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로그

[제이드] 어느 비 오던 날에

IllillIll 2018. 1. 28. 18:12

160701 어느 비 오던 날에 (with. 모리스)

 

 


   봄의 무대를 마치는 장막을 드리우듯 여름비가 곱살하게 내렸다. 새벽부터 내린 비는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이런 날에 비를 잘못 맞으면 길거리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가 오는 수가 있다. 남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음, 하고 말을 골랐다.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결정한 뒤, 미련 없이 건물 입구에서 그대로 몸을 돌렸다. 사실 오늘 그는 유명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었다. 식당의 포도주가 일품이라는 소문도 장소 결정에 한몫했다. 그러나 어차피 소문만큼 고급스런 포도주도 아닐 것이다. 보나마나. 소문은 늘 반쯤은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모리스 바스티안 뢰슬러는 저처럼 외출을 포기한 기사들로 인해 절반은 좁아진 남쪽 숙사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혹시나 하여 지나쳐 본 1층 휴게실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굵직한 목소리들로 시끌벅적했다. 게다가 휴게실을 넘어 식사 시간도 아닌 시간에 식당마저 야금야금 점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머리가 아파져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습하군. 이럴 때는 아름다운 연인과 새 시트가 깔린 침대에서 늘어지게 뒹구는 것이 최고이거늘. 완전히 망한 식사를 대체할 요깃거리로 과일을 생각해냈다. 오늘 아침 수레를 들여온 모양이니 신선도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 . 조심합시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낮게 숙인 남자가 그의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더 이상 방해 받고 싶지 않았던 행보를 방해 받았기에 한 쪽 눈썹이 조금 각도를 세웠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마침 바닥과 거의 입 맞출 뻔한, 그의 신발 밑창 사이를 헤집고 한 장의 얇은 카드가 남자의 손가락에 소중히 잡혀 나온 것을 보았다.

 

   “예쁜 카드에 경의 발자국이 남으면 곤란하잖소.”

 

   예쁜 카드? 나머지 한 쪽 눈썹이 각도를 맞췄다. 남자는 씨익 웃으며 그것을 흔들었다. 원형 테이블 위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드들이 보였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했는지 떠들썩한 웃음이 터졌다. 이미 판이 한창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장소가 휴게실이라지만 엮여서 좋은 소리는 못들을 것 같았다. 목례를 하고 떠나려던 그는 마지막 순간, 무심코 카드에 그려진 그림을 확인하고 제 눈을 의심했다.

 

   “이것을 어디서 구했습니까?”

   “으응?”

 

   갑자기 그가 패를 빼앗아들자 남자는 몹시 당황했다. 이보게. 내 앞에 앉은 둘 중 어느 녀석한테 사주 받고와서 방해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이왕 하는 건 공평해야한다고 봅니다. 남자는 급기야 건너편에 앉은 상대에게 이를 바짝 드러내며 위협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상대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어깨를 으쓱였다.

 

   “,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이 카드들.”

 

   그는 다시 한 번 물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카드를 이리저리 살폈다.

 

   “숙소 근처 술집 뒤에 가면 제스라는 자가 있소. 그 자에게 구했습니다. 나 참.”

   “‘구했다고요? 이건세상에이봐요 경, 이것은 돈을 주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어째서 이런 물건이 이런 누추한 곳에 있는가?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후작의 성을 드나들며 갈고 닦은 그의 고매하고 고상한 미적 안목과 폭 넓고 다양한 문화식견에 따르면, 이 카드들은 분명 백 년 전의 위대한 예술가 앰브로스의 작품이다. 앰브로스 왈터비치는 생전 단 열 점의 작품만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앰브로스가 직접 그림을 그린 카드들이었다. 초기에 완성되어 비교적 덜 유명한 작품이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예술에 눈썰미가 있는 자라면 응당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앰브로스 왈터비치의 작품은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어 없어졌을 텐데. 화풍이 대단히 독특하며 작품 안에 숨겨진 요소가 많아 웬만큼 솜씨 있는 자일지언정 비슷하게나마 느낌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구차하게 모작 따위를 하며 먹고 사는 이들이 모두 평민이라 그 한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군. 아름다워.”

 

   그의 적갈색 눈이 흥미로움으로 빛났다. 신전 기둥에 숨은 비둘기, 빛을 비추면 희미하게 나타나는 신의 전령, 다섯 번째 카드의 다섯 주신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아이비 잎사귀들, 심취할수록 입술이 멍하게 벌어지는 것도 모르고 그는 기사들의 게임을 맹렬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저기…….”

