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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 도련님

IllillIll 2018. 1. 28. 18:50

160715 도련님

 

 

   ― 나 배고파.

 

   저녁 준비를 위해 당근을 썰고 있던 젊은 하녀는 느릿하게 칼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부엌 문간에 작은 소년이 서 있었다. 손톱이 몇 개인가 깨지고 빠진 손으로 벽을 짚은 채 한 쌍의 눈동자가 대답 없는 하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젖은 손을 에이프런에 문질러 닦았다. 식사 시간은 아직 멀었답니다. 반쯤 감긴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조금 더 기다리셔요. 하녀는 다시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하인들이 쓰는 벽시계에 흘끔 눈이 갔다. 양파도, 감자도 주인마님들 수에 맞추어 손질해야하니 정각에 식사를 내려면 어서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칼질을 하는 하녀의 손길은 지극히 권태로웠다. 스걱, 스걱, 스걱. 당근을 응시하는 시야 옆으로 잘 묶어두었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아무거나 괜찮아. 먹을 거 줘.

 

   조금 더디게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얄팍한 발소리를 듣고 나서야 소년이 흙투성이 맨발임을 알았다. 또 절뚝거리는 것으로 보아 어디선가 발목을 접질린 것 같았다. 그런 더러운 발로 부엌을 더럽히지 말아주셔요. 단조로운 목소리다. 하녀는 당근을 자르던 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소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해. 그리고 머뭇대다가 반대쪽 다리에 새카만 발바닥을 문질렀다. 하녀는 이미 부엌 바닥에 찍혀버린 발자국을 무시했다. 이윽고 갈퀴처럼 가늘고 마른 손이 찬장을 쓸었다. 아침에 먹고 남은 딱딱한 빵 몇 개와 치즈 반 덩이가 천에 싸여 나왔다. 나무 그릇 반에 빵을 담아 먼저 빈 조리대 위에 두었다. 그리고 새 칼을 들어 노량으로 치즈를 자른다. 그 사이 참지 못한 손이 빵 하나를 덥석 집었다. 곧장 적은 입 안으로 쑤셔 넣는다. 빵은 무척 질겼다. 바닷물에 절여진 밧줄 냄새가 났다. 그러나 소년은 빵을 뜯고, 뜯고, 또 뜯어 먹어 양 볼을 불룩하게 만들고 부지런히 우물거렸다. 얼마 못가 이가 얼얼하고 아팠다.

 

   식사를 할 때는 식사 예절을 지켜주셔요.

 

   하녀는 잘린 치즈조각들로 나무 그릇의 절반을 채웠다. 충고를 경시하고 치즈 조각을 허겁지겁 집는 손가락은 거무튀튀한 피얼룩이 물들어 있었다. 컵 하나를 대충 닦아 식은 우유를 따라주었더니 곧잘 마신다. 입술 위에 흰 수염을 만들며 우유를 마시는 소년의 긴 검은 머리가 마구 엉켜있었다. 늘 애정 어린 빗질로 잘 빗겨있다가도 이따금 저런 모습이다. 하녀는 한동안 무심한 표정으로 소년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깨끗한 천을 미지근한 물에 적셔 짰다. 줘 보셔요. 하녀가 빵을 집으려던 소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찰싹. 그것을 뒤늦게 쳐낸 소년은 말했다. 함부로 손대지 마. 감히 하녀 따위가. 거절당한 하녀는 거리낌 없이 생각했다. 어딘가 어색한 말투였다. 연습. 그래. 실제로 누군가를 향해 말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며 기껏해야 혼자서 연습 몇 번 해본, 힘없고 형편없는 솜씨다. 하녀는 좀 더 강하게 소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빛바랜 금화 두 닢을 닮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부푼다.

 

   손이 더러워요.

 

   으악. . 젖은 천이 더러운 손을 문질렀다. 소년이 아릿한 통증에 신음했다. 하얀 천에 검붉은 것들이 그을음처럼 묻어나왔다. 하녀는 딱지가 앉고 망가진 소년의 손가락들을 꼼꼼히 닦았다. 하얀 천이 금세 더러워졌다. 두어 번 더 빨아 멍든 발을 씻겼고 새 천을 가져다 적셔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파. 얼굴에 난 긁힌 상처를 닦는 도중 하녀와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하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상처라는 게 원래 다 그래요. 그러니 몸을 조심히 다루셔요.

 

   창문으로 방에서 빠져나오려다가 떨어졌어.

 

   그런가요. 하녀는 대꾸했다. 소년이 발을 절던 것이 기억났다.

 

   할머니가 잊어버리신 것 같아그저께 잔뜩 혼나고 방에 갇혔는데.

   제법 큰 잘못을 하시었나봐요.

   아냐! 그냥내가 옷 단추를 잘못 끼워서…….

