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로그

[제이드] 계약할 때는 특약조항을 꼭 확인해

IllillIll 2018. 1. 28. 18:16

160705 계약할 때는 특약조항을 꼭 확인해 (with. 랑케아)

 

 


   “그러니 네가 좀 다녀오거라.”

 

   뚱뚱한 남자는 의자에 파묻혀 거만하게 말했다. 남자의 두툼한 오른쪽 다리에는 붕대가 꼼꼼히 감겨 있었다. 붕대를 감은 다리를 부축한 보조 쿠션은 반으로 접은 것처럼 푹 파여 남자의 다리를 지지하기에 몹시 버거워 보였다. 제이드 라누아는 붕대 사이로 삐져나온 냄새나는 발가락 끝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버지께서 직접 진행하셔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몹시 중요한 일이니까요.”

 

   겸손이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는 어조에 남자는 이를 갈았다.

 

   “지금 내 다리가 이 지경인데,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솔직히 남자의 다리보다 남자의 거대한 엉덩이에 의해 형편없이 부서진 사과 상자가 조금 더 불쌍했다. 지금쯤 주방 화덕을 열렬히 데우는 장작이 되었겠지. 오죽했으면 하인들이 쟝 주인님! 이라고 외치기 전에 아이구 사과가! 라고 먼저 외쳤겠는가. 심지어 사과보다 이란 이름이 더 짧다. 아마 사과아아아아아아아쯤 되어도 사과의 안녕이 우선 될 것이다. 그러니까 언덕 위에서 마차를 세우고 내리다가 발이 미끄러져 늙은 공처럼 굴러 떨어지는 것 까진 좋았는데, 하필 사과 상자위에 성대하게 착지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사과보다 못한 라누아 가문의 가주, 쟝 라누아는 사이드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중요한 일이다. 영지에 딸린 목장을 두 개나 넘기면서 마련한 자리야.”

   “?”

 

   제이드는 기가 막힌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두 개나라는 기묘한 표현이 딸려와서 덧붙이는 말이지만 영지에 딸린 목장은 애초에 그 두 개가 전부다. 원래 열 개 정도 되는데 워낙 중요한 일이라 그 중에 통 크게 두 개 넘겼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냥 전부 넘겼다고 하지 그러셨어요, 우리 사이에. 괜히 구질구질하게 느껴지잖습니까. 게다가,

 

   “아버지, 목장은 수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어마어마한

   “나도 안다!!”

 

   숱이 엄청난 새카만 머리카락을 삐죽 세우며 가주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귀를 틀어막은 제이드는 새삼 자신이 대머리가 될 가능성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을 못 하는 게냐.”

   “, 그게제가 조만간 로열 글라디우스에 입단 시험을 치르는 일보다 중요한 게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쯧쯧. 가주는 혀를 찼다.

 

   “한심한 놈. 얼른 준비해라. 목장을 넘길 계약서와 짐을 싸서 오늘 안으로 여기서 당장 떠나. 크리스토퍼 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반드시 우리 가문이 줄을 댈 거리를 알아와.”

 

   제이드 라누아는 가주가 건넨 종이들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예에, 하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줄을 댈 거리라니. 이제 주군인지 뭔지 슬슬 정해놓고 지조를 지킬 때가 안됐나. 마차로 출발해도 제법 먼 길이 될 것 같았다. 벌써부터 피곤이 무슨 도적떼마냥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

 

 

   라누아 가문은 몇 십 년 전, 한 번 몰락했었다. 품지 말아야 할 역심을 품고 있었다던가, 세기를 뒤흔든 대사건이 있었다던가 하는 화려한 이유는 아니고 뒤에서 뇌물을 한 푼 두 푼씩 받다 사돈의 팔촌까지 줄줄이 생선처럼 엮여 걸리는 바람에 그랬다. 가문 식솔 열 명 중 아홉 명이 감옥신세를 졌다. 하인들은 밤마다 짝을 지어 도망갔고 돌봐 줄 사람이 없어 목장의 젖소들도 굶어 죽었다. 자연히 모두가 손잡고 아주 끝을 향해 달려 나가는 시나리오였다. 그나마 있던 재산도 모두 왕국에 몰수당해 귀속되고 말았다.