   “…… 잠깐.”

 

   . 그는 조심스레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기사를 단호히 쳐내고 숨을 들이켰다. 심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 발끝까지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마지막 카드를 확인한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말도 안 돼. 기록대로라면 마지막 카드의 정 중앙에는 첫 번째 카드와 반전된 형태의 나무가 그려져 있어야 했다. 그래야 아귀가 맞았다. 자고로 이 작품의 의의와 완성은 그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생뚱맞게도, 마지막 카드에는 대뜸 검은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모리스는 너무나 기가 막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진품이…… 아니란 말인가?”

 

   황급히 테이블에 놓인 카드 한 무더기를 쓸어 담아 품에 안고 빗물을 담아놓던 그릇을 찾았다. 떨리는 손으로 카드 한 장을 집어 빗물에 살짝 넣어보았다. 영겁만고의 시간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실제로는 매우 짧은 시간 만에, 카드에 입힌 잉크가 녹아 물에 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품. 맙소사. 이것은 가품이다. 앰브로스는 모든 작품에 자신이 특수 제작한 물감과 잉크를 썼기 때문에 물에 이토록 쉽게 녹거나 물들지 않는다. 누군가 벌인 치가 떨리게 잔인한 처사였다. 위대한 예술품에 대한 모욕, 그 아름다움과 찬란한 가치에 대한 엄청난 능멸. 게다가 이름도 모르는 천하괘씸한 모조품 제작자, 평민 따위에게 대뜸 얻어맞고 멍청이 취급까지 받은 셈이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속에서 들끓었다. 그러나 제법 잘 갈무리한다.

 

   “…… , 그 자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태를 완전히 파악한 시선이 정돈되어 서늘하게 빛났다.

 

   잠시 후, 그는 드세게 쏟아지는 소낙비를 헤치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술집으로 향했다. 바닥이 흙탕물로 질척거렸으나 날씨가 워낙 발을 디딘 이상 이것저것 신경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어쩔 수 없이 축축함을 감내하며 도착한 그는 머지않아 한산한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상한 치즈 냄새인지 아주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정확히 가격했다. 검지를 코 아래에 대며 곧장 주인을 찾았다. 마침 계산대에서 돈을 세던 뚱뚱한 주인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쇼. 그런데 술이 아니라 식사를 하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 아니, 아닙니다.”

 

   그는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기 제스라는 사람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스? . 그 친구를 만나러 오신건가. 마침 잘 됐네. 최근 며칠은 안보이다가제일 안 쪽 자리에 있습니다.”

 

   술집 주인은 소세지같은 손가락으로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기둥에 가려져 애써 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솔직히 다짜고짜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을 최선을 다해 눌러가며 건너편 자리에 우아하게 예법을 지켜 앉았다.

 

   “그 쪽이, 제스 씨?”

 

   이야, 이게 누구시지. 그가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상대는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생각보다 금세 웃음을 멈추고 뒤집어 쓴 후드를 벗었다. 짐작대로 남자다.

 

   “저를 아십니까?”

   “아니, 실은 잘 모릅니다. 그저 제 손님은 아니신 거 같아서요.”

 

   남자는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사 분께서 절 찾아오신 용건은?”

 

   . 가짜 카드 한 장을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은 그의 얼굴이 굳어있다. 사뭇 진지하게 나오는 자세에 남자도 미소를 거두었다. 잠시 카드를 덮었던 손이 치워진다. 검은 장미가 그려진 마지막 카드다. , 하고 의중모를 감탄사가 남자에게서 터져 나왔다.

 

   “허가되지 않은 모작은 명백한 위법행위입니다. 법전 관련 조항에 따르면 허위로 수출되거나 가품을 진품으로 속여 팔아 이득을 취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나라에 등록된 소수의 모작가들만이 합법적으로 작업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앰브로스 왈터비치의 특별하고 교묘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을 이렇게까지 모작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나 현재 국가에 등록 신고된 모작가들 중에 왈터비치의 작품을 허가받은 이는 없으므로 최소 100대의 태형부터 최악의 경우는 평생 감옥에서 지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제스 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을 쏟아 부은 그는 후련한 기분으로 턱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대답 없이 눈을 꿈벅거린다. 그러다가 흐음, 하고 돌연 심각한 얼굴을 하며 엄지로 아랫입술을 만진다.

