이켰다. 소란 통에 슬그머니 일어난 가련한 피해 남성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나는 너희랑 다르게 오늘 기분이 더럽거든. 그래서 좀 맞아줘야겠다.”
클로비스가 신랄하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울컥한 건달들이 무어라 우기려던 차에 철컥, 하고 검이 검집에서 들리는 금속음이 났다. 지레 겁을 집어먹은 무리가 저들의 형님을 들쳐 업고 사방팔방으로 파리 떼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으아악. 보기보다 싱거운 마무리였다. 요즘 것들은 페이퍼 나이프도 들고 다니지 않는 건가. 무리의 힘만 믿고 설치는 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먹으로 모든 걸 말하는 천상 사나이들인가.
어쨌거나 클로비스는 홀로 남아 주섬주섬 일어나는 피해 남성에게 다가갔다. 로브인지 그냥 천인지 푸대자루인지 온통 새카만 것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가뜩이나 달빛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데 도저히 자세한 모습을 알아 볼 길이 없었다. 다만 키가 클로비스보다는 확실히 컸다. 괜찮은가? 어쨌든 방금까지 흠씬 두들겨 맞은 사람에게 안부 정도는 물어봐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이씨…….”
에이씨? 돌아온 것은 상당히 온갖 불만에 찬 대꾸였다. 예상을 저만치 벗어난 반응이다. 클로비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척비척 일어난 피해 남성은 고개를 다시 숙여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마저 주웠다. 자세히 보니 죄다 빛나는 것들이다. 순간, 건달들이 오늘 운 좋게 돈 많은 영감을 털었다고 주장한 사실이 짧게 머릿속을 스쳤다.
“거 남의 사업 함부로 방해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방금 전 까지 몹시 나약하고 섬약하며 가엾고 선량하고 딱했던 피해 남성 및 왕자가 돌봐야 마땅했던 미욱한 백성은 혈기왕성하게 일침을 가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몸을 칭칭 두른 것 안에서 절그럭절그럭 무게감이 느껴지는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설마. 클로비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짐작이 맞다면 진정한 피해자는 엉뚱한 데 있었다. 지금쯤 누군가 거하게 선사한 술병 덕에 이승과 저승을 마음껏 오락가락하고 있을 것이다.
불쌍한 건달들이 자신들의 소중한 형님을 위해 지불할 몇 푼 안 되는 약값과 진료비마저 함께 저 사악한 무저갱 안으로 모조리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소름끼치는 생각에 뒤늦게 검을 뽑아 쫓았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
“그 놈은 맞아 죽었어야 했다.”
클로비스 애셔 버미어는 단언했다.
“아 예에…… 그렇습니까.”
제이드 라누아는 최선을 다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라니. 지금 내 판단이 과하다는 것이냐. 그 놈은 저질 사기 행각에, 절도에, 무엇보다 은혜를 모르는 최흉최악의 범죄자다. 당장 찾아내 눈앞에서 찢어죽여도 성에 차지 않아.”
서늘한 보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퍽.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자 뜯긴 풀들이 들썩인다. 멀쩡히 산책을 나가던 참에 얼떨결에 붙잡혀 나란히 풀밭에 주저앉아 일방적으로 왕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 제이드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힘을 준 뺨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뭐, 그 사람에게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말끝을 흐렸다. 사정 좋아하네. 이번에는 클로비스가 싱긋 웃었다. 내 약속하지. 수일 내로 그 자식을 잡아다가 목을 뽑아버리겠다. 그 누구도 아닌 일국의 왕자의 입에서 직접 나왔으니 실로 무시무시한 선언이다. 그러나 굳이, 이렇게, 지나가던 사람을, 아무나 붙들고, 대뜸 머리를 수거하겠다는 약속을 잡을 필요까지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음― 그래도 말입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자아, 생각을 달리 해보면―”
“있지. 라누아 경. 아까부터 묘하게 계속 그 놈 편을 드는 것 같다?”