 

   라누아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전대 가주였던 올브레 라누아 덕이었다. 라누아 가문의 가주치고는 흔치 않게 퍽 자애롭고 인품이 좋은 자였다. 다이아몬드를 유난히 좋아했던 아내와 끝내 글을 떼지 못해 너무나 무식했던 아들, 뒷골목에서 제일가는 왈패로 이름을 날리던 딸을 포함한 식구들을 모두 감옥으로 보내고 홀로 저택에 남아 슬퍼하고 있던 전 가주를 위해, 올브레의 친우들은 그가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선뜻 재산을 일부 분할해 라누아 가문의 복잡한 재정에 보탰던 것이다.

 

   아무리 현대 가주인 쟝 라누아가 자신의 탁월한 능력으로 직접 다 쓰러진 라누아 가문을 일으켰다고 자부하지만, 올브레 라누아의 인덕에서 비롯한 기존 자금이 아니었다면 사실 어림도 없었다. 제이드 라누아는 식사시간마다 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줄창 떠벌리는 쟝 라누아가 참 딱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달리 할 이야기가 없었으면. 하지만 호박만한 주먹을 사서 얻어맞긴 싫었으므로 아무리 지겨워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지금 만나러 가는 크리스토퍼 브윅은 올브레 라누아의 친우였던 테오 브윅의 아들이다. 브윅 가문과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브윅 님. 쟝 라누아의 아들 제이드 라누아라고 합니다.”

   “! 이런! 어서 오게나.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검구먼. 그렇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이드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대머리 귀족 남자는 유쾌하게 맞아주었다. 크리스토퍼 브윅과 천천히 악수를 하며 그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흥미롭게 빛났다.

 

   “매우 중요한 자리라고요.”

   “그렇다네. 매우 가치 있는 자리지. 사실…… 겨우 라누아의 목장 두 개랑은 바꾸기엔 조금 곤란한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는 젖소보다 까마귀가 더 많던데지금은 사정이 좀 다른가? 많이 바뀌었겠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정말 궁금하군요. 아버지께 자세한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목장에서 기르는 젖소보다 주변에 서식하는 까마귀의 수가 더 많다는 소식을 굳이 알리지 않으며 말을 돌렸다. 저렇게 단언하다니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택으로 들어서며 브윅이 목소리를 낮췄다.

 

   “현 국왕께서는 말일세……

 

   , 맙소사. 안돼!

   제이드는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자신의 이마를 감싸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이런 분위기에, 첫 마디부터 국왕을 운운하다니 보나마나 뻔하고, 영 좋지 않다. 아버지, 이건 어떻게든 줄을 대보려고 여기저기 눈치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선을 넘는 일입니다. 기어코 선을 넘어서 우리 몸에 불을 지를 거라고요. 이러려고 목장 팔아 넘기셨습니까? 멀쩡한 기사단 관두고 로열 글라디우스에 입단하라고 하셨어요? 괜히 억울했다. 이대로 잘못하면 역적질에 가담하게 생겼다. 역사서에 가문의 이름을 남길 절호의 기회다. 아무리 가문의 이름을 광영무쌍하게 천세만세 빛내는 것이 아버지의 숙원이라지만 이번엔 방법이 틀렸습니다. 죄인의 이름을 쓸 때 쓰는 붉은 잉크로 적힐 거라고요. 가문의 위기와 몰락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렇게나 재림하기가 쉬운 일인가?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라누아 가문은 언젠가 제 것이 될 것이다. 그 전까지 단 하나의 흠집도 나선 안 된다. 무척 충격적인 첫 마디였으나 그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 …….”

 

   가문의 행방을 걱정하느라 이 역적 놈이 뭐라고 떠들었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

 

   “, 그러니까 제 말은, 조금 더…… 신중했으면…… ?”

   “자네는 모르겠지만 우린 그 동안 충분히 신중했네. 사내가 이렇게 도량이 작아서야.”

 

   르윅은 꽁한 표정으로 말을 자르고 그를 커다란 방으로 이끌었다. 빌어먹을.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소개라도 받았다간 대번에 동지라고 찍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역적당에 가입하고 싶진 않다. 자신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1층 복도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 . 그렇습니다. 제가 도량이 워낙 작아서 말인데,”

 

   찰칵. 반 쯤 열렸던 문이 제이드에 의해 다시 닫혔다.

 

   “갑자기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제가숨을 못 쉬어서 말입니다. 이해하시죠? 아버지께서도 늘 저를 걱정하십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좋은 자리에 저를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부디 양해해 주시길.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몸 약한 영애들이나 걸리는 병에 자네가 걸렸단 말인가?”