 

   소년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엉망이 된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하녀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리자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하녀는 소년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떼 주었다. 단추를 잘못 끼운 건 큰 잘못이어요, 도련님. 칠칠치 못하게. 소년이 우울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하녀는 웃었다. 눈높이에 맞춰 숙였던 고개를 들고 남아있던 마지막 치즈조각 하나를 집어 소년에게 들려주었다. 소년은 치즈를 다 먹고 나서도 하녀가 당근을 손질하는 옆을 지켰다.

 

   ,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이 뭐 중요한가요. 도련님과 제가 도련님과 하녀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비틀어져 쓸 수 없는 당근은 화덕불에 던져버렸다. 하녀는 토막 낸 당근 조각들을 바구니에 모조리 쏟아 부었다. 귀찮게 굴던 소년이 따끔거리는 제 손가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소년을 지나쳐 감자가 담긴 자루를 헤치고 감자들을 한 아름 꺼냈다. 어느 날 집 안에 날아든 까마귀처럼 검고 시끄러운 도련님. 지금은 저렇게 탐욕스레 꾸역꾸역 움켜쥐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무게를 못 이기고 날개가 부러져 추락하고 말 것이다. 본래 제 것도 아닌 주제에 가지고 있었으니 가진 것을 다 뺏기겠지. 원하던 것은 다 물거품이 되겠지. 다들 그렇게 말했다. 하녀는 그 말을 믿었다. 동시에 믿지 않았다.

 

   철썩 같이 믿기에는, 그 때는 도련님이 아직 어렸다. 하녀의 희미한 기억이 흩어졌다.

 

   하녀가 어렸을 적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황금 항아리라는 동화가 있었다. 동화에 따르면 황금이 언제나 흘러넘치는 항아리가 어느 운 좋은 미망인의 집에 굴러 들어왔다고 한다. 욕심이 없었던 미망인은 항아리 주변에 떨어진 황금들만을 주워 썼다. 그러다 황금 항아리의 소문을 들은 욕심 많은 이웃 남자가 미망인의 항아리를 훔쳤다고 한다. 남자는 항아리 안에 든 황금을 모조리 꺼내기 위해 항아리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갑자기 항아리의 입구가 좁아져 손을 뺄 수 없게 되었다. 깨뜨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항아리는 깨지지 않았다. 결국 욕심 많은 이웃 남자는 평생 좁아터진 항아리에 손을 넣은 채 살아야 했다는, 흔한 이야기다. 하녀는 말했다. 도련님도 그렇게 되실 거여요. 그깟 욕심 때문에 항아리를 탐냈고, 항아리에 손을 넣어버렸으니 이젠 절대로 뺄 수 없을 거여요. 한 손에 항아리를 달고 사셔야겠지요. 동화 속 얼간이처럼.

 

   “깨뜨리면 되지.”

   “…… 그 항아리는깨지지 않아요.”

 

   하녀의 목을 움켜진 큰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하녀를 장난스레 책망했다. 부엌 벽에 짓눌려진 하녀는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발이 공중에서 볼품없이 바르작거렸다. 괴로워 떨리는 손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켁켁, 기침이 자꾸만 나왔다. 잘 빗긴 머리 뒤로 까마귀 깃털이 두어 개가 흔들렸다.

 

   “그리고 원래 다 내 거였잖아. 욕심이랄 게 있나.”

 

   내가 이 저택에 도착한 그 날부터. 그가 속삭였다. 저택도, 재물도, 목장도, 하인도, 당신도 내 거니까 지금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지. 필사적으로 버둥대는 하녀의 주름진 입가에 맑은 침이 고였다. 눈에 서려있던 초점이 흐려졌다. 그는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하녀를 놓아 주었다. 즉시 바닥에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이런, 멜리사. 멜리사. 다 자라버린 도련님은 잊고 있었던 하녀의 이름을 불렀다. 바닥을 뒹굴던 하녀는 몸을 잘게 떨었다. 하녀를 향해 친절하게 내밀어진 손이 있었다. 잡고 싶지 않았지만 잡아야 했다. 버릇처럼 에이프런에 손을 문지르고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자꾸만 빠졌다.

 

   “걱정하지마.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단단히 틀어쥐고 있을 테니까. 알았지?”

 

   그는 하녀의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낮게 말했다. 다음부터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서운하게. 다정히 미소 짓는 입매가 비뚜름하게 호선을 그렸다. 조금 더 다가가 얼이 빠진 하녀를 위해 가볍게 친애의 키스를 한다. 오랜만에 만난 도련님은 키가 또 한 번 훌쩍 커서 원래 입고 있었던 제복 대신에 하녀의 눈에도 익숙한 청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주인님은 겉으론 툴툴거려도 그것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했다. 도련님에게는 더 이상 깨지거나 빠진 손톱도, 상처 난 얼굴도, 멍든 다리도, 퉁퉁 부은 발도 없었다. 또다시 마른 빵이나 남은 치즈를 몰래 내어 줄 필요가 없었다.

 

   “제이드 도련님.”

   “?”

 

   “곧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하지만 그는 여전히, 까마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