더욱이 문제는 지금 이런 이야기들이 당사자 앞에서 버젓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에이, 그럴 리가요. 악.”
못마땅한 클로비스가 제이드의 긴 머리카락을 콱 잡아당겼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울상을 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제, 왕자가 정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당시에는 그저 일련의 ‘사업’ 혹은 ‘작업’을 하는 데 열중했다. 공갈협박꾼들을 역으로 터는 일 말이다. 나쁜 놈을 응징하고, 돈도 챙기고. 꿩도 먹고 알도 먹고.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일인가. 필시 그 돈 많은 영감도 건달들보다는 왕실 기사단 소속의 가난한 기사에게 적선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즉, 제이드 역시 클로비스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게 앞으로 펼쳐질 모든 불행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런데 저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하셔도 되는 겁니까? 전하.”
“뭐를?”
“그러니까, 밤에 몰래 나가신다거나…….”
나뭇잎 사이로 싱그러운 바람이 불었다. 덜 익은 풀냄새가 났다.
“괜찮아. 그 땐 너무 염려치 말거라. 내가 누님께 직접 잘 말씀 드릴 테니.”
무얼요. 로열 글라디우스 소속 기사 중 하나의 행방? 아니면 생사여부? 그 말이 턱밑에서 맴돌았으나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연신 비명을 지르다 쓰러졌다. 제이드는 오랜만에 진정한 두통을 느꼈다. 이거 다음 훈련에는 반드시 빠져야겠군.
*
날이 바뀌었으나 클로비스의 기분은 또다시 하한가를 기록하며 폭락했다. 도무지 단서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괘씸해서라도 무리라는 결론은 내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날이 맑았다. 함박만한 달이 검은 하늘에 둥실 떠올랐다. 구름 하나 없었다. 뒤로 늘어진 그림자가 길다. 그만큼 달이 밝았다.
클로비스 왕자는 그날, 그 자리에 돌아와있었다. 딱히 그 사건 때문은 아니다. 나름대로 들러야 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기에 돌아왔다. 손아귀에 쥔 작은 반지를 매만졌다. 반지는 잠깐 사이 체온으로 인해 따뜻했다. 이 근처에서 세공을 하는 유명 장인에게 비밀리에 의뢰를 맡긴 것이다. 정식으로 의뢰를 맡기자면 절차가 복잡하다. 불필요한 부산을 떨고 싶지 않았으므로 가명까지 써가며 반지를 얻어왔다. 그래서 그만한 가치가 있었느냐면, 결과물은 꽤 괜찮았다. 하지만 기분을 상승시킬만한 거리는 되지 못했다.
얼마간 더 걸어 공터에 도착하였다. 누군가를 떠올리고 새삼 주먹이 쥐어졌다. 감히 왕족을 능멸한 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물론 그 쪽이 이쪽을 왕자라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나 클로비스는 너무나 당연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알게 뭐람. 보통의 사람들은 왕궁의 왕자가 월담을 하여 뒷골목에 놀러올 것이라는 상상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 몽둥이찜질을 친히 해주어야겠다. 그리 결심을 하자 만면에 꽃다운 미소가 피었다.
아무튼 주머니를 뒤져 나온 종이에 임시방편으로 반지를 싸던 차였다. 하나 남은 케이스가 도착하기 직전 깨져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클로비스는 투덜거렸다. 돌연 클로비스의 자줏빛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몇 십 걸음 앞선 골목을 이제 막 돌아 사라진 수상한 무언가를 포착했다. 저 놈은. 과연 익숙한 뒤태에 고민하지 않고 득달같이 달렸다.
“거기 서라 이노오오옴!!”
우렁찬 고함이 뒷골목을 왕왕 때렸다. 졸지에 흠칫 놀란 검은 인영이 헐레벌떡 뛰기 시작했다. 어쩌다 휩쓸려 덩달아 뛰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열심히 속력을 내고 있었다. 이 순간 분노한 클로비스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죽어라! 미래를 한참이나 건너 뛴 결론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굉장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잠시 우왕좌왕 대던 거대한 검은 인영 덩어리가 벽을 향해 훌쩍 뛰기 전 까지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게 부풀려진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인영은 벽을 기어올랐다. 왕자는 저도 모르게 허, 하고 짧게 감탄했다.