   “.”

 

   누구보다 신체 건강한 모습으로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 참 안타깝군.”

   “그래서 말입니다만, 우선 르윅 님과 독대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목장 거래 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마친 뒤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습니다.”

 

 

*

 

 

   “좋아. 좋아. 흐흐. 그래, 여기에 가문의 인장을 찍으면 되는가?”

   “자세히 읽어보시지요. 아무래도 내용이 조금 많습니다.”

   “아아, 아닐세. 괜찮아. 이것보다 얼른 다음을 준비해야지, ?”

 

   크리스토퍼 르윅은 계약서를 훌훌 넘겨 맨 마지막에 망설임 없이 가문의 인장을 찍었다. 넘겨받은 제이드 라누아도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그 옆에 라누아 가문의 인장을 찍는다. 흡족한 표정으로 크리스토퍼 르윅이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시선을 여유롭게 강탈하는 대머리가 불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였다.

 

   “물건은 잘 받았네. 아버님께 고맙다고 전해주시게.”

   “알겠습니다.”

 

   “또 얼마 후에 로열 글라디우스에 입단 시험을 본다지?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양 손가락 끝을 제 앞에 모으고 자동으로 비즈니스용 미소가 띄워졌다. 뭔가 말을 고르는 크리스토퍼 르윅의 콧구멍이 깔때기 모양으로 벌어진다. 인내심을 가지고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다소 싱겁게,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몸을 일으켜 나가는 뒤를 따르며 제이드는 흘끗 흐트러진 계약서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다. 조금만 투자하면 복리에 복리를 낳는 상품이었을 텐데. 쟝 라누아가 어떻게든 줄을 대려 웃돈을 주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않고 그나마 젊었을 적처럼 자체적으로 뭔가 하려고 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이드 라누아에게도.

 

   “이 쪽으로 오게.”

 

   르윅은 그를 아까와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본래의 큰 홀로 가는 것이 아닐까 했으나 그 옆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텅 빈 방 안에는 난데없이 종이 한 장이 놓인 테이블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이 있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대충이나마 견적이 나왔다.

 

   “라누아 가문이 이 모임에 정식으로 참석했다, 앞으로도 참여하겠다는 증거가 필요하다네. 후일 불합리하게 나올 배신자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지. 아무래도 이런 종류의 모임에서는 기밀 유지가 필수다보니까, 이해하시겠지?”

 

   제이드 라누아는 문 고리를 잡고 옆으로 비켜선 크리스토퍼 르윅을 지나 방 안으로 직접 들어갔다. 이게 다 뭐라고 어디선가 들어온 불빛 한 가닥이 종이를 영험하게 비추고 있었다. 연출까지 더해줄 만큼 이 순간을 신중하고 중요한 순간으로 인식해주길 바라는 건가. 정말 싫다. 왠지 소름이 우수수 돋아 팔뚝을 슥슥 긁었다.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그가 묻자 르윅이 인주를 가져다주었다.

 

   “가문의 문장을 그 종이에 찍게. 나는자네가 신중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겠네. 결정을 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든지, 아까 본 홀로 들어오게나. 동지들을 만나야지.”

 

   말이 없던 그는 알겠다며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작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그가 종이를 들어올렸다. 자세히 보니 여러 종류의 문양이 찍혀 있다. 이 일에 가담한 자들의 가문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종이를 가지고 도주라도 시도한다면목이 뽑혀 머리가 날아가겠지. 조금 잔인하긴 하지만 목장의 파리를 쫓는 허수아비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일에는 절대 무리수를 두지 않는 편이 좋다.

 

   “어디 보자…….”

 

   개중에는 이름을 알 만한 가문도 있었다.

 

   “, 찍는 건 어렵지 않은데.”

 

   . 인주에 한 번, . 종이 위에 한 번. 잘 찍혔나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리저리 살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만족한 그는 다시 종이를 둘둘 말아 끈으로 봉했다. 후련하게 한숨을 쉬고 방을 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면에 옆방에서는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지체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이럴 때 문은 참 쉽게도 열린다.