 

   “제가 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단지

   “단순 운반책도 형벌을 피하긴 어렵습니다.”

 

   이를 악물고 말을 잘랐다.

 

   “협박을 당해서요.”

   “.”

 

   단언컨대 누가 들어도 개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변명을 하시려면 그럴 듯 하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글쎄, 거짓이 아닙니다만.”

 

   제 손을 마주 모은 남자는 몸을 당겨 조금 더 다가왔다. 그는 문득 옆으로 시선이 새는 남자의 두 눈이 호박琥珀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뭔가 말하기를 망설이던 남자가 다시 빙긋 웃었다. 이런. 워낙 미남이신 분을 앞에 두고 있자니 말을 잇기가 어렵네요. 그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별 말씀을. 어디 감방에 들어가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고 속으로 벼른다.

 

   “저기 밖에 모여 있는 덩치들이 보이십니까?”

 

   남자는 비가 얼룩져 떨어지는, 흐린 창밖을 가리킨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험악한 얼굴로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뢰한들인가.

 

   “뒷골목에서 제법 주먹을 쓰는 자들이죠. 사람들을 위협하고 이 근처에서 불법 세를 걷어내기로 유명한데, 절 협박해 각종 물건들을 팔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저는 검술에 재능도 없어서. 얼른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이제 저들이 곧 이 술집 안으로 들어올 겁니다. 셋을 셀 동안 도망가지 못하면 저 같은 사람은 꼼짝없이 얻어맞고 말 겁니다. 불쌍한 술집 주인도요. 저기 떨고 있는 거 보이시죠?”

   “그 쪽 사정이야 어쨌든, 그나저나 이 카드를 모작한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너무하십니다. 보아하니 기사 같은데 기사라면 자고로 당연히 백성을 보호하고

   “제가 규율에 따라 보호해드릴 의무가 있는 분들은 불쌍하고 가련하며 죄 없이 깨끗한 분들 뿐입니다. 당신 같은 범법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안부가 걱정되시면 절친하신 여기 술집 주인장도 조사한 바에 의거 불법 포도주 양조장과 연관되어 있으니 기꺼이 함께 포함시켜드리겠습니다. 이쯤 되면 대단히, 엄청나게, 비로소, 이제야,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라고 판단이 서실 겁니다.”

 

   그는 개인 여름 햇살처럼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 아직 죄를 인정하지도 않았는데요, 기사님. 볼멘소리로 대꾸한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댔다.

 

   어쨌든 제스라는 남자의 예언대로, 한 무리의 불량배들이 몹시 불친절한 태도로 술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분히 소란이 일어날 여지가 충분해 보였다. 등장부터 요란하게 술집 주인의 목을 잡고 좌우로 흔든다. 그는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으로 사태를 방관했다. 때를 노렸다가 여차하면 뒷문으로 조용히 나갈 생각이었다. 귀찮은 일에 말려들고 싶진 않았다.

 

   “. 제 생각에는……

   “또 말을 돌리실 생각이시라면, 그만 두시는 게 이로우실 겁니다.”

 

   그는 술집 주인이 대범하게 양철 냄비로 불량배의 머리를 공격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며 말했다. 의외로 속도가 빠르고 정확한 솜씨다.

 

   “아뇨, 그저 조금 더 심도 있는 우리 대화는 다음 기회로 미룰까 싶어서.”

   “무슨!!”

 

   황급히 몸을 다시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사다리도 없이 어느 샌가 천장 틈에 매달려 다락 창고 문을 열어제낀 남자는 가볍게 몸을 올렸다. 그는 황당한 얼굴로 높은 천장에 난 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먼지로 뒤덮인 어둠 속에서 남자가 불쑥 나타나 손을 흔든다. 어이쿠. 아쉽지만 다음 약속이 있는 바람에. 미안합니다. 쓸데없이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한껏 머금은 말투다.

 

   “, 맞다.”

   “…… ……?”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사라졌다.

   엉겁결에 가짜 카드 한 장과 덩그러니 남겨진 그는, 웃었다.

 

   “…… 하하. 개자식.”

 

   제이드 '제스' 라누아와 모리스 바스티안 뢰슬러가 본연의 신분으로 재회하게 된 것은 다소 훗날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모시고 있는 왕재도 달랐을 뿐더러, 각자 걷고 있는 길 또한 매우 달랐다. 두 사람이 이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지나간 일인 셈 쳤을지도 모르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다 벌어진, 비 오는 날의 작은 해프닝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