“이 자식!”
몸을 둥글게 칭칭 감은 검은 것을 우악스레 당겼다. 하마터면 놓칠 뻔 한 것을 간신히 잡아 챈 것이다. 으아아. 대번에 무게가 반대로 쏠렸다. 클로비스는 쓰러지는 덩어리를 피해 재빨리 몸을 뺐다. 엄청난 금속제 굉음이 났다. 귀를 급히 틀어막았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었던 검은 천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무수한 것들이 탈출해 쏟아졌다. 은촛대. 은술잔. 포크, 스푼, 나이프 따위의 금식기들. 고급스런 재질의 테이블보. 접이식 테이블. 원목 의자 두 개. 의자? 의자는 또 뭐야. 용도를 떠나 저것들을 대체 어떻게 다 들고 다녔던 걸까. 데구르르. 마지막으로 부엌에 있는 하인을 부를 법한 종이 떨어져나왔다. 이 자리에서 즉시 테이블 세팅을 해도 모자랄 것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클로비스는 이 자의 거대함을 이루고 있었던 구성 요소에서 신경을 끄고 어쨌든 정체 파악을 위해 자비 없이 천을 빼앗았다. 기어코 훤한 달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너. 왕자의 시선이 선득하게 그를 찔렀다. 아는 얼굴이었다. 제이드 라누아. 그가 민망하게 웃으며 흉흉한 분위기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왕자 전하. 하하하. 좋은 밤입니다. 클로비스가 싱긋, 따라 웃었다. 경은 현장검거로 공개 처형이다. 그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선뜻 이렇다 할 빠져나갈 구석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떡하지,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던 그가 무심코 뭔가를 가리켰다. 자연히 클로비스의 고개도 그 쪽으로 돌아갔다.
“어어― 저것, 왕자 전하의 것이 아닙니까?”
아차. 반사적으로 품을 뒤졌다. 당연하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망연히 저 멀리 굴러가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워낙 가벼운 물건인지라 쓰러지는 것을 피하다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종이가 황량한 밤바람에 홀로 날아가고 있었다. 클로비스는 서둘러 반지를 주우러 몸을 돌렸다. 경은 거기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 혹시 모를 도주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명령도 잊지 않았다. 도망이라도 갔다간― 위협적으로 검지를 세워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하. 하. 어떻게든 이 상황을 웃어넘기려고 애쓰던 제이드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어, 어! 전하! 먹는다! 그가 드디어 돌았다는 생각에 클로비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뭘 먹어? 그러자 그가 마구 저편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아니요! 저거! 반지 말입니다!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휙 돌렸다.
염소. 염소였다. 뜬금없이 시커먼 염소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반지를 훌러덩 삼켜버렸다. 아니, 아주 뜬금없는 것 까지는 아니었다. 반지가 하필 내리막을 타고 염소를 가둬둔 간이 울타리 안으로 굴러간 탓이다. 따라서 염소의 출연은 지극히 예정된 것이었다. 클로비스는 우두커니 멈춰 서서 그 기막힌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제이드 역시 할 말을 잃고 왕자의 눈치를 보았다.
“…… 라누아 경. 내가 긴히 시킬 일이 있다.”
제이드는 여태껏 몸을 돌리지 않고 넋 나간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왕자가 불안했다.
“저 염소를 확보하게.”
“예?”
지금 염소를 훔치란 말씀이십니까. 저더러 도적질을 하라 명하시는. 그가 되물었다. 새삼스레 뭘 묻기까지 하냐는 듯 왕자가 돌아보았다. 절대 훔치라는 게 아니야. 확보지. 그게 그 말 아닙니까. 작은 반발이 뒤따랐다. 진작에 신뢰를 잃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더한 일도 많이 하지 않았나. 여기서 염소 한 마리 더 훔친다고 떨어진 목을 차거나 하지는 않네.”
