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스이브] 여우
북부로 파견을 갔을 때의 일이다. 그 해는 첫눈의 시기가 많이 빨랐고, 그가 파견지에 도착했을 적에도 너무나 당연하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위로 긴 나무들을 제외하면 이미 시야가 온통 희었다. 누군가 건조한 땅에 흰 마시멜로우 잼을 잘 바른 듯 했다. 걸음을 딛을 때마다 차츰 땅이 꺼지며 귀가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잘 닦인 접시를 문지르는 듯한. 그 소리가 끊긴 것은 둔덕을 반쯤 올라서였다.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작은 구슬이 달린 긴 머리끈과 함께 겨울 찬바람에 감겨 옆으로 흩날린다. 흐음. 까마귀는 간질거리는 코 밑을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렀다. 차마 지나칠 수 없는, 희미하고 낯선 소리에 귀 밑이 달았다. 언뜻 듣기에 갓난아이가 우는 소리 같기도 했고, 작은 짐승이 신음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무언가를 연신 파헤치며 버스럭거리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재차 걸음을 뗄 수도 있었으나 까마귀는 순전히 호기심에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까마귀가 눈밭을 가로질러가 본 것은 작은, 정말 작은 꼬마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체구의 어린아이가 얼기설기 엮인 그물에 갇혀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거리다가, 제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선 까마귀를 뒤늦게 발견하고 놀라 몸을 웅크렸다. 너무 늦은 반응이라 새삼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나온 붉은 꼬리를 품에 껴안고 최대한 몸을 낮추는 게 아닌가. 붉은 머리를 헤치고 두 귀가 쫑긋 섰다가 축 내려앉았다. 까마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따라 몸을 낮추었다. 아무리 까마귀 쪽에서 시선을 낮추어도 워낙 상대가 작은 탓에 동등해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가까이서 서로를 확인할 수는 있었다. 먼저 검지를 내밀었다. 아이는, 그러니까―어린 여우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아이는 까마귀의, 제이드 라누아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레 킁킁거리다가 뭔가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허겁지겁 제 꼬리를 다시 껴안았다.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아 단단히 겁을 먹은 듯 했다. 맑은 눈동자 한 쌍이 저보다 훨씬 큰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이런. 제이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눈송이 하나가 아이의 콧잔등에 닿아 사라졌다. 엣취. 아이는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도와드릴까요. 그는 정말로 별 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건넸다. 그러나 불신으로 가득찬 시선이 그의 손길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피식 웃은 그가 그물의 매듭에 손을 댔다. 당연히 아이는 펄쩍 뛰며 좁은 그물 안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야. 어떻게 하면 이것을 풀 수 있는지 재던 제이드는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손을 물린 것이다. 우습게도 오히려 제가 한 행동에 놀랐는지 아이는 새된 비명을 삼켰다.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이드가 아이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제가 조금 도와드릴게요. 더해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그물을 조이던 매듭은 쉽게 풀렸다. 아마도 솜씨가 엉성한 자가 설치해놓은 듯 했다. 자. 됐지요. 보십시오. 커다란 손이 아이를 집어삼켰던 그물을 걷어내 주었다. 아이는 쌓였던 답답함을 털어내기 위해 빠르게 고갯짓을 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구원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까마귀를 닮아 몹시 검고, 눈만, 그것도 꼭 하나의 눈만 밝은 금빛으로 빛나는 남자였다.
아이의 뺨은 복숭아마냥 옅게 붉었다. 제법 쌀쌀한 추위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여문 뺨에 손을 가져다대자 아, 하고 눈을 바쁘게 깜박였다. 그의 손은 이 추운 겨울에 어울리지 않게 따뜻했다. 꽤 오랜 시간 이곳에 붙들려 차게 식은 뺨을 손에 부볐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체온이 달군 손마디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자연히 스쳤다. 귀한 보석과 같은 빛깔이다. 이를테면, 루비처럼 붉은. 붉디붉은 작은 아이였다. 머리카락도, 그 위로 쫑긋 솟은 귀도, 몸에 비해 크고 복슬거리는 꼬리도. 눈은 진한 호박색이었으니 오히려 그것이 돋보였다.
제이드는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호박색 구슬이 기분 좋게 사라졌다가 도로 나타난다. 그럼 이만, 어어. 작별인사를 하려는 찰나 아이는 눈 더미 위에서 일어나 그의 목을 덥썩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껴안긴 제이드의 눈에 살랑거리는 붉은 털 뭉치가 들어왔다. 꼬리의 동선을 따라 시선이 양 끝을 찍고 천천히 움직였다. 아아. 잠시만요. 저기― 안타깝게도 이름을 몰랐다. 할 수 없이 잠자코 안겨있던 제이드는 아무리 기다려도 떨어질 기미가 없는 아이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 우으. 아이는 무의미한, 어쩌면 유의미할지도 모르는 소리로 입술을 오물거리다 품을 파고들었다.
으음. 어떡할까요. 까마귀는 답이 돌아올 리 없는 허공에 대고 묻는다.