 

   “이게 누구야, 잘 왔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르윅이 막 들어서는 그를 반긴다. 그는 인장을 찍은 명단을 돌려주었다. 잘 생각했네. 흐뭇한 표정으로 받아든 명단을 가지고 방 한 가운데로 나아갔다. 주목을 받는 데 성공한 르윅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여러분.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라며 연설의 운을 뗐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날이 왔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날에 신사 숙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드는 체리를 입에 넣고 꼭지를 떼어 버렸다. 달고 상큼한 과향이 기분을 좋게 했다. 입 안에 싱싱한 체리를 잔뜩 넣고 나서야 출출함이 잦아들어 연설에도 흥미가 조금 돋았다.

 

   “그거 아십니까? 반역당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모두 체포될 것입니다.”

 

   ?

 

   갑자기 크리스토퍼 르윅의 날선 시선이 제이드 라누아에게 난데없이 날아들어 꽂혔다. 하마터면 입에 든 체리들을 모조리 뱉어낼 뻔 했다. 눈을 꿈뻑거리며 사태파악에 나섰다. 다행히 홀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제이드만 당황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노여움에 가득 찬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특히 라누아! 선친의 호의를 철저한 악의로 갚은 개만도 못한 족속들! 이번에야말로 가문의 몰락이 있을지어다. 졸지에 개만도 못한 족속으로 낙인찍힌 그는 뒤돌아 꾸역꾸역 체리를 삼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설마 도장 찍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통수를 때린 건가. 사실 그 갚았다는 악의라는 게 무엇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라누아를 두고 저러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기에.

 

   “올브레 라누아! 지옥에서 듣고 있겠지! 감히 당신이 편찮으셨던 선친의 눈앞에서 차용증을 태우던 날에 선친께서는 충격으로 영영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 거였습니까? 조부님, 탁월한 인품으로 기부받으신게 아니고 친우 분들께 재산을 빌리셨던 겁니까? 거기다 당신이 빌렸다고 쓴 차용증까지 이젠 모르는 일이라고 아프신 분 앞에서 아주 없애버리셨어요? 오늘내일하는 환자를 등치신 겁니까? 저런. 정말 너무하셨네. 왜 그러셨어요. 손자 곤란하게.

 

   “아니…… 저기…….”

 

   상대는 생각보다 무대포 기질이 양일했다. 아니, 막말로 이런 상황을 노린다면 철저하게 후일을 노리고 계획적이어야 맞지 않던가.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보통 손에 얻자마자 저렇게 티를 내는 자는 본 적이 없다. 칼침이라도 맞지 않으려면 저 치처럼 존재감을 독보적으로 뿜어내지 않는단 말이다. 역시나 대뜸 배신을 당한 반역당원들은 일제히 크리스토퍼 르윅에게 달려들었다. 크리스토퍼 르윅은 사색이 되어 문을 향해 뛰었다. 르윅 저택의 홀은 순식간에 쫓고 쫓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대로 개판이다.

 

   “곧 왕실 기사단이 도착할 겁니다. 내가 당신들을 밀고했으니까! 이제 난 국왕으로부터 반역당을 고발한 명목으로 큰 상을 받고 대대손손 출세하겠지!! 하하!! 다들 감옥에서 보자구! 물론 나는 창살 밖에 서있겠지만!”

 

   제이드는 난감한 얼굴로 젖은 손을 테이블보에 닦았다. 크리스토퍼 르윅이 들고 있는 저 명단이 무척 신경 쓰였다. 자신도 엄연히 저 명단에 가문의 인장을 찍은 사람 중 하나다.

 

   “멈춰라!”

 

   그리고 정말 식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때마침 왕실 기사단이 도착했다. 여기 반역당들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모두 멈추어라. 로열 글라디우스, 반란 진압을 위해 모인 푸른 제복의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이 입구를 봉쇄한 뒤 홀에 차례로 도열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잔뜩 겁에 질려 혼란스럽게 아우성이었다. 르윅은 반색하며 그들에게 얼른 달려갔다. 품에는 명단이 소중하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뺏는 데에는 끝내 실패한 모양이다.

 

   “여기 반역도들의 명단입니다!”

 

   제일 선두에 선 기사단장이 명단을 접수했다. 기사단장은 표정 한 점 없는 건조한 얼굴로 명단을 읽었다. 로스, 버벨러, 아우스트, 아니타, 퍼펠리스토, 나이젤, 앙트와…… 마지막으로 르윅. 경들은 왕실 기사단의 이름으로 이 자들을 모조리 체포하라. 이 저택 안에서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지엄한 명령이 내려졌다. 체포는 신속했다.

 

   “? 그럴 리가! 르윅의 문장은, 없을 텐데!!”