“왜 제 목이 이미 떨어진 것처럼 말씀을…….”
마음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일어난 제이드가 엉거주춤 염소우리로 다가갔다. 클로비스는 한 걸음 물러나 주변을 살폈다. 역시 결론은 훔치는 거였다. 확보는 무슨 개뿔이 확보. 아무 것도 모르는 불쌍한 염소는 순진하게 여물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자아. 착하지. 우선 염소를 어르고 달랬다. 말을 훔쳐서 타고 달아난 적은 있지만 살아있는 염소를 끌고 가본 적은 없어 내심 불안했다. 그러나 염소에게 애타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었다.
클로비스는 뜸만 들이는 제이드가 답답해 채근했다. 얼른 데리고 나와라. 그는 염소의 목에 묶인 줄을 풀었다.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주인에게 말하면― 염소의 뿔을 단단히 붙잡았다. 뭐라고 말할 건데.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봐, 댁의 염소가 나의 반지를 먹었으니 배를 갈라야하겠다?
“아니 뭐… 굳이…… 다른 평화로운 방법도…… 밥을 많이 먹여서―”
“기각.”
하여간 한밤중에 기사 하나와 왕자 하나가 난데없이 남의 집 염소를 훔치는 광경은 보기 드문 흉한 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이드가 그것을 어깨에 들쳐 메는 데 성공했다. 어찌나 힘이 센지 꽉 붙들지 않으면 금방 떨어뜨릴 것 같았다. 매우 뿌듯한 얼굴로 클로비스를 돌아보았다. 이것 보십시오, 전하! 명에 따라 염소를 확보했나이다. 정작 명령을 내린 왕자는 명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한 기사가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은 이 일에 해당이 전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 잘했다. 심드렁한 대꾸로 응답했다.
꾸에에에엑. 순간, 잡은 것은 분명히 염소일 텐데 왠지 돼지 멱을 따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안위에 전에 없이 심각한 문제가, 꾸에엑, 생겼다고 결론을 내린 염소가 마구 울부짖기 시작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크게 당황했다. 아니, 잠깐만. 우린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제이드가 먼저 설득을 시도했다. 알아듣겠냐고! 클로비스는 즉각 면박을 주었다. 꾸에엑. 염소는 주인을 부르짖었다. 그 처절한 염소 울음소리에 응답한 주인이 부지깽이를 들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누구냐!!”
때마침 한 명은 밀행, 한 명은 기밀사업이 본래의 목적이었기에 복장만큼은 온통 검은색 일색으로 기가 막히게 수상했다. 염소 주인은 끝이 벌겋게 달아오른 부지깽이를 크게 휘둘렀다.
“저― 저희는……”
먼저 제이드가 무작정 입을 열었다. 붙잡힌 염소가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염소의 존엄과 기품, 기본권을 보장하고 수호하는…… 흐, 흑염소단입니다.”
클로비스는 제이드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나는 선량한 피해자다.”
그리고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였다. 최대한 선량하게 보이기 위해 가슴에 손까지 얹었다.
“흑염소단은 내가 아니라 바로 이 놈이다. 이놈이 자네의 소중한 염소를 훔치려고―”
“이미 늦었습니다! 두목! 뜁시다!!”
“이 놈이 미쳤나!!”
순식간에 흑염소단이라는 근본 없는 집단의 수장으로 클로비스를 옹립하는 데 성공한 제이드는 확실히 저에게 튄 물을 사방에 뒤집어씌우는 것에 일가견이 있었다. 저 놈들 잡아라. 머리가 짧은 쪽이 두목이다. 염소 주인의 목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어쩌다 부지깽이를 피해 함께 밤을 질주하게 된 왕자는 참다 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흑염소단 따위의 그것이 되어야 하는 거냐!!”
“그럼 두령 쪽이 마음에 드십니까, 전하? 악!”
제이드의 머리채가 다시 한 번 콱 잡아당겨졌음은 불가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