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로그

[블리스노아] 고백

IllillIll 2018. 1. 28. 16:53

   그는 글 같은 것을 썩 잘 쓰는 편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학생으로서 한 주에 두 편, 많으면 세 편 씩 쓰는 간단한 에세이나, 리포트 같은 것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범주에는 편지도 포함되었다. 편지를 써 본 경험은 딱히 없었다. 기껏해야 독감 때문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러가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트리가 그려진 성탄 카드에 내년에는 같이 가자정도만 적어 건넸던 어렸을 적의 어렴풋한 기억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써야 하는 편지는 그것과 사뭇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애꿎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기에 바쁜 그가 궁극적으로 이 베이지 색 편지지에 어떻게든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왜 하필 A반의 노아 그린만 보면 심장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 이 황망하기 그지없는 사태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었다. 그러니 펜촉이 망가질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토록 자신이 글을 참 못 쓴다는 사실을 체감한 적이 없었다. 연산 같은 건 자신 있었다. 아니면 암기라든가. 아무튼, 작문 실력은 영 꽝이었다.

   다음 날, 결국 그는 써내고 싶었던 분량의 절반도 못 채운 채로 노아 그린을 나무 그늘 아래로 불러내야만 했다. 청량한 색감의 나뭇잎들이 만들어 준 나무 그늘은 그날따라 넓었다. 오늘도 심드렁한 표정인 그의 짝사랑 상대는 다행히 차분하게 그가 쩔쩔매는 모습을 구경해주고 있었다. 등 뒤로 감춘 손에 어김없이 열이 일었다. ‘블리스 엘은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닿으면 부드러울 것 같았고, 어둡고 붉었다. “할 말이 뭡니까.” 지난 오 분간의 실랑이는 노아 그린이 느끼기에 지극히 무의미한 것이었다. 다채로운 색을 담은 갈색 눈이 흔들렸다. 알기 쉬운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있잖아.” - 있잖아. 노아 그린은 말버릇부터 무작정 내뱉는 상대를 주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이거. 읽어 줘. 블리스 엘이 내민 것을 흘끔 보았다. 그리고는, 한숨. 노아 그린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으나, 한숨을 쉬고 나서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제가 무엇을 읽으면 되는 겁니까. 어딘가 날이 서 있는 어조에 꾹 감겨있었던 블리스 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모든 것이 삽시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편지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불씨를 머금은 듯 불긋하던 모서리가 서서히 재로 변해 마침 불어온 실바람에 투둑, 떨어지고 말았다. , . 그가 급히 남은 편지를 잡고 실재하지 않는 열기를 식혔다. 하지만 그 노력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아 밝혀졌다. 편지는 제멋대로 타들어가 어느덧 원래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작아져버렸다.

   들은 적이 있다. C반에 속해 있는 학생들의 소문은 당사자가 그리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학교를 한 번 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곤 했다. 아마 그의 불안정함은 감정과 정서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태우는 능력이라고 했던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라면서.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았다. 노아 그린이 준비한 답변은 뻔했다. 거절. 준비한 것도 받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그것을 주기도 전에 재로 화해버리는 상황은 노아 그린으로서도 예상 밖이었다. 잘 됐네요. 노아 그린은 차갑게 운을 띄웠다. 그 쪽과는 고작 몇 번 대화를 나눈 것 뿐인데 썩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었, 그리고 다시 먼 산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그를 바라보았을 때 닥친 상황도 한참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울고 있었다. 하나하나 손톱만한 눈물들이 창문을 타고 구르는 빗물처럼 줄지어 떨어졌다. 잠깐만요. 노아 그린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보 물러날 뻔 한 것을 참았다. 주고- 주고 싶었는데. 꼭 주고 싶었는데. . 그렇게 더듬더듬 토막 난 말을 내뱉는 코끝은 살짝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열심히, 썼는데. 어제. 억지로 붙들고 있던 마지막 편지 조각이 바람에 맥없이 날렸다.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아서, , 열심히얼굴을 덮는 두 손의 끝이 희미하게 검었다.

   검었다가, 붉었다가, 다시 하얗게 변해가는 손끝은 노아 그린이 말없이 등을 돌려 자리를 뜰 때까지 떨리고 있었더랬다.

   교실 안으로 성큼 들어온 노아 그린은 드물게 책상 위로 엎드러져 눈을 감았다.

   정말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흉통 안에서 뾰족한 무엇이 제자리뜀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