   “…… 이건 르윅 가문 문장이 아니던가. 내가 잘못 안 건가?”

 

   기사단장이 손수 명단을 펼쳐 보여주자 크리스토퍼 르윅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라누아 가문의 인장이 찍혀있어야 할 자리에 르윅 가문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하지만 그가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르윅 숙부님!!”

 

   누군가 뒤에서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제이드 라누아였다.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 너무 잔인합니다!”

 

   황금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했다. 억눌린 목소리가 처연하다. 갑작스런 슬픔에 일그러진 얼굴이 애처롭다. 르윅은 정말이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부인과의 첫 만남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끌어안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주름 잡힌 뒷목에 제멋대로 이마를 마구 부비며 흐느꼈다.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고 하시더니…… 이런 거였습니까?”

   “, 뭐라고?”

   “자수라니요!! 그것도 이들을 모두 끌어들이기 위해 역당의 오명까지 뒤집어쓰시고!! 겨우 이런 것을 위해 제게 나머지 목장까지 모두 넘기셨습니까!! 싫습니다! 받지 않겠습니다!! 정말 잔인하십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하시다니!!”

 

   후자의 것이야말로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자네에게 우리 가문의 목장들을

   “마지막 장의 특약 조항…… 보지 못하셨습니까? 아니, 모르는 척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나 크리스토퍼 르윅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 경우 르윅 가문의 모든 목장들을 라누아 가문에게 영구 양도한다.’ 라니, 이토록 어설픈 것에 가려진 숙부님의 큰 뜻을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그 큰 뜻이란 게 뭔데? 오늘 처음 뵌 숙부님을 조금 밀쳐내며 오열하는 제이드의 연기는 물이 올라 일품이었다. 세부 설정도, 대사도, 이미 완벽하게 계산이 끝난 상태였다. 게다가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특약조항의 등장으로 더이상 할 말을 잃은 것은 상대 쪽이었다. 마지막 장에 적혀 있었다니, 본 적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맨 눈으로는 차마 보기 힘들 만큼 엄청나게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던 것이다. 오는 동안 심심해진 제이드 라누아가 맘대로 달아둔 추가 조항이었다. 해당 조항을 포함한 모든 계약서 내용에 동의하며 가문의 인장을 찍은 사람은 크리스토퍼 르윅이었지만. 덧붙여 지금은 안위에 문제도 생겼다. 빌어먹을 특약조항인지 나발인지가 발효되기 일보 직전이다.

 

   “, , !!!”

   “숙부님!!”

 

   결국 크리스토퍼 르윅은 평소 혈압에 문제가 있었는지 뒷목을 붙잡은 채 기사들에 의해 끌려 나가고 말았다. 마지막에는 충격으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최후까지 열연을 펼친 제이드의 손이 허공을 잡았다. 그는 이 상황에 절망했다는 듯 으흑, 하고 바닥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다. 로열 글라디우스 기사들은 역당도 뭣도 아닌 소속의 그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빛만 교환할 뿐이다. 그런데,

 

   “왕녀 전하!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순간, 홀 안이 얼음물을 끼얹은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왕녀, 왕녀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틈에 섞였다. 제이드도 고개를 들었다. 체포된 사람 중 한 명이 다른 기사들보다 키가 조금 작은 기사의 발치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한 번만 살려주시면…… , 다시 충성을……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저 어린 소녀가 왕녀야? 그렇게 말한 사람은 제 말 소리가 조금 크게 들렸다 싶었는지 민망한 얼굴로 몸을 사렸다. 분명히 들렸음에도 비굴하게 몸을 말고 있는 자를 앞에 둔 소녀는 일말의 움직임이나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랑케아 경. 이 자를 아는가?”

   “모릅니다.”

 

   기사단장의 말에 망설임 없이 차갑게 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파장은 엄청났다. ‘랑케아라는 흔치 않은 이름은 그 어떠한 것보다 역심을 품었던 좌중을 훨씬 압도했다. 이 상황에서 발치에 납작 엎드리는 것만 할 수 있는 자는 떨리는 숨을 집어삼켰다. 누군가 작게 새된 비명을 질렀다. 우수수, 서둘러 옷들이 접히고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기사단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앞 다투어 머리를 조아렸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금 전 까지 소란스럽던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모욕하려는 게 아니면 일어나십시오. 저는 버미어의 왕녀가 아니라 로열 글라디우스의 기사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 예를 받을 수 있으신 분은 국왕 전하 뿐입니다.”

 

   머리를 다급히 조아리진 않았지만 한 발 물러나 있었던 제이드는 고도로 절제된 태도를 고수하는 그녀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물린 표정을 지었다. 올 때만 해도 초여름이었는데 벌써 겨울인가. 랑케아 렉스 버미어. 당연히 들어본 이름이다. 무엇보다 버미어라는 성은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국가의 이름을 성으로 쓸 수 있는 자들은 자격이 까다롭게 한정되어있다. 일단제일 먼저 왕궁에서 태어나야 한다. 태어나자마자 왕이나 왕비의 얼굴을 자동으로 알현해야 하고그 무시무시한 조건만으로 탈락자들이 무수히 속출할 것이다. 왕녀의 건조한 말 한마디에 초장부터 탈락한 예비 지원자들이 머뭇거리며 하나 둘 일어섰다. 민망한 장면이다.

 

   “연행하라.”

 

   기사단장이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작은 소동에 의해 잠시 멈췄던 반란 진압은 다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르윅의 계략이었는지 드물게 반역도들이 사병들을 대동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 흐르듯 막힘없었다. 왕녀에게 목숨을 구걸하던 자도 가차 없이 끌려 나갔다. 그 자는 역적놈 주제에 끝까지 왕녀를 부르짖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잠시 난리를 느긋하게 감상하던 제이드는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자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고 있었다. 검집에 그녀의 손이 얹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당장 뽑을 기세는 아니었으나 판단이 끝나면 벨 여지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제이드는 우선 반 보 물러나 가볍게 인사를 했다. 조금 전 소동에서 있었던 것처럼 거한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아직 어린 소녀기사의 시선은 기실 키가 훌쩍 큰 그의 시선보다 한참 아래에 위치해 있었으나 어쩐지 동등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아니면, 아주 위일까. 그는 슬핏 웃었다. 꾸며낸 것은 아니다.

 

   “제이드 라누아라고 합니다. 랑케아 경.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기 계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오늘 숙부님께서 제게 보여주실 게 있다고 해서 저택에 왔습니다만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반란이라니. 참 끔찍합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게말씀하시는 분 치고 태도가 가벼우십니다.”

 

   비수처럼 꽂히는 말이었다.

 

   “‘그렇게보이십니까. , 이런. 쓰러져 울기까지 했는데.”

 

   눈에 띄게 침울한 표정. 랑케아의 자색 눈동자가 가늘게 뜨였다가 커진다. 힘 있게 뻗은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검집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는 알면서도 여유롭게 홀 안의 상황을 살폈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살벌한 왕녀님과 계속해서 말을 섞는 것은 불리했다. 굳이 상대가 왕녀가 아니더라도, 묘한 위치에 섰을 때는 자리를 비키는 게 좋다.

 

   “다음에 혹시, 이 일과 관련하여 말씀하실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물론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르윅 숙부님을 위해서라도.”

   “…… .”

 

   의외로 산뜻한 제안에 그녀는 그가 지나갈 수 있게 비켜섰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그녀에게 감사함의 목례를 하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계약서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거 죄명이 확정되기 전에 일을 진행해야겠군. 사방에 증인 동지들이 있으니 크리스토퍼 르윅이 감옥신세를 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로써 라누아의 재정이 한층 풍족해졌다. 흐뭇한 얼굴로 코 밑을 쓱 문질렀다. 엄청난 기여도를 확신하고 제법 뿌듯함을 느꼈다. 아버지에게는 유난히 재수가 없었다고 하면 된다.

 

   로열 글라디우스 입단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태연하게 마차에 올라 계약서를 정리하던 제이드는 얼음으로 조각한 것 같은 왕녀를 떠올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자색 눈과 꾹 다문 입술이 아름다운. 그녀는 앞으로 그가 입을 예정인 푸른 단복을 입고 있었다. 후일 그 눈이 무엇을 비출지 순수하게 궁금했다. 또렷한 동공이 극도로 압축된 무엇 같이 보였다. 문득 감히 알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파악이 어려운 것은 흔치 않다. 왕비의 소생이라고 알고 있으니 정식으로 유일한 후계자가 될 여지도 충분하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격동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제이드는 마부에게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앞으로 조금 더 생각할 거리가 생겼군.”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입매가 조금 올라간다.

   돌아가는 길은 또 그만